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크리트 유토피아' 이 부부가 던지는 질문
[김성호 기자]
▲ 콘크리트 유토피아 포스터 |
ⓒ 롯데엔터테인먼트 |
2023년 한국 텐트폴 영화의 몇 안 되는 생존자 중 하나로 <콘크리트 유토피아>가 손꼽힐 가능성이 커졌다. 이 영화는 원자폭탄급 파괴력을 보이는 크리스토퍼 놀란의 <오펜하이머> 곁에서 꾸준히 관객을 빨아들이고 있다.
OTT 서비스로 대표되는 콘텐츠 수용방식의 변화와 체감물가보다도 가파르게 치솟는 영화티켓값의 압박 속에서도 <콘크리트 유토피아>를 보겠다고 극장을 찾는 이들이 그치지 않는다. 가만히 지켜보자면 초토화된 서울의 폐허 가운데 홀로 우뚝 솟아있는 아파트 한 동의 모습이 이와 겹쳐지는 듯도 하다.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크게 두 갈래 길을 걷는 재난영화다. 하나는 '아파트'로 대변되는 한국의 물질만능과 각자도생의 이기주의를 비추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말 그대로 재난상황 속에서 드러나는 인간군상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말하자면 한국적인 재난영화란 뜻이겠는데, 입소문을 타고 많은 관객이 이어지는 광경을 보고 있자면 오늘날 한국 관객들의 입맛에 딱 맞는 영화가 바로 이쯤인 듯도 싶다.
▲ 콘크리트 유토피아 스틸컷 |
ⓒ 롯데엔터테인먼트 |
영화는 서울 복판을 덮친 지진과 그 속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의 이야기다. 냉혹한 추위가 덮친 어느 겨울, 이유를 알 수 없는 대지진이 이 나라 수도 서울을 말 그대로 초토화시킨다. 그 속에서 버틴 건물이 딱 하나 있으니, 황궁아파트 103동이다. 추위와 배고픔을 피해 생존자들이 건물로 몰려들고 주민들은 모여 특단의 대책을 내놓기에 이른다.
이야기는 흔히 생각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묵묵히 전진한다.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고 어떠한 도움도 바랄 수 없는 세상이 하루아침에 도래했다. 심각한 추위 속 수도며 전기조차 끊긴 상황에서 당장 먹고 마실 것이 없는 이들은 결단을 내려야만 한다. 남은 것은 오로지 아파트 한 동 뿐이다. 당장 살기 위하여 은신처를 바라는 이들과, 역시 당장 살기 위해 이들을 내쫓고자 하는 이들이 한 공간에 들었다.
영화는 주민들이 외부인들을 몰아내고 그들의 유일한 자산을 굳건히 지켜내는 과정을 흥미롭게 다룬다. 입주민 대표로 영탁(이병헌 분)이 발탁되고, 일을 할 조직을 갖춰나가는 게 그 시작이다. 일제가 조선군을 무장해제 시켰듯이 술수로써 단박에 상대를 무력화하는 계략은 저열한 만큼이나 큰 효과를 발휘한다.
▲ 콘크리트 유토피아 스틸컷 |
ⓒ 롯데엔터테인먼트 |
다음 단계 또한 생존이다. 젊은이들은 무기라 할 것을 챙겨들고는 단지 바깥으로 나아가서 쓸 만한 물건을 구해온다. 그 과정에서 단지 바깥사람들과의 갈등이 생겨나니, 무리와 무리 사이에 저기 씨족사회일 적에나 있었을 아수라장이 펼쳐지는 건 자연스런 귀결이다. 흥미로운 건 집단을 묶는 것이 아파트라는 점이다. 아파트를 소유한 자는 소유한 자들끼리, 갖지 못한 자들은 또 나름의 가치로 집단을 이루는 것인데, 영화는 아파트 입주민들이 리더십을 세우고 조직을 갖춰나가는 과정을 그럴 듯하게 그려낸다.
영화는 수많은 재난영화가 밟은 길을 그대로 따른다. 우리와 저들을 가르는 경계 안에서 조직이 생겨나고 권력이 탄생한다. 그로부터 나름의 질서가 세워지고 그 질서가 돌보는 것과 돌보지 못하는 것들이 하나씩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자연히 질서를 따르는 이들과 저항하는 이들이 구분되며, 애쓰는 이와 외면하는 이가 갈라선다. 그저 옳은 선택이 이로운 상황을 담보하지 못하는 가운데 누군가는 악을 행하고 다른 누구는 그에 저항한다. 그 난국 가운데서 무엇이 더 현명하고 마땅한 선택인지를 영화는 관객에게 묻는다.
영탁은 추대된 대표다. 그는 황궁아파트 입주민을 위해 최선의 선택을 하려 든다. 부족한 자산에도 어떻게든 질서를 세우고 희망을 보이려는 그의 분투가 대단하게 느껴질 때도 있다. 그러나 가끔은 실망하게 되는 순간도 있는 것이다. 영탁은 모든 순간에 현명할 수 없다. 제한된 환경에서 매순간 최선의 선택을 요구받는 지도자의 상황이 조금씩 그를 전과 다른 모습으로 이끈다.
▲ 콘크리트 유토피아 스틸컷 |
ⓒ 롯데엔터테인먼트 |
민성(박서준 분)과 명화(박보영 분) 부부는 영화에서 가장 관객과 가까운 인물일 것이다. 이들이 영화의 시작과 끝을 장식하는 것도, 또 조금은 떨어진 자리에서 영탁과 아파트 사람들의 운명을 지켜보게 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민성은 명화를 지키기 위해, 명화는 제가 믿는 가치를 위하여 거듭 선택을 내린다. 그 과정에서 관객은 이들의 선택에 공감하기도 안타까워하기도 한다. 물론 때로는 답답해하기도 할 것이다.
또 다른 인물도 있다. 외부인을 몰아내자는 회의 결과에 반대한 도균(김도윤 분) 같은 인물이다. 입주민을 몰래 숨기고 배식 받은 음식을 이들과 나누는 그의 모습은 누군가에겐 희생으로, 누군가에겐 비겁으로 읽힐 여지가 충분하다. 도균의 모습으로부터 얼마간 나치 치하에서 유태인을 구하는 독일인을 연상하는 것도 자연스런 일이다. 제 생존을 남에게 의지하면서도 그를 위한 책임은 전혀 지려하지 않는 비겁이 둘을 구분하게 하는 요소이겠지만 말이다.
이밖에도 여러 인물로부터 여러 선택이 거듭된다. 이 가운데 오늘의 한국에 얼마든지 있을 법한 현실적 인물을 발견하게 되기도 하고, 극의 효율적 전개를 위해 충분히 있을 법한 캐릭터를 배제해놓은 듯한 아쉬움도 찾아볼 수 있다. 이를테면 누구도 입주민과 외부인이 함께하는 미래를 적극적으로 그리려 하지 않는다. 또 누구도 영탁의 의견에 반하는 주장을 설득력 있게 펼치려 들지 않는다.
▲ 콘크리트 유토피아 스틸컷 |
ⓒ 롯데엔터테인먼트 |
뿐인가. 나가면 죽을 줄을 뻔히 알면서도 큰 저항 없이 물러나는 외부인들의 모습이며, 또 황궁아파트의 운명을 가름하는 급격한 전환 같은 대목은 너무나 급작스럽고 개연성 없이 그려진다. 말하자면 캐릭터는 깊은 고려 없이 쉽게 선택됐단 인상이고, 후반부의 전개 또한 얼마쯤 허술하게 보인다.
수많은 재난영화가 수없이 반복한 것, 말하자면 영화 속 모두가 인간의 본성으로부터 벗어나지 않는다는 주제의식 또한 너무나도 흔하고 식상하기 짝이 없다. 야심차게 펼쳐낸 영탁의 드라마가 산만하며 허망하게 끝나버리고, 급작스레 명화의 이야기로 주제의식을 드러내는 선택은 무책임하게까지 느껴진다. 전반부를 장악하는 영탁의 리더십이 다른 재난영화에서 쉽게 마주할 수 없는 것이란 점은 그래서 더욱 아깝다. 없던 리더십을 세우는 흥미로운 순간으로부터 이제는 흔하여 새로운 감동을 일으키기 역부족인 장면들로 이어지는 전개가 두고두고 곱씹을 만큼 아쉽다. 영화의 중심이 아파트 단지를 벗어나 외부로 전환되는 순간, 여타 성공한 재난영화처럼 커다란 충격이 전해지지 않는 것도 이 때문이라 하겠다.
그럼에도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볼 만한 작품이다. 한국에서 흔치 않은 잘 만들어진 재난영화란 점이 그렇고, 여러 담론을 이끌어낼 수 있는 설정이며 상징이 그러하다. 수년이 지나서까지 언급될 만한 작품이라고는 할 수 없으나, 두 시간을 충분히 즐기고 나와 흥미로운 대화를 이어갈 수 있는 영화는 된다는 뜻이다. 이 중 무엇에 무게를 둘지는 오롯이 관객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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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김성호 평론가의 얼룩소(https://alook.so/users/LZt0JM)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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