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민식 국가보훈부 장관이 정율성을 공격한 이유 [김종성의 '히, 스토리']
[김종성 기자]
▲ 지난 7월 19일 박민식 국가보훈부 장관이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 현충관에서 열린 이승만 초대 대통령 서거 58주기 추모식에 참석하여 추모사하고 있다. |
ⓒ 연합뉴스 |
22일 박민식 장관은 페이스북 글에서 정율성 기념공원 건립은 "5·18 묘역에 잠들어 계신 민주주의 투사들을 욕보이는 일"이라는 엉뚱한 논리를 내세웠다. 5·18 정신은 자유를 위한 투쟁이었으므로 월북 독립투사와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국가보훈부장관 직책을 거론함으로써 자신의 발언이 윤석열 정부의 입장임을 표시했다. "국가보훈부장관으로서, 자유 대한민국을 무너뜨리기 위해 앞장섰던 사람을 우리 국민 세금으로 기념하려 하는 광주시의 계획에 강한 우려를 표합니다"라며 "전면 철회되어야 마땅합니다"라고 촉구했다.
이 같은 정면 공격은 월북 독립운동가 정율성에 대한 공격이기보다는 한국 사회를 1987년 이전으로 회귀시키려는 냉전적 시도라는 성격을 띤다. 윤 정권이 한국 사회를 어떻게 재편하려 하는지가 이런 데서도 나타난다.
정율성로라는 도로명, 정율성 생가, 정율성 국제음악제 등을 통해 광주시민들에게 익숙한 정율성은 국권 상실 4년 뒤인 1914년 이곳에서 출생했다. 본명이 정부은인 그가 '음율이 성취되다'는 의미의 이름을 갖게 된 것은 '외적을 물리칠 군가가 없다'는 아버지의 한탄에 기인한다.
1992년 3월호 <길을 찾는 사람들>에 수록된 역사학자 이이화의 '천재 음악가 정율성'은 "(그의 아버지는) 음악에 열중하는 어린 아들을 보고 예전에는 외적을 물리칠 적에 북과 나팔로 사기를 돋우었던 일을 상기하며 우리에게 군가가 없다는 한탄을 들려주었다"라고 서술한다.
아버지의 말씀은 그의 마음을 흔들었다. 윗글은 "그는 깊이 느낀 바가 있었고, 또 그런 음악을 작곡하는 작곡가가 되기로 결심했다"며 "이때 '음악을 이룬다'는 뜻을 지닌 율성으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설명한다.
▲ 정율성의 흉상이 그가 태어난 광주광역시 남구의 양림동 휴먼시아아파트 옆 도로변에 세워져 있다. |
ⓒ 이돈삼 |
그의 20대 시절은 일본의 중국 침략에 가속도가 붙던 때였다. 23세 때인 1937년에 일본이 도발한 중일전쟁은 그의 나이 31세가 돼서야 종결됐다. 일본제국주의가 중국으로 팽창하던 이 시기에 그는 중국에 있었고, 독립투사 겸 음악가로서 일제의 팽창에 맞섰다. 1941년부터는 화북조선청년연합회나 화북조선혁명청년학교 등에 소속돼 항일투쟁을 전개했다. 외적을 물리칠 군가를 짓고 그 군가를 흥얼거리며 투쟁했던 것이다.
그는 해방 이후 북한에 정착했다. 음악을 가르치며 인민군협주단을 만들었다. 한국전쟁 때는 중국 국적을 취득해 중국인민지원군에 들어갔다. 전쟁 중인 1951년 4월 중국으로 넘어가 작곡 활동에 전념하다가 1976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현대 중국의 3대 음악인으로 추앙됐다. 한국에서 이주해 간 청년 음악인이 중국인들에게 의탁하는 단계를 뛰어넘어 그들에게 음악적 영감을 불어넣는 존재가 됐던 것이다.
그는 동족상잔에 가담했다. 어떤 명분에 의한 것이었건, 이 부분에 대한 평가는 필요하다. 하지만 이를 근거로 그의 독립운동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다. 남과 북의 한민족이 서로 싸울 수밖에 없었던 것은 한반도가 미·소 냉전체제의 이용물이 됐기 때문이다. 한민족끼리 싸울 수밖에 없도록 만든 객관적 세계정세를 무시한 채 전쟁에 가담한 개인들을 원망할 수만은 없다.
냉전체제 가담으로 빛이 다소 바래지기는 했지만, 정율성의 독립운동에는 특기할 만한 대목이 있다. 일본제국주의에 맞선 한·중 두 민족의 연대에 크게 기여했다는 점이다. 그가 중국 항일투쟁의 군가인 '팔로군 대합창'을 짓고 그것이 훗날 중국 인민해방군 행진곡이 된 것은 그를 매개로 두 민족의 항일운동이 하나로 합쳐진 측면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군대나 무기를 사용하는 항일투쟁의 본거지가 주로 중국이었던 것은 한·중 두 민족의 마음이 하나로 연결됐기 때문이다. 이봉창과 윤봉길 같은 열혈 청년들뿐 아니라 정율성 같은 항일 음악인이 두 민족의 마음을 하나로 연결시키는 데 기여했다. 이들의 존재로 인해 중국을 무대로 하는 무장투쟁이 좀 더 수월해졌다.
일본이 패망했다고 해서 일제 식민지들이 무조건 독립한 것은 아니다. 한국보다 31년 먼저 일제 식민지가 된 유구(류큐·오키나와)는 1945년에 감격을 느끼지 못했다. 안타깝게도 이곳은 현재까지도 일본의 지배를 받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전승국인 미국과 영국이 한국을 외면할 수 없었던 것은 이봉창·윤봉길이나 의열단 김원봉 등의 무장투쟁이 강한 인상을 주었을 뿐 아니라 한국광복군 같은 군대급의 무장 조직이 중국에 웅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한국 독립운동가들이 중국 땅을 활용할 수 있었던 원동력 중 하나는 양국 대중의 영혼을 이어주는 정율성 같은 존재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국가보훈부 장관은 정율성 기념공원 건립을 비판하면서 "그가 대단한 업적을 세웠습니까", "정율성이 독립유공자인가요?", "그렇게도 기념할 인물이 없는가요?" 등등의 막말을 던졌다. 독립운동을 방해했다는 죄목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탄핵된 이승만을 위해 기념관 건립을 추진하는 윤석열 정권의 당국자가 할 말은 아니다.
▲ 1962년 2월 5일 자 <동아일보> 기사 "건국·혁명유공자 등 포상 정부서 계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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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정권 때는 이승만 대통령 및 이시영 부통령과 외국인 16명에 대해서만 독립유공자 서훈이 이뤄졌다. 독립유공자 대우를 받은 한국인이 단둘이었다는 사실은 이 시기의 대한민국 정부가 독립운동의 가치를 지극히 낮게 평가했음을 보여준다. 친일파들이 정권의 중추세력이 되어 독립운동가들을 빨갱이로 몰아가며 억압하던 시대 분위기를 반영하는 장면이다.
본격적인 독립유공자 서훈이 1962년부터 이뤄진 것은 1961년 5·16 쿠데타의 산물이 아니다. 이것은 1960년 4·19혁명의 산물이다. 4·19 때 시위 현장을 주도한 쪽은 학생들이지만, 이들의 운동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대중적 지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 시기의 대중은 십수 년 전에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이 한반도를 둘로 쪼개고 독립투사들을 탄압했던 일을 두 눈으로 목격했던 사람들이다.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의 기원>에도 언급됐듯이 해방 당시의 한국인 90%는 독립운동가들이 주축이 된 여운형의 건국준비위원회(건준)를 지지했다. 그런 건준이 미군정과 친일세력에 의해 와해되는 장면을 목격한 사람들이 1960년에 이승만 체제를 전복했다.
그랬기 때문에 이 시기 대중의 마음을 붙들어 두기 위해서라도 친일파 박정희는 독립운동가 서훈에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이때의 유공자 서훈이 민심 확보를 위한 일이었다는 점은 1962년 2월 5일 자 <동아일보> 톱기사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4·19혁명이 독립유공자 서훈의 물꼬를 트는 계기가 됐다면, 27년 뒤의 6월항쟁은 월북 독립운동가 서훈의 물꼬를 트는 계기가 됐다. 베를린장벽 붕괴(1989.11.9) 2년 전에 6월항쟁이 발생한 데서도 느낄 수 있듯이, 허구적 냉전체제에 대한 대중의 불신 역시 6월항쟁의 심리적 원동력이었다.
국가안보 등을 빌미로 대통령 간선제 및 구체제를 고수하려는 전두환 정권을 상대로 국민들이 일어선 것은 세상을 빨갱이냐 아니냐로 나누는 이분법이 더는 먹혀들지 않게 됐음을 의미한다. 6월항쟁 이듬해에 들어선 노태우 정권이 취임 첫해부터 납북 독립운동가 서훈을 추진한 것은 그런 배경에 기인했다.
이런 변화는 6월항쟁 이후의 한국 정부가 더 이상 이분법적 반공 이념을 고수하기 힘들게 됐음을 의미한다. 다양한 생각과 사상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게 됐음을 보여준다.
페이스북 글에서 박민식 장관은 "정율성이 독립유공자인가요?"라고 질문한 뒤 "그는 대한민국을 위해 일제와 싸운 것이 아닙니다"라는 말로 정율성의 독립운동을 부정했다. 독립운동을 했을지라도 머릿속에 공산주의나 사회주의가 들어 있었다면 독립운동으로 볼 수 없다는 윤 정권의 편협한 사고방식을 반영하는 것으로 전두환 시절의 장관에게나 어울리는 글이다.
국가보훈부 장관의 공격은 한국 사회를 편협한 방향으로 되돌리려는 윤 정권의 이념적 지향성을 반영한다. 그의 공격적인 글은 정율성이 아니라 한국 국민들을 겨냥한 것이다. 한국 국민들이 1987년 이전으로 되돌아가고, 이승만·박정희 시절의 반공 이념으로 재무장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그의 글에 녹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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