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이 여자처럼 나오는 할아버지 이야기
[이진순 기자]
1년에 한두 번 건강상담을 받으러 병원에 오시는 할아버지가 계셨다. 어느 날 오셔서 지나가는 말로 "가슴이 여자처럼 나와 대학병원에 가서 처방을 받았다"고 말씀하셨다. 이런 증상의 가장 흔한 원인 중 하나는 약물이다. 의사는 복용약 모두를 가져오시라고 해서 확인하고, 원인이 될 만한 약들을 빼고 대체약을 처방해드렸다. 대학병원에서 처방받았던 여성형 유방 치료제도 드시지 않도록 했다. 할아버지는 석 달 후 오셔서 "다 좋아졌다"고 하셨다.
이렇게 드시는 약을 확인하고 대체약을 처방하는 데는 20분 넘는 시간이 걸렸다. 구조적으로 한 사람에게 20분의 진료시간을 내어줄 수 없는 대학병원에서는 약 부작용을 약으로 치료하려 했던 것 같다. 실력 없는 의사보다 시간 없는 의사가 더 많은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다.
책 <아픔이 마중하는 세계에서>에 나오는 저자 양창모씨의 경험담이다. 아래의 이야기들이나 정보들은 주로 이 책에 나오는 것들이다.
▲ 왕진의사의 기록 책 <아픔이 마중하는 세계에서>(한겨레출판)는 왕진의사 양창모씨가 발로 걸어 환자들을 만나며 기록한 진료 기록이다. 세상의 중심은 '중요한 사람'이 아니라 '고통받는 사람'이라는 생각으로 환자들과 마주했던 순간들을 그려냈다. |
ⓒ 한겨레출판 |
시골 어르신들의 경우 과잉, 중복 약 복용이 아주 일상화돼 있다고 한다. 왕진의사인 양창모씨는 어르신들의 집을 방문하면 가장 먼저 복용 중인 약들을 확인한다. 겹치는 약들이 있다고 판단되면, 처방해준 담당의에게 빼달라고 하시라고 말씀드린다. 그 말을 들은 할아버지가 담당의에게 말을 하자 담당의는 그럼 그 말 한 의사한테 가서 처방 받으라며 화를 냈다.
할아버지는 일주일 후 그 교수에게 다시 처방을 받았고, 중복된 약은 그대로 처방됐다. 앞으로 병이 악화되면 그 병원을 갈 수밖에 없는데 그때 그 교수 얼굴 어떻게 보느냐며, 의사가 화낼 것 같은 이야기는 더 이상 꺼내지 않고 고분고분 처방을 받는다. 어두컴컴한 방에 불도 안 키고 전기세를 아끼면서 약값을 마련하는 할아버지의 삶이 가슴 아프다.
한국은 의료 접근성이 좋고, 진료비와 약값이 비교적 싼 나라이다, 그래서 과잉진료와 처방이 큰 사회적 문제 중 하나이기도 하다. 65세 이상 노인 중 86%가 하루 6개 이상의 약을 복용하고 있고, 11개 이상 복용하는 경우는 45%이다. 위장장애, 골다공증 등 다양한 약 부작용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것이 약 부작용인지 자연스런 노화과정인지 알기도 힘들고, 약의 개수는 늘어만 간다.
한국에 비해 약을 훨씬 덜 쓰는 미국도 입원 환자의 3.4%가 약 부작용으로 입원한다. 가장 큰 문제는 약물의 효과가 서로 엉키는 것이다. 한국 노인 중 열에 아홉은 절대 함께 복용해서는 안 되는 약을 복용하고 있다는 보고도 있다.
그런데, 또 한편에서는 고혈압 진단 환자 중 38%가 치료를 받지 않는다고 한다. 일반적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상황이지만, 병원에 가서 약을 받아오는 것조차 버겁거나 불가능한 사람들 또한 많은 사회이다. 이들은 주로 우리 눈에 잘 띄지 않기 때문에 그들의 존재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생각하기가 쉬운 것 같다.
가난이 이런 방치로 이어지지 않기 위해서도, 약의 오남용으로 고통스러운 상황을 맞는 것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도 왕진의사의 존재가 절실한 것 같다. 마을 왕진의사가 있다면, 불필요한 진료, 처방, 검사로 낭비되는 개인과 건강보험의 재정 역시 줄일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은 약 뿐만 아니라 CT 검사 등 여러 의료 검사도 많이 하는 나라이다. 인구 백만 명당 CT 장비 보유 수가 OECD 평균보다 10배 가까이 많다. 유독 한국이 CT를 찍어야 할 환자가 많아서 장비가 많아졌다기보다는 유독 병원들이 이 고가의 장비를 많이 들여놓아서 검사 환자가 늘어났을 가능성이 높다. 고가의 장비를 들인 이상 손해 볼 수는 없기 때문이다.
복부 CT 1회 촬영을 하면 방사선 노출 때문에 암으로 사망할 확률이 만 명당 다섯 명이고, 연령이 낮을수록 그 위험성은 커진다고 한다. CT 촬영의 방사선 피폭량을 자연 상태에서 노출되는 피폭량으로 환산하면 짧게는 3년, 조영제를 쓰는 경우에는 7년 동안 맞을 양을 한 번에 맞는 것과 같다. 암 환자가 흔히 찍는 양전자방출 컴퓨터 단층촬영(PET-CT)은 8년 치를 한 번에 맞는 수준이다.
그럼에도 필요하다면 그 위험을 감수하는 것일 텐데, 환자들은 꼭 필요하지도 않은 검사를 위해 위험을 감수하며 돈을 쓰고, 건강보험 재정 역시 낭비하며, 병원의 이익을 보장해주고 있는 경우가 늘어나는 것이다.
불행하게도 또 어쩌면 당연하게도 병원이 우리의 건강을 알아서 챙겨주진 않는다. 우리가 진료받을 때, 그리고 부모님의 약을 처방받을 때 기존에 먹고 있는 약의 처방전을 의사에게 보여주는 것은 병원을 슬기롭게 이용하는 첫걸음이다. 지금까지 그렇지 못했다면, 부모님이 지금 드시는 약을 다 챙겨서 의사에게 보여주고 상담을 받는 것이 늦더라도 필요한 일일 수 있다.
그리고, 병원 갈 때는 질문 목록을 써서 의사에게 질문하는 정도의 적극성이 필요하다고 한다. 아무리 시간에 쫓기는 의사더라도 이 정도의 성의를 보이는 환자에게 한 마디라도 더 도움 되는 이야기를 해줄 가능성이 높다.
병원은 환자 때문에 생겨난 곳이지만, 지금으로선 환자가 의료의 주체가 되기는 여러 모로 힘들다. 의료 소비자의 위치에 있을 수밖에 없더라도 '슬기로운' 의료 소비자가 되어 피해와 부작용을 최소화하려는 노력이 필요한 것 같다. 그 누구도 아닌 '내' 몸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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