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서민 상대의 '제국신문' 창간

김삼웅 2023. 8. 23.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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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일은 중추원 의관 자리를 흔쾌히 내던지고 야인의 길에 나섰다.

그러나 나는 말하기를 사실 현세를 따지고 보면 대한제국의 시대인 까닭에 나의 의견으론 제호를 제국신문이라고 붙이면 어떨까 한다.

듣는 사람들이 숙의한 끝에 모두 좋은 명칭이라 말하여 이에 제국신문으로 결정하고 제호를 한글로 하면 어떻겠는가 했더니 역시 모두 좋다고 했다.

이종일은 독자적으로 『제국신문』을 준비하면서 논설 집필을 중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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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삼웅의 인물열전 - 잊혀진 선각자, 묵암 이종일 평전 6]

[김삼웅 기자]

이종일은 중추원 의관 자리를 흔쾌히 내던지고 야인의 길에 나섰다. 예나 지금이나 재야는 춥고 배고픈 지대이다. 권력의 박해가 따르고 주민(시민)들의 몰이해도 따갑다.

그는 당시만 해도 생소하고 낯설은 언론인의 길을 택하였다. 언론(신문)에 대한 그의 열정은 뜨거웠다.

근대적 신문을 통해 실학사상과 동학의 근본정신인 '보국안민'을 이루고자 한 것이다. 신문발간을 위해 여러 사람과 의논하였다. 그는 당시 태동한 만민공동회에도 적극 참여하면서 신문창간을 서둘렀다.

동지 이동녕이 찾아왔다. 이 동지는 30여 세의 청년지사로서 그는 말하기를 "옥파 선생은 국운이 어느 곳에 달려 있다 하겠는가. 기울어져 가는 나라의 형세를 어떤 방도로 지킬 것인가" 하기에 나는 말하기를 "먼저 신문을 발간하고 뒤에 학교를 세워서 민중을 계몽하고 인재를 양성할 것이다"라 했더니 그도 말하기를 그 말인즉 합당한 고견이라 하고 웃으며 이야기하다가 돌아갔다. (주석 11)

그는 신문 창간을 준비하면서 주위에 "이종면·이종문·장효근·염중모·심상익·김익승 등 이문사(以文社) 중심의 개신 유학자와 개명관리 그리고 신흥 상공업자, 또 유영석·이승만과 같은 배제학당 출신자들이 있었다." (주석 12) 

신문 발간이 진척되면서 제호를 정하는 데 측근 동료들의 의견을 들었다. 그리고 『제국신문』 제호는 직접 지었다.
 
 이종일 선생이 창간한 <제국신문>
ⓒ 묵암 이종일 선생 기념사업회
 

유영석과 이종면과 장효근이 찾아와서 신문발간에 관해 숙의했는데 내가 말하기를 신문의 제호는 무엇이 좋겠는가. 유가 말하기를 매일신문이 좋겠다. 이가 말하기를 대한신문이 좋다. 장이 말하기를 광무신문(光武新聞)이 좋다.

그러나 나는 말하기를 사실 현세를 따지고 보면 대한제국의 시대인 까닭에 나의 의견으론 제호를 제국신문이라고 붙이면 어떨까 한다. 듣는 사람들이 숙의한 끝에 모두 좋은 명칭이라 말하여 이에 제국신문으로 결정하고 제호를 한글로 하면 어떻겠는가 했더니 역시 모두 좋다고 했다. 그래서 한글전용의 신문을 발간할 것을 결정지었다. (주석 13) 

이 시기 이종일은 『경성신문』에 논설을 집필하고 있었다. 이 신문은 1898년 1월 배제학당의 학생회인 협성회가 『협성회회보』를 주간으로 발행하다가 4월부터 일간으로 발행했다. 같은 해 3월에는 주간으로 『경성신문』이 창간되었다. 이종일은 독자적으로 『제국신문』을 준비하면서 논설 집필을 중단하였다.

신문의 창간은 쉽지 않았다. "제국신문의 창간작업이 끝났는데 직원은 나까지 포함해서 10여 명이다. 그러나 나의 주된 임무는 바로 경영자이자 사원이며 기자를 겸했다. 그렇기 때문에 논설을 내가 집필할 예정이며 서울 시내의 대중이 크게 관심 갖는 일을 주의해서 살펴야 하니 나의 심중은 마치 출정하는 장군의 그것과도 같은 것이다." (주석 14) 

1898년 8월 8일 마침내 여성과 서민대중을 위한 순한글 일간 신문이 창간되었다. 당시의 제호는 『뎨국신문』이라 했다가 곧 『제국신문』으로 바꾸었다. 1897년 10월 고종은 국호를 조선에서 대한제국으로 개명하였다. 해서 대한제국 시대의 신문이란 의미로 『제국신문』이라 작명한 것이다.

심상익이 인쇄시설을 제공하고 운영은 이문사(以文社)와 공동으로 맡고 회사형태는 주식회사 아닌 합자회사였다. 같은 해 9월에 창간된 『황성신문』이 국한문을 혼용하였다. 세간에는 『제국신문』을 '암신문'으로, 국한문 혼용의 『황성신문』을 '숫신문'으로 부르기도 했다.

『제국신문』은 병탄 직전인 1910년 8월 10일까지 11년 동안 약 3240호를 발간하였다. 그 사이 이종일은 회사를 운영하면서 많은 논설을 집필하였다.

주석
11> 『묵암 비망록』, 1898년 6월 9일자. 
12> 정진석,『한국언론사』, 166쪽, 나남, 1992. 
13> 『묵암 비망록』, 1898년 7월 4일자.
14> 앞의 책, 1898년 8월 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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