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에 뺏긴 바둑 패권 탈환…'응씨배 완승' 신진서 시대 열렸다
신진서 9단이 ‘바둑 올림픽’ 응씨배 제9대 챔피언에 등극했다. 신진서 9단은 23일 중국 상하이에서 열린 제9회 응씨배 결승 3번기 2국에서 중국 셰커 9단에 백 226수만에 불계승하고 결승 종합성적 2대 0으로 우승컵을 차지했다.
신진서에게 응씨배를 안겨준 결승 2국은 차라리 심심한 바둑이었다. 결승 1국에서 무기력하게 물러났던 셰커가 초반부터 실리를 챙기며 신진서에 맞섰지만, 신진서는 한 번도 우세를 내주지 않았다. 상대가 하자는 대로 다 받아주는 것 같았는데, 신진서는 늘 앞서 나갔다. 두텁게 판을 짠 뒤 상대가 무리하면 적절히 응징해 국면을 유리하게 이끌어가는 모습이 전성기의 이창호 9단을 보는 것 같았다.
우상 흑 대마를 잡을 기회가 여러 번 있었는데도 신진서는 굳이 적 대마를 탐하지 않았다. 공격하다가 물러났고, 급소를 찔렀다가 바로 큰 곳을 차지했다. 아주 크게 앞선 것도 아니었다. 시작부터 끝까지 적게는 한두 집, 많게는 일고여덟 집만 앞섰다. 불리해진 형세를 느낀 셰커가 막판에 총공세에 나섰지만, 격차만 벌어졌을 뿐 무의미한 발버둥이었다.
돌아보면, 신진서는 후퇴만 거듭한 것 같았다. 셰커는 대마를 다 살렸고, 네 귀를 다 차지했다. 그런데도 힘 한번 못 쓰고 무너졌다. 이런 희한한 바둑이, 아니 일방적인 결승전이 또 있었을까. 바둑TV에서 해설을 맡은 박정상 9단은 “실력 차가 드러나는 결승전이었다”며 “결승 2국은 신진서의 완승이었다”고 말했다.
우승 직후 신진서는 “응씨배를 위해 특별한 준비를 많이 했는데 우승하게 돼 기쁘다”며 “이전 세계 대회에서 많이 패하기도 해서 이번 우승이 특히 값지다”고 말했다. 최근 신진서는 국제 대회에서 잇달아 패배해 우려를 샀었다. 6월 란커배 결승에서 구쯔하오 9단에 역전패했고, 7월에는 국수산맥 결승과 몽백합배 16강전에서도 잇달아 패했다. 이어 신진서는 “긴장을 안 할 줄 알았는데 부담을 느껴서였는지 대국 전 잠을 잘 못 잤었다”며 그동안의 마음고생을 드러냈다.
응씨배 우승으로 신진서는 명실상부 2020년대 세계 바둑 최강자로 등극했다. 신진서는 응씨배를 포함해 모두 8개 국제 대회에서 우승했다. 이 중에서 메이저 대회는 5개다. 응씨배, 삼성화재배, 춘란배, LG배 2번. 중국 1위 커제 9단이 세계 대회에서 모두 10차례 우승(메이저 대회 8회 우승)했지만, 커제는 2020년 이후 우승 기록이 없다. 반면에 신진서의 메이저 대회 우승 기록은 모두 2020년 이후 작성됐다. 그리고 2023년 8월 23일 신진서는 마침내 세계 최고 권위의 응씨배마저 들어 올렸다. 신진서 시대 개막을 선언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다.
응씨배는 대만 재벌 잉창치(1914~1997) 선생이 1988년 창설한 바둑 대회다. 4년마다 열리는 유일한 국제 기전이어서 흔히 ‘바둑 올림픽’이라 불린다. 우승 상금 40만 달러(약 5억4000만원)도 단일 바둑 대회 상금 중 최고 액수다.
제9회 응씨배는 코로나 사태로 파행을 거듭했다. 원래는 2020년 4월 개막할 예정이었으나 5개월 뒤에 온라인 대국으로 본선 1회전을 치렀고, 4강전은 2021년 1월 마무리됐다. 주최 측이 결승전만큼은 대면 대국으로 치르겠다고 밝혀 애초 계획보다 약 3년 뒤인 2023년 8월에야 결승전이 성사됐다. 신진서는 결승전에 진출하고 2년 7개월을 기다린 뒤에야 우승컵을 거머쥐었다.
응씨배는 특히 한국과 인연이 깊은 대회다. ‘한국 바둑 사천왕’이라 불렸던 조훈현·서봉수·유창혁·이창호가 1회 대회부터 4회 대회까지 차례로 응씨배를 차지했다. 신진서의 우승으로 한국은 2009년 6회 대회에서 최철한 9단이 우승한 뒤 14년간 중국에 내줬던 우승컵을 되찾아오게 됐다. 신진서 시대의 개막은, 중국에 빼앗겼던 세계 바둑 패권을 한국이 탈환했다는 의미도 동시에 지닌다.
신진서의 응씨배 우승으로 또 하나의 대기록 달성이 눈앞에 다가왔다. 신진서는 응씨배 이전에 올해 상금 7억2614만5514원을 확보한 상태였다. 여기에 응씨배 우승 상금 약 5억4000만원을 더하면, 올해 벌어들인 상금만 12억원이 넘어선다. 올 11월 예정된 삼성화재배(우승 상금 3억원)마저 신진서가 가져간다면, 한국 기사 최초로 연간 상금 총액 15억원을 넘긴 주인공이 된다. 응씨배 우승으로 신진서는 이미 4년 연속 연간 상금 10억원 돌파 기록을 세웠다.
손민호 기자 ploves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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