마릴린 먼로도 폭로한 '캐스팅 카우치', 할리우드의 악행
[이준목 기자]
▲ tvN <벌거벗은 세계사>의 한 장면. |
ⓒ tvN |
할리우드(Hollywood)의 최전성기는? '언제나 바로 지금'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할리우드는 세계적인 스타와 명작들을 배출한 미국 영화 산업의 메카이자, 전 세계 영화시장의 50% 이상을 지배하고 있다는 거대한 시장이기도 하다. 할리우드는 지난 100여 년의 역사에 걸쳐 인류의 상상력과 판타지를 현실에 구현해내는 '꿈의 공장'으로 자리매김했다. 하지만 이처럼 화려한 할리우드의 이면에는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묵인되어 온 각종 추문과 비리의 어두운 그늘 또한 존재한다.
8월 22일 방송된 tvN <벌거벗은 세계사> 113회에서는 '할리우드 성장에 감춰진 추악한 진실'편을 통하여 세계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중심에 있는 할리우드의 빛과 그림자에 대하여 조명했다. 홍종규 가톨릭관동대 역사교육과 교수가 이날의 강연자로 나섰다.
할리우드는 본래 미국 캘리포니아 로스앤젤레스 중심부의 해안가에 위치한 지역명이다. 19세기 후반까지만 해도 할리우드는 허허벌판이던 땅에 과수 재배를 하던 시골 농지에 불과했다. 19세기 말 부동산 업자였던 하비 윌콕스 부부는 당시만 해도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던 이 일대를 저렴한 가격에 15만 평이나 매입했다. 윌콕스의 부인은 부지를 돌아보다가 목재를 운송하던 한 작업자와 마주쳤는데 "I haully wood(나무를 운반중이다)"라는 그의 말에서 영감을 얻어 이 일대의 지명을 할리우드로 정했다는 속설이 전한다.
할리우드는 어떻게 영화 산업의 중심지가 됐을까. 아이러니하게도 그 시작은 '발명왕' 토마스 에디슨(1847-1931)과 영화계의 악연에서 비롯됐다. 에디슨은 1890년대 영화 촬영(키네토그래프)과 관람 기계(키네토스코프)를 제작했고 특허회사를 설립하여 영화 제작과 상영을 독점했다. 에디슨이 특허권을 무기로 막대한 수입을 올리면서 영화산업에 대한 과도한 통제와 갑질을 일삼자, 이에 질린 미국의 영화 제작사들은 동부 지역에서 반대쪽 서부의 끝인 캘리포니아, 당시만 해도 중소도시였던 할리우드 지역으로 대거 이주하여 자리를 잡았다.
동부의 뉴욕과는 달리 에디슨이라는 걸림돌이 없는 데다, 1년 내내 화창한 캘리포니아의 기후, 인근에 사막-평야-바다-설산이 모두 공존하는 천혜의 환경 등은, 영화 제작을 위한 모든 최적의 조건들이 보장되는 '기회의 땅'이기도 했다. 이때부터 '할리우드'라는 말은 연극의 브로드웨이, 한국의 충무로처럼 미국 영화 산업의 중심지를 이르는 일종의 대명사로 자리잡게 된다.
1차세계대전(1914-1918)은 세계 영화 시장의 중심이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애서 미국으로 이동하며 할리우드의 역사를 바꾸는 중요한 전환점이 됐다. 유럽 전역으로 확산된 전쟁의 여파로 수많은 산업시설이 파괴되면서 유럽은 문화의 중심지에서 암흑으로 바뀌어버렸다. 덩달아 영화산업 역시 큰 타격을 입었는데, 당시 영화 제작용 필름과 군수물자인 폭탄에 사용되는 화합물(질산 셀룰로오스)이 동일한 재료이다보니 유럽에서는 사실상 영화 제작이 거의 중단됐다. 이때부터 상황이 역전되어 오히려 유럽에서 할리우드 영화를 수입하여 상영하는 것이 보편화되기 시작한다. 할리우드는 유럽의 위기 속에 경쟁 상대없이 급성장을 거듭할 수 있었다.
1차대전 이후 프랑스 영화의 영향력이 줄어들면서 미국은 장편영화 제작편수가 해마다 급증했고, 파라마운트와 유니버설 등 대형 영화제작사들은 전세계에 걸쳐 할리우드 영화를 수출하는 지사를 건립한다. 이 무렵 한국에서도 우미관(優美館)을 통하여 할리우드 영화사와 특약을 맺고 미국 영화를 수입하며 독점적으로 상영하기 시작했다.
우리에게 익숙한 할리우드를 상지하는 사인판이 설치된 것도 이때부터다. 본래의 사인판은 'HOLLYWOOD LAND'였지만, 1932년 페그 엔트위슬이 사인판 위에서 투신자살하는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하면서 '13'이라는 글자가 불행을 상징한다는 인식 때문에 'LAND'를 철거하고 지금의 아홉 글자만 남긴 것.
세계 영화 산업의 중심지로 올라선 할리우드는 고공 행진을 거듭하며 서서히 그들만의 고유한 시스템을 만들어나가기 시작한다. 워너브러더스, 파라마운트, 콜롬비아 픽처스 등 우리에게도 친숙한 대형 영화사들을 중심으로 하나의 기업이 제작사-배급사-영화관까지 모두 운영하는 '수직통합 체제'를 구축했다.
메이저 영화사들은 티켓 파워를 지닌 유명한 배우-감독들과 전속 계약을 맺어 관리하면서 연예 매니지먼트 산업의 시초가 됐다. 또한 영화 홍보를 위하여 제작한 사진과 기사들을 모아 영화사들이 정기적으로 '잡지(Magazine)'를 발간하기 시작하면서 영화 언론과 출판 산업의 발전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 tvN <벌거벗은 세계사>의 한 장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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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유성영화 시대의 도래와 함께 극장가에도 큰 변화가 찾아온다. 무성영화 시절, 서민들이 저렴한 가격으로 소규모의 극장에서 관람하는 문화였다면, 유성영화 시대에 접어들면서 극장은 규모가 더 커지고 화려해졌다. 영화사들은 마치 오페라 극장처럼 보다 많은 관객들을 수용할 수 있고 최상의 음향장비를 갖춘 신식 영화관들을 건설하는 데 투자하기 시작했다. 여름철에 더위로 영화에 집중하기 힘들어하는 관객들을 위하여 극장에 에이컨이 설치되고, 등받이 조절 의자가 도입된 것도 이때부터였다. 극장의 발전과 함께 할리우드 영화 산업은 대호황기를 맞이하게 된다.
하지만 1920년대 후반부터 미국과 전 세계를 강타한 '경제 대공황'은 승승장구하던 할리우드 영화산업에도 큰 위기를 불러온다. 전국적으로 실업자들이 속출하는 상황속에서 영화 산업도 불경기를 피할 수 없었고 메이저 스튜디오들조차 일제히 적자를 면치못했다. 영화사들은 불황을 극복하기 위하여 계속 상승하던 티겟 가격을 인하하거나, 티켓 하나로 두 편의 영화를 관람할수 있는 '동시상영'을 시행하기도 했다. 또한 경제적이고 편리함을 찾는 관객들을 위한 야외 '자동차 극장'이 새롭게 도입됐다.
뮤지컬 영화의 등장도 중요한 변화다. 1929년 최초의 뮤지컬 영화 <브로드웨이 멜로디>를 시작하여 < 42번가 > <오즈의 마법사> 등은 화려한 춤과 노래를 통하여 유성영화의 장점을 극대화한 뮤지컬 영화를 통하여 잠시나마 현실의 시름을 잊고 암울한 사회 분위기를 극복하려는 마케팅을 시도했다. 그 결과 대공황 시기에도 많은 관객이 극장을 찾았고, 영화관의 숫자 역시 꾸준히 증가한다. 1930년대 중반에 접어들면서 영화사들의 순이익 역시 정상궤도로 돌아왔다.
2차세계대전(1939-1945)은 할리우드에게 또다른 위기이자 기회가 됐다. 할리우드 영화계는 미국 정부와 손을 잡고 전쟁의 승리를 위한 홍보과 선전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20세기폭스'는 미 해군과 공동으로 <미드웨이 해전>(1942) 등 다수의 전쟁 다큐멘터리를 제작했다. 대중들은 신문이나 뉴스보다 더 생생한 전쟁 소식을 영화를 통하여 확인할 수 있었고, 할리우드 영화사들의 수입은 더 상승했다.
그런데 이처럼 철옹성같던 할리우드 영화산업의 위상을 위협한 것은, 정작 경제위기나 전쟁이 아니라 바로 'TV'의 등장이었다. 기술의 발전으로 TV라는 가전제품이 가정 곳곳에 배급되기 시작하면서 영화산업은 이전에 없던 새롭고 강력한 '경쟁자'를 맞이하게 됐다.
영화사들이 고심 끝에 찾아낸 TV와 영화의 결정적인 차별점은 '검열'이었다. 불특정 다수에게 노출되는 TV는 복잡한 규제가 많다는 게 가장 큰 단점이었다. 당대 최고의 스타인 엘비스 프레슬리의 다리 춤이 외실적이라는 이유로, TV에서는 상반신만 나오도록 규제할 정도였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규제에서 자유롭던 영화는 TV에서는 볼 수 없는 차별화될 볼거리를 제시한다는 인상을 관객들에게 각인시켰다.
또한 신세대 '무비스타'들의 연이은 등장은 관객들을 다시 극장으로 불러모으는 중요한 원동력이 됐다. 1950~1960년대 <에덴의 동쪽> <이유없는 반항> 등을 성공시킨 제임스 딘은 반항적인 청춘의 상징으로 불리우며 미국 젊은이들의 워너비 아이콘이 되었다. 그의 출연작들은 제작지 대비 수십배의 수익을 거두는 신드롬을 일으켰고, 'TV의 등장이 영화산업의 몰락을 불러올 것'이라는 설레발을 보기좋게 뒤집었다.
블록버스터의 등장
이어 할리우드는 1970년에 접어들며 TV에서는 할 수 없는 새로운 장르를 시도하게 된다. 바로 '블록버스터(Blockbuster)', 초대형 폭탄이라는 의미처럼 막대한 제작비를 들여 큰 수익을 노리는 대작 영화들의 등장이다. 마피아 패밀리의 일대기를 그린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의 <대부>(1972), 괴수재난영화의 시초로 불리우는 스티븐 스필버그의 <죠스>(1975) 등은 블록버스터 영화의 시초로 불린다.
미국이 달 착륙에 성공하면서 인류에게 한창 우주 진출의 꿈이 커져가던 1977년에는 조지 루카스의 <스타워즈>시리즈가 탄생한다. <스타워즈>는 단순한 상업 영화의 영역을 넘어 사회문화적 혁신을 일으킨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평가받으며, 전 세계적인 팬덤문화를 불러온 원조로도 꼽힌다. 이처럼 대자본과 기술력, 기획력이 집약된 블록버스터의 열풍은 전 세계에 할리우드의 영향력을 전파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 tvN <벌거벗은 세계사>의 한 장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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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러한 할리우드의 화려한 성공 뒤에는 급격한 성장 뒤에 가려진 여러 가지 추악한 이면들도 존재한다. 이른바 빅5로 불리우는 메이저 영화사들이 1940년대부터 관객들이 많이 몰리는 주요 극장들을 독점하면서 스튜디오 시스템을 등에 업고 배급과 상영에서 극장주들에 갑질을 부리는 횡포가 극심해졌다.
또한 초창기의 할리우드 영화들은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열악하고 위험한 환경에서 제작을 강행하곤 했다. 1920년대 전설적인 배우이자 감독인 버스터 키튼은 안전장치없이 온갖 위험한 스턴트 액션을 직접 소화하기로 유명했다. 그나마 유명한 배우들과 달리 대역을 소화하는 스턴트맨들은 위험한 장면에도 아무런 안전장치나 법적인 보호를 받지 못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1920~1930년 사이 촬영 중 안전사고로 사망한 스턴트맨은 공식집계된 것만 무려 약 55명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1925년작 <벤허>를 둘러싼 인명사고는 당시 할리우드의 열악한 인권과 안전불감증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건으로 회자된다. 전설적인 장면으로 회자되는 전차 경주 신에서 실제로 스턴트맨이 부러진 마차 바퀴에 깔려 사망하는 사고가 벌어졌다. 하지만 제작사는 세트장만 로마에서 LA를 옮겨 재촬영했고 스턴트맨의 사고에 대해서는 침묵했다. 이어 해상전투신에서도 화재사고가 발생하며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했다는 소문이 무성했지만, 영화사에서 이를 은폐하여 정확한 진실은 끝내 알려지지 않았다.
사람만이 아니라 동물학대 역시 만연했다. 1936년작 <경기병대의 돌격>, 1939년작 <무법자 제시 제임스>같은 서부극에서는 액션신에서 말을 강제로 넘어뜨리거나 절벽에서 추락시키는 위험한 방식의 촬영이 빈번했다. 많은 말들이 이 과정에서 즉사하거나 불구가 되어 안락사를 피하지 못했다. 출연진과 동물들을 그저 영화의 부속품 정도로 취급하던 메이저 영화사들의 인식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특히 1956년 <정복자>는 할리우드 영화사상 최악의 흑역사로 꼽힌다. 몽골 칭기즈칸의 일대기를 다룬 이 작품은 유타주에서 촬영되었는데, 문제는 당시 불과 1년 전 핵실험이 진행된 네바다주와 인접하여 방사능으로 오염된 지역이었다는 것이다. 이미 당시에도 문제가 제기되었으나 영화사는 알고서도 이를 무시했다.
촬영 이후 영화에 참여했던 배우와 제작진 220여 명 중 무려 91명이 암에 걸린 것으로 드러났고, 주연배우 존 웨인과 수잔 헤이워드, 감독 딕 파월 등이 사망했다. 하지만 영화사는 방사능 피폭과 발병의 인과관계에 불확실하다는 이유로 끝내 어떤 책임도 지지 않았다.
1982년 스티븐 스필버그가 제작을 맡은 <트와일라잇존, 더 무비>에서는 영화 촬영중 헬기 추락사고로 성인과 아역 배우 총 세 사람이 즉사하는 충격적인 사건이 벌어졌다. 이어 1993년에는 이소룡의 아들로 유명한 브랜든 리가 영화 촬영 중 총기사고로 사망하는 사건도 있었다. 이러한 연이은 비극들은 할리우드에 만연한 고질적인 안전불감증에 경종을 울리는 계기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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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동 착취' 역시 할리우드에 오랜 세월 만연한 고질적인 문제 중 하나다. 1939년 <오즈의 마법사>의 주인공 도로시 역으로 유명한 아역스타 주디 갈란드는, 배우 활동을 하면서 제작사에 의하여 어린 나이부터 다이어트 약과 각성제, 수면제 등 약물 남용을 강요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MGM의 경영진은 당시 17세에 불과한 성장기 소녀였던 갈란드에게 "넌 너무 뚱뚱해서 괴물같다"는 폭언까지 일삼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스트레스에 시달리던 갈란드는 한때 체중이 36kg까지 떨어지기도 했다.
갈란드는 훗날 성인이 되어 "13살 때부터 먹을지 말지, 얼마나 무엇을 먹을지 MGM과 끊임없는 투쟁이 있었다. 어린 시절 다른 어떤 것보다도 이 기억이 생생하다"고 회상하기도 했다. 회고록에 따르면 제작사의 이런 횡포는 어머니의 묵인하에 이루어졌으며, 심지어 영화 관계자에게 성접대를 한 사실도 폭로했다. 갈란드는 어린 나이에 스타덤에 올랐지만 18살에 약물중독으로 정신과 치료를 받고 28살에는 극단적 선택을 시도하는 등, 오랫동안 불행한 삶을 보내다가 1969년, 불과 4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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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중에서도 할리우드에서 가장 역사가 깊고 악명 높은 비리는, '캐스팅 카우치(캐스팅 관리자가 배우에게 일자리나 기회를 대가로 성적 요구를 하는 권력형 성범죄)'를 빼놓을 수 없다. 1940년대 대표적인 아역스타였던 셜리 템플은 당시 10대 초중반의 나이에도 영화 관계자들에게 몇 번이나 성범죄를 당할 뻔하다가 간신히 도망쳐나왔다. 현재 할리우드의 대표적인 중견 여배우인 샤를리즈 테론도 데뷔 초기 오디션을 위하여 만난 프로듀서에게 성추행을 당한 일화를 고백한 바 있다.
1950~1960년대 섹스심벌의 대명사였던 배우 마릴린 먼로는 회고록에서 "일부 제작자나 감독의 눈에 할리우드는 북적이는 매춘굴이었다. 그들은 할리우드를 침대 달린 회전목마로 여겼다"며 캐스팅 카우치가 만연한 할리우드의 현실을 폭로하기도 했다. 이러한 관행은 2010년대 중반까지도 계속되었지만 그동안은 크게 드러나지 않았던 게 사실이다.
2017년, 할리우드의 유명 제작자 하비 와인스틴이 무려 30여 년간 수많은 여성들에게 성범죄를 저질렀다는 충격적인 사실이 폭로되며 미국 연예계를 발칵 뒤집어놨다. 와인스틴은 사업상 미팅이라며 신인 여배우나 젊은 여성들을 불러들여 성상납을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많은 피해자들은 업계에서 엄청난 권력을 지닌 와인스틴과의 갑을관계에서 저항하기 힘들었기에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와인스틴의 만행이 수면으로 드러나면서 안젤리나 졸리, 기네스 펠트로, 레아 세이두 등 수많은 현역 유명 여배우들이 동참하여 피해 사실을 알렸고, 사회 각계의 뜨거운 지지와 격려가 이어졌다. 또한 배우 알리사 밀라노의 첫 제안으로 시작되어 SNS를 통하여 번지기 시직한 '미투(ME TOO)' 운동은, 비슷한 성폭행이나 성범죄를 당하고 침묵해야 했던 수많은 피해자들이 이제 용기를 내어 세상에 목소리를 내도록 이끄는 전세계적인 사회 현상으로 이어졌다. 미투는 영화계에서 최초로 권력형 성범죄와 낡은 관행에 맞서 자발적인 '연대의 물결'을 이루어냈다는 점에서, 단순히 일시적인 유행이 넘어선 '진실과 결과의 혁명'으로까지 평가받고 있다.
현재까지 밝혀진 피해자의 숫자는 100명이 넘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와인스틴은 유죄로 39년형을 선고받아 죄의 댓가를 치르게 됐다. 현재 할리우드 거리에는 잠옷만 입은 와인스틴의 동상이 세워졌고 그 밑에 바로 '캐스팅 카우치'라는 문구를 새기며 후세의 경계로 삼았다. 현재 전미제작자 조합은 와인스틴 영구퇴출, 성범죄 처벌기준과 대처방안 마련 등 자체 가이드라인을 수립했고 배우-방송인 노동조합 역시 사적인 공간에서 오디션 금지 조항을 권고하며 제작 환경 개선에 나서고 있다.
"우리는 모두 스타이고 빛날 가치가 있다." 1950~1960년대 최고의 섹시스타였던 마릴린 먼로의 어록이다. 할리우드 영화산업은 '아메리칸 드림'으로 불리우는 미국의 성장 과정과 일치한다. 거대한 자본과 인력으로 엄청난 흥행성과 대중성을 지니며, 영화라는 산업이 탄생된 이래 지금까지 막강한 영향력을 누리고 있다. 하지만 오늘날 세계가 동경하는 '꿈의 공장'이 이루어지기까지는 한편에서는 오히려 꿈을 짓밟히고 잊혀져야 했던 누군가의 눈물과 희생이 있었다는 사실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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