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협, 재계 맏형 되려면…"정책소통 꾸준히 하고 국민에 알려야"
국제통상, 세제·노동 등 현안
"정치권·정부 자주 만나되 투명히 공개"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가 '글로벌 싱크탱크형 경제단체'로 거듭나겠다며 한국경제인협회(한경협)으로 이름을 바꿨지만 재계 맏형 노릇을 제대로 하기까지는 갈 길이 멀다. 윤리적 측면에서 정경유착을 근절하는 것은 기본이고 정치권, 정부와 함께 통상, 세제·노동 등 현안을 풀어나가는 주체로 인정받아야 한다. 또 의사결정 과정을 국민에게 투명하게 공개하는 제도적 장치도 만들어야 한다.
전경련은 22일 임시총회를 열고 조직 이름을 한경협으로 바꾸고 산하 한국경제연구원을 흡수하는 조직 개편 안건을 의결했다. 미국통(通) 류진 풍산 회장을 39대 수장으로 추대했다. 상근부회장은 다음 달 공개한다. 김병준 전 회장 직무대행 고문 추대는 총회 안건이 아니었으나 류 회장이 "(김 전 대행을) 고문으로 모시면서 필요한 게 있으면 자문도 구하려 한다"고 밝혔다. 정부 관련 기금 출연, 자금이 필요한 대외사업 적정성을 심의하는 윤리경영위원회 위원 선정 관련 시행세칙은 추후 마련한다. 윤리위 의사결정 독립성 확보와 외압 차단 대책, 외압 발생 시 구속력 있는 처벌 규준 등을 공개하지 않은 점은 한계로 지적된다.
윤리뿐 아니라 실력을 보여주는 것도 과제다. 재계에서는 한경협이 재계 맏형으로 인정받으려면 질 높은 분석 자료 제공을 넘어 통상, 세제·노동 같은 난제를 푸는 데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존재로 인정받아야 한다고 주문한다. 미국 국제전략문제연구소(CSIS) 같은 롤모델을 만들어 벤치마킹하는 전략도 좋지만 과거 전경련 전성기 시절을 돌아볼 필요도 있다는 지적이다. 전경련 주도로 대통령은 물론 야당과도 주요 의제를 논의하던 노무현 정부 시절 전경련 모습을 보여달라는 것이다.
전성기 전경련은 정책에서 4대그룹 기업 구조조정 간담회 주도(1998년), 노무현 대통령 참석 일자리 창출을 위한 투자전략 국민보고회 주도(2004년), 규제개혁촉진단 발족(2007년), 300만 고용창출위원회 출범(2010년), 한미 FTA 협상 및 비준 과정(2006~2012년)에 참여했다. 정무적으로는 대통령 초청 30대 그룹 간담회(2010년), 야당(새정치민주연합)-전경련 정책간담회 개최(2015년) 등을 주도했다. 실무 성과로는 1988년 서울 올림픽 유치 지원을 비롯해 경기도 파주 LG디스플레이, 충청남도 아산 탕정지구 삼성디스플레이, 경기도 화성 삼성반도체 산업단지 개발 등에 기여했다. 하지만 전경련은 박근혜 정부 이후 '불투명하고 힘없고 느린 조직'으로 전락했다. 2016년 국정농단 전부터 폐쇄적인 조직 운영, 대통령·국회의원 간담회 실종, 규제·정책 대응 능력 부족 등을 지적받아왔다. 국정농단에 억울하게 엮여서 몰락한 것이 아니라 그 전부터 서서히 실력을 잃어가던 중이었다는 이야기다.
전문가들은 경제계 모두가 공감하는 핵심 의제를 발굴하고 주요 의결사항을 국민에 투명하게 공개하는 방식으로 조직을 운영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류 회장은 장기인 통상 분야에서 성과를 내기 위해 노력한다는 방침이다. 전날 임시총회에서 그는 "주요 7개국(G7) 대열에 당당히 올라선 대한민국, 이것이 우리의 목표여야 한다"고 했다. 현안은 미국 반도체과학법, 인플레이션감축법(IRA), 유럽 핵심원자재법(CRMA) 등이다. 미국, 유럽연합(EU) 등과 실무협상을 할 때 정부와 기업 사이에서 가교 역할을 해내야 한다.
중장기적으로는 청와대, 정치권 행사에 다른 단체를 제치고 참여했다며 만족하는 것을 넘어 한경협 주도로 대통령, 정치인 등을 초청하는 모습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는 조언이다. 수시로 기시다 후미오 총리를 만나는 일본 게이단렌 사례를 참고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최준선 성균관대 법학전문대학원 명예교수는 "한경협 내 윤리위, 회원사 자문기구(삼성 준법감시위원회 등) 등 내부통제 장치가 워낙 많아 한경협이 정경유착의 원흉으로 손가락질받을 가능성은 작다"며 "국정농단 사태처럼 '깜깜이' 식으로 정치권과 교감하는 것이 문제지 자주 만나는 것은 바람직한 현상"이라고 했다. 그는 "정치권, 정부 인사가 불러서 억지로 따라가는 방식, 언론 등을 거치지 않고 밀실 야합하는 방식 등은 지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문채석 기자 chaeso@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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