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김정은 인간답게 하라" 탈북청년, 유엔서 한국말 외친 이유

박현주 2023. 8. 23. 1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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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인간답게 살고 싶다는 북한 주민의 염원, 그걸 전 세계에 알리고 싶었습니다."

지난 17일(현지시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에서 북한의 인권 실상을 고발한 청년 탈북민 김일혁(28) 씨는 21일 중앙일보와 유선 인터뷰에서 "나 혼자가 아닌 북한 사람 모두가 겪고 있는 이야기를 공유하고 싶었다"며 이같이 말했다.

안보리에서 6년만에 열린 북한 인권 관련 공개 회의에서 김 씨는 유창한 영어 실력으로 북한 정권을 향해 "독재는 영원할 수 없다"며 "이제라도 인간다운 행동을 하라"고 쏘아붙였다. 당시 회의에서 이사국 대사들은 그의 용기에 감탄하며 존경을 표하기도 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지난 17일(현지시간) 미국 뉴욕 유엔 본부에서 6년만에 열린 안보리의 북한 인권 관련 공개 회의에서 김일혁 씨가 연설하는 모습. AP. 연합뉴스.

Q : 유엔 무대에 서기로 결심한 계기는 무엇인가.
A : 북한에서 겪었던 일을 국제사회에 확실히 알리고 싶었다. 내가 북한을 떠날 때 "잘 가라"고 인사했던 고모는 나와 내 가족의 탈북 사실을 당국에 고발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몇 개월간 구타를 당하다 끝내 정치범 수용소로 끌려갔다. 지금도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른다. 당시 고모에겐 세 살 딸과 다섯 살 아들이 있었다. 연설에서 나는 고모의 이야기뿐 아니라 직접 겪은 강제 노동의 경험 등을 이야기했는데, 이는 북한 사람 모두가 겪고 있는 비극이다.
김 씨는 "고모의 행방을 알고 싶은데 헤어진지 10년이 지나 방법이 없다"며 한숨을 쉬었다. 최근에야 조명받는 납북자와 억류자 가족을 언급하며 "그들의 마음도 이와 같을 것"이라면서다.

Q : 북한 인권 관련 안보리 공개회의가 열릴 수 있을지도 미지수였다.
A : 그렇다. 안보리 상임이사국인 중국과 러시아가 끝내 반대해서 표결에 부쳐질 경우 9개 이상 이사국의 찬성표를 못 얻으면 나는 아무 말도 못 하고 회의장을 나와야 하는 상황이었다. 다행히도 중ㆍ러가 반대하지 않았고 회의가 열렸다. 반대해봤자 자국 이미지만 나빠질 게 뻔하다는 걸 알았던 듯하다.

지난 17일(현지시간) 미국 뉴욕 유엔 본부에서 6년만에 열린 안보리의 북한 인권 관련 공개 회의에서 각국 대표들이 김일혁 씨의 연설을 듣는 모습. AP. 연합뉴스.

Q : 연설할 때 심경은 어땠나.
A : 미국으로 가는 비행기에서 잠도 못 자고 연설을 연습했는데도 굉장히 떨렸다. 연설이 끝나고 미국 등 여러 국가 대표가 "정말 용감한 청년이다", "북한의 실상을 확실히 알게 됐다"고 응원과 격려를 해줘서 감사하고 뿌듯했다. 반면 중국, 러시아와는 '말이 안 통한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회의장에서 당장에라도 중ㆍ러 대표를 향해 "인권과 자유가 없는 안보는 없다"고 반박하고 싶었다.
당시 회의에서 중ㆍ러 대표는 "북한 인권 관련 논의는 긴장을 고조시키는 위선적 행동"이라고 주장했다.

Q : 말미에 영어 대신 한국어로 "북한은 이제라도 인간다운 행동을 하라. 북한 사람들도 인간다운 삶을 스스로 선택할 권리가 있다"며 일침을 가했는데.
A : 그 말은 모든 북한 사람의 염원이다. 따라서 북한에서도 바로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하고 싶었다. 또 그 자리에 모인 각국 대표에게 한국어로 보다 강한 인상을 남기고 싶었다.

지난 17일(현지시간) 유엔 안보리에서 북한 인권 실상을 증언한 탈북민 김일혁(28) 씨가 대학 시절 대외 활동을 하는 모습. 김 씨는 한국외국어대 15학번으로 지난해 8월 졸업했다. 본인 제공.

Q : 2011년 탈북을 결심한 이유는 뭔가.
A : 2007년에 아버지가 중국산 핸드폰으로 한국으로 먼저 넘어간 친구와 연락을 하다가 당국에 들켰다. 이후 아버지는 교화소와 단련대(북한의 구금시설)에 끌려가 혹독한 생활을 했다. 굶어 죽는 사람도 있었고 배가 너무 고파 마른 미역을 먹다 배가 터진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그런 고초를 겪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이후에도 당국의 감시는 계속됐다. 부모님은 우리 형제가 감시와 강제 노동에서 벗어나 꿈을 이룰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탈북을 결심했다.
김 씨는 안보리 연설에서 "나는 작은 시골 마을에서 자랐는데 어렸을 때부터 농사에 동원됐고, 기른 작물은 모두 군대에서 가져갔다"고 털어놓았다. "북한 주민에겐 인권도, 표현의 자유도, 법치주의도 없다"면서다.

지난 17일(현지시간) 유엔 안보리에서 북한 인권 실상을 증언한 탈북민 김일혁(28) 씨가 대학 시절 대외 활동을 하는 모습. 본인 제공

Q : 당시 북한의 실상을 어떻게 기억하나.
A : 사는 게 굉장히 힘들었다. 배급도 제대로 안 나오고, 농사를 지으면 다 군량미가 됐고, 남은 건 중간에 윗선에서 가져갔다. 잘 사는 사람들은 잘사는데, 못사는 사람들은 옥수수 가루를 내서 죽을 끓여 먹고, 한겨울에 불도 못 때고, 얼음 바닥 위에 이불을 깔고 잤다. 지금도 바뀐 건 없는 듯하다.

Q : 해결책이 있을까.
A : 북한 권력층과 대화를 할 게 아니라 북한 주민을 대상으로 외부 정보를 유입하고 그들이 스스로 깨우쳐서 정권에 반감을 갖도록 해야 한다. 탈북민 중에는 한국 드라마 등 한류 콘텐트를 보고 나온 사람들이 꽤 된다. 북한 정권이 최근 "자기야" 등 한국식 말투를 썼다는 이유로 강력한 처벌에 나서는 것만 봐도 얼마나 외부 정보를 두려워하는지 알 수 있다. 이런 측면에서 나는 (2020년) 대북전단금지법이 만들어졌을 때 "그게 법인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이해할 수 없었다.

지난 17일(현지시간) 유엔 안보리에서 북한 인권 실상을 증언한 탈북민 김일혁(28) 씨가 대학 시절인 2018년 회장을 맡았던 한국외대 통일리더십 동아리에서 활동하는 모습. 본인 제공.


한편 한국외국어대학교 15학번이었던 김 씨는 재학 시절 '통일리더십' 동아리 회장을 맡으며 봉사와 탈북민 교류 활동, 북한 문화 관련 이벤트 등을 이끌었다. 미국 내 탈북민 지원 단체 링크(LiNK)를 통해 줄리 터너 신임 미 국무부 북한인권특사와 인연이 닿은 적도 있다고 한다.

Q : 앞으로 어떤 삶을 살고 싶나.
A : 고등학교 1학년 때 한국에 왔는데 당시엔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사람을 위해 일하는 인권 변호사가 목표였다. 그 후 대학 생활을 하면서는 꿈이 바뀌었다. 한국외국어대에서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했고 지금은 미국 대학원 진학 준비를 하고 있다. 국제관계학 중에서도 개발 협력 분야를 공부하고자 한다. 전 세계에 있는 미개발 국가를 돕고 싶고 나중에 통일이 되면 내가 태어난 고향을 비롯해 북한의 개발에 도움이 되고 싶다.

유엔 안보리에서 북한 인권 실상을 증언한 탈북민 김일혁(28) 씨

박현주 기자 park.hyunj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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