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행을 타는 순간부터 운명이 정해진 나무 [일본정원사 입문기]

유신준 2023. 8. 23. 1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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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은 정원주 마음, 작업은 사부 뜻이라네

일본 현지에서 75세 사부에게 정원사 일을 배우는 65세 한국 제자의 이야기. <기자말>

[유신준 기자]

이 집 정원은 정원주만큼이나 유별나다. 거실 앞 정원이 통로겸 마당으로 양분돼 있다. 양분돼 있는 건 토지 구획상 어쩔 수 없다 해도, 정원에 통로를 만들고 이쁜 대리석을 깔아 모양을 내는 게 당연한 포맷이다. 그게 마사토 마당이라는 게 일반적인 정원이 아니라는 힌트다. 구색을 맞춰 나무를 심었다면 일반적인 정원이 되고 길은 통로가 됐을 것이다. 아무것도 심지 않았으니 마당이 됐다. 

유별난 정원주의 정원
 
 하나밖에 없는 가리코미를 정원주가 심심해서 잘라놔 버렸다
ⓒ 유신준
 
오른쪽으로 오늘 작업한 키 큰 흑송이 맨 앞에 서 있다(모든 정원 설명은 응접실에서 봤을 때가 일반적 기준이다). 뒷쪽 아래로는 키 작은 철쭉 가리코미(두부깎기)가 길게 늘어서 있다. 일본정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네지메(뿌리마무리)라고 하는 기법이다. 네지메 가리코미는 흑송의 뿌리 쪽을 가려 주면서 정원을 분위기를 부드럽게 연출해주는 게 목적이다. 어느 정원이나 다 있다.

하나밖에 없는 가리코미를 정원주가 심심해서 잘라놔 버렸다. 초짜 티가 확 난다. 가리코미란 모름지기 상단 수평을 잘 맞춰야 하는 건데... 멀리서 보고 가까이서 보고 자르고 털고 나뭇잎 절반 마무리까지 순차적으로 해야 하는 건데... 나는 10미터를 3시간 걸려서 겨우 사부 오케이 사인이 났는데... 그녀가 그런 걸 알 턱이 있나.  

그녀가 내게 묻는다. 내가 잘랐는데 어때요? 이쁘다고 해야지 뭐라 하나. 모르는 게 약일 테니. 정원은 전체적으로 균일한 품질을 유지해야 한다. 전체적으로 구색을 맞춰 조화를 이루는 원 세트다. 그래야 한 폭의 그림이 된다. 뭔가 미진한 곳은 조화되지 못하고 따로 놀아 눈에 거슬린다. 대가 그림에 초짜 붓질이 신경 쓰이는 것처럼. 

바깥쪽으로는 시마 도네리코라는 나무가 한 그루 우뚝 서 있다. 연초록 이파리에 큼지막한 노랑색 꽃뭉치를 주렁주렁 달고서. 멀리서 봐도 한눈에 들어오는 이쁜 나무다. 아까 흑송 높은 곳을 전지할 때 바람에 실려 향기를 솔솔 풍겨주던 나무였다. 재미있는 흑송 작업에 꽃향기까지 더해지니 이건 금상첨화 분위기였다. 

인기 수종, 유행을 다하면 뭐가 남을까
 
 색상에서 생김새까지 누구라도 눈길을 사로잡을 만한 출중한 수종이다
ⓒ 유신준
 
도네리코는 물푸레나무다. 앞에 시마가 붙었으니 섬 물푸레나무가 된다. 물푸레나무는 활엽수인데 이건 상록수란다. 겨울에도 푸른잎을 볼 수 있다니 사람들이 좋아할 조건을 하나 더 갖췄다. 요즘 길 가다 보면 이 나무가 너무 많이 눈에 띈다. 유행이다 싶을 정도로 이곳 사람들이 선호하는 나무다. 초짜가 봐도 그럴 만하다.

색상에서 생김새까지 누구라도 눈길을 사로잡을 만한 출중한 수종이다. 어떤 유행이든 다 그만한 이유가 있는 거다. 유행을 다하면 뭐가 남을까? 너무 많이 눈에 띄게 되면 사람들이 급기야 싫증을 내게 되고 인기가 떨어질 게다.

화무십일홍. 열흘 붉은 꽃 없다. 올라가면 내려와야 한다. 유행을 타는 순간부터 이미 운명이 정해져 있다. 내리막은 정해진 운명이니 가장 좋을 때를 그냥 즐기면 되는 거다. 우리가 한번뿐인 삶을 누리고 즐겨야 하는 것처럼.
 
 가장 좋을 때를 그냥 즐기면 되는 거다
ⓒ 유신준
 
왼쪽으로 작은 작업장 건물이 있는데 비어있는 벽에 오엽송이 딱 한 그루 서 있다. 영낙없는 가부키 무대다. 하루미씨 전통무용공연 때 무대 장식을 그대로 옮겨놓은것 같다. 정원주 취향이 독특해서 일부러 그렇게 배치했단다. 벽까지 흰색이어서 더 무대처럼 느껴진다. 그녀에게 왜 저렇게 심었냐고 물으니 그게 좋아서란다. 이 집은 하나도 일반적인 설정이 없다. 하긴 정원은 주인 취향이니까. 

정원주가 유별난 건 또 있다. 점심 먹고 나서는 이런 일도 있었다. 사부에게 '젊은 정원사님 잠시 빌릴게요' 하더니 나에게 본인이 농사 짓는 밭을 보여줬다. 최소한 300평은 넘을 것 같다. 온갖 종류의 작물들을 심어놨고 풀 한 포기 없이 깔끔하다. 이건 취미 수준이 아니다. 천성적으로 굉장히 부지런하거나 타고난 농사꾼이다. 헛간에 관리기도 있다. 직접 운전해서 밭을 가꾸고 있단다. 

그녀는 사부와 친구처럼 허물없다. 쉴 참에 베란다에 걸터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폼새가 오누이처럼 다정해 보이기도 한다. 지난해 남편을 여의었다던가. 밝고 쾌활한 그녀도 뭔가 기댈 언덕이 필요했던 게다. 일부러라도 넓은 밭을 갈고 몸을 혹사시키며 슬픔을 이겨내야 했을 게다. 어떻게든 살아가는 이유를 마련해야 했을 테니까. 듣지 않아도 안다. 그녀의 짠한 사연이 가슴 속에 저며온다.

사부는 살아있는 역사
 @IMG@

차로 이동하는 시간이 길어지면 사부와 이야기가 많아진다. 내가 원하는 건 정원사의 기술에 관한 것이지만 사부 개인에 관한 관심 영역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사부는 일터 라디오 철학에서 보듯 가라앉은 분위기를 견디지 못한다. 내색 안 하지만 소통하고 싶어하는 성격이 드러난다. 사부가 이야기 하면 나는 듣는다. 

일제 때 만주에 살았다고 했다. 거기서 부모님이 형을 낳은 후 3개월 만에 패전이 왔고 다 함께 일본으로 돌아왔다. 형 위로 5살 많은 큰 형도 있었단다. 넘어올 때는 거기서 마련한 모든 것을 버렸다. 주머니에 넣어 가지고 올 수 있는 것만 가지고 돌아왔다. 그곳에 함께 살던 사람들이 대부분 그렇게 맨손으로 돌아왔다. 

일본에 돌아와서 처음 얻은 아들이 사부였다. 이름을 타로라 지었다. 쿠마우에 칸타로. 아들 이름은 타로, 지로, 사부로순이니 첫 아들이라는 뜻이다. 이름 때문에 가업을 잇게 됐는지도 모르겠다며 사부가 웃었다. 살아 있는 역사가 바로 옆에서 숨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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