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산물 가공에 눈 돌린 사람들, '삼천포 쥐포' 잉태

뉴스사천 하병주 2023. 8. 23. 1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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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천포의 성장 이야기 마을이 도시로] 다양한 영역으로 사업 확장하다

[뉴스사천 하병주]

 청널공원 쪽에서 삼천포수협 쪽으로 1921년에 촬영한 사진. 오늘날과 사뭇 다른 느낌이다. 어선 몇 척도 보인다. 출처: 삼천포지명지(사천문화원 발행)
ⓒ 뉴스사천
 
[뉴스사천=하병주 기자] 삼천포항이 열리고 일본 어민들이 집단으로 이주해 올 무렵, 삼천포는 반농반어의 마을이었다. 반농반어라 해도 바닷가 주민들에게만 해당할 뿐 바다에서 조금만 떨어져도 어업보다는 농사가 살림의 더 큰 축이었다. 그만큼 어업 인구가 적었고, 생산성이 낮았다.

이는 삼천포에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바닷가 마을이면 전국 어디나 그랬다. 고정식 그물에 낚싯대 정도가 고기잡이 도구의 전부였다. 돛이 달린 배는 드물었고, 사람의 힘으로 노를 저어야 움직이는 배가 대부분이었다. 그나마 삼천포와 그 가까이 있는 사천만에는 오래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어로 방식인 죽방렴(竹防簾)이 있어 비교적 손쉽게 물고기나 해산물을 잡을 수 있었다.

여기서 말하는 죽방렴은 우리나라 연안 중에서도 남해안에 나타나는 독특한 어로 방식이다. 선진 별신굿에서는 "갈치 멸치는 죽방(竹防)으로 잡고, 대구는 발섶에 걸렸네"라고 노래하고 있고, 이 가사의 출현 시기가 임진왜란(1592~1598년) 이후라는 점에서, 죽방렴이 최소한 조선 시대 중기 이후로 나타났을 거라는 연구(최정윤, 사천만 죽방렴 어업의 역사와 변천)가 있다. 같은 연구에서 삼천포지역 죽방렴은 사천만 내만에 비해 수심이 깊고 물살이 센 특징을 이용해 근대화 과정에서 개량한 것으로 봤다. 

전통 어로에 머물렀던 삼천포, 에히메촌에 충격받아
 
 삼천포 죽방렴 풍경. 100여 년 전에도 규모만 작았을 뿐 비슷한 모양의 죽방렴이 삼천포 바다를 수놓았다.
ⓒ 뉴스사천
 
어쨌거나 100여 년 전, 일본의 어업 기술에 비하면 우리의 어업 기술은 보잘것없었다. 따라서 1883년에 조일통상장정, 1889년에 조선일본양국통어규칙이 맺어지고, 1908년에 한국어업법이 만들어지면서 쏟아져 들어온 일본 어민들에게 한국 어민들은 일방적으로 밀렸다. 자본력까지 갖춘 일본 어민은 총독부의 식량공급정책에 따라 고등어, 정어리 등을 대량으로 잡아 일본으로 가져갔다. 이런 현상은 삼천포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난 듯하다.

일제강점기 경남도청의 인구 조사에 따르면 1910년 말 기준으로 수남면에는 2명, 문선면에는 16명의 일본인 어업인이 있었다. 수남면은 지금의 신수도, 늑도, 마도와 같은 섬과 동금동, 서금동, 선지동, 하향동을 포함한다. 문선면에는 동동과 서동, 삼천포가 든다. 여기서 말하는 삼천포는 포구에 제한된 개념이다.

같은 시기에 한국인 어업인은 각각 377명과 35명이었다. 따라서 이 무렵 한국인 어민은 섬을 끼고 있는 수남면에 월등히 더 많았던 반면에 일본인 어민은 삼천포 포구를 중심으로 일부 들어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때는 일본 에히메현과 오이타현 어민들이 팔포와 신수도로 집단으로 이주해 오기 전이다. 이로부터 3년 뒤인 1913년의 경상남도 문서에는 '팔장포(=팔포)에 24가구 67명, 신수도에 21가구 54명의 일본인 어업인이 거주한다'는 기록이 있다.
 
 1910년도 경상남도의 인구 조사 자료. 이때까지만 해도 삼천포에 거주하는 일본 어민의 수가 많지 않음을 알 수 있다.
ⓒ 뉴스사천
 
당시 언론 보도를 확인하면 팔포 에히메촌이 이후로도 꾸준히 성장했음을 알 수 있다. 1918년에 10호 등 새로운 가옥이 계속 공급된 것이다. 반면에 신수도 오이타촌은 성장에 어려움을 겪었다.

일본인 학자 요시다 게이치(吉田敬一)는 그가 1954년에 낸 책 <조선수산개발사>에서 "1921년 말에는 호수 37호, 건착망 3통, 어선 15척, 경영자 34인, 연간 생산이 50~60만 관이나 되어, 당시 조선 내의 이주어촌 중 1인당 최고의 이윤을 올렸다"라고 에히메촌에 관해 썼다. 에히메촌의 성공 비결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에히메촌은 삼천포읍에 인접해 있었으므로 교육·위생·교통·물자·어획물 처리 등이 매우 편리하였으며, 부근에는 조선인 마을이 있어 노동력을 공급하는 등 혜택 받은 입지 조건이 발전의 원인이었다."

승승장구하던 에히메촌이 1923년에 일어난 대형 재난 사고와 자본가들의 고등어 사업 진출로 큰 타격을 받았음은 앞선 보도(기사 제목: 고등어 떼가 소용돌이를? 삼천포에 빠진 에히메 사람들)에서 밝혔다. 그런 분위기가 반영된 탓인지 1930년 무렵에 사천과 삼천포에 살았던 일본인 수산업 종사자는 그리 많지 않았다.

1930년에 행정에서 작성한 <사천군 세일반(泗川郡 勢一班)>이라는 자료를 보면 일본인 수산업 종사자는 사천군을 통틀어 123명이다. 이 가운데 120명이 전업, 나머지 3명은 겸업이다. 같은 자료에서 한국인 수산업 전업자와 겸업자는 각각 2,162명에 727명이다. 지역 범위가 달라서 1910년과 1930년 수치를 직접 비교하기에 무리가 있지만, 수산업자 중 일본인 비율은 공교롭게도 4% 남짓으로 비슷하다.

일본 수산인의 비율이 낮았다지만 어획량이나 판매가에 있어선 엄청난 경쟁력을 자랑했다. 이 시기에 사천에서 한국인이 71만 4666관의 어획물로 37만 8581엔을 버는 동안 일본인은 42만 5400관의 어획물로 19만 3650엔을 벌었다.

매출 금액으로 전체의 33% 이상을 일본인이 차지한 셈이다. 이는 어업 기술과 자본력 면에서 일본인이 그만큼 앞서 있었음을 보여주는 동시에 식민지 지배 국가의 뒷받침 아래 우월적 지위를 누렸음을 보여준다.
 
 어릴 적 기억을 소환해 이야기를 들려주는 이한수(1933년생) 어른.
ⓒ 뉴스사천
수산물의 발전

1930년에 작성된 이 자료에서 한 가지 더 눈여겨볼 점은 수산 가공품의 생산량이다. 전체 생산량 143,800관 가운데 139,500관을 한국인이 차지했다. 이 가공품의 대부분이 식용품(135,100관)임을 고려할 때, 국내에서 직접 소비 가능한 수산 가공품 생산 쪽으로 삼천포 사람들은 일찌감치 눈길을 돌리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960~1980년대에 삼천포의 경제 호황기를 가져다준 '삼천포 쥐포'는 이때부터 잉태했을 가능성이 크다. 삼천포에서 어묵 사업이 발달한 것도 같은 이유로 짐작할 수 있다. 다양한 수산 가공 사업의 발달은 얼음 생산 필요성으로 이어져 훗날 냉동·냉장 업체의 성장을 이끌기도 했다.

어업에서 배를 빼고 이야기하긴 어렵다. 일본 어민이 바람을 이용한 동력선에서 증기선으로 갈아탈 즈음, 삼천포 어민 중에서도 이른바 '우다시'라 부르는 돛배를 모는 이가 더러 생겼다. 그중 한 사람이 남해호 이한수(1933년생) 선장의 부친(고 이정문 씨)이다. 그는 지금도 어릴 적 기억을 엊그제 일처럼 떠올리곤 한다. 

"일본에서 만든 배를 샀다고 들었어요. 우다시라고 불렀지. 아버지는 이 배로 통영에서 여수, 순천까지 다니며 계절에 따라 다양한 어종을 잡았어요. 돈도 아주 잘 번 것 같고. 그래서인지 일본인 아이들과 어울리면서도 별로 눈치 보는 일은 없었던 것 같아. 일본이 패망하고 해방이 되자, 아버지는 그 일본인들 부탁으로 일본까지 다녀오기도 했어요. 데려다준 거지." 
 
 수산업의 발달은 조선업의 성장도 이끌었다. ‘삼천포 1호 조선소’라 불리는 삼선조선소의 모습.
ⓒ 뉴스사천
삼천포의 수산업 발달은 조선 수리업의 발달로도 이어졌다. 처음엔 목선이 위주였지만, 시간이 갈수록 증기선의 간단한 정비 정도는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오롯이 삼천포 이름의 조선업이 언제 시작되었는지 정확히 알려져 있진 않지만, '삼천포 1호 조선소'라 불리는 삼선조선소(이기원 대표)는 해방 후인 1953년 즈음에 문을 열었다. 

수산업의 발달은 어업조합의 탄생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삼천포에선 1926년에 삼천포어업조합이 설립됐다. 이보다 앞선 1924년 12월에는 삼천포수산합자회사가 어시장을 설치해 운영했다는 기록도 있다.

이렇듯 삼천포는 개항 이래 수산업의 발달로 빠르게 성장했다. 이는 인구의 증가를 불렀고, 도시계획에 따른 제대로 된 도시 '삼천포'를 만드는 계기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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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뉴스사천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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