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자전 한장에 3만원?…그래도 달콤했다, 알프스서 한달 살기

백종현 2023. 8. 23. 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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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째 신혼여행⑤ 스위스 취리히


제2차 세계대전 중 스위스는 학교 운동장도 감자밭으로 바꾸고 독일의 공격을 견뎌냈다고 한다. 그때 스위스를 먹여 살린 감자요리 뢰스티.
하늘에서 여행 경비로 1000만원이 뚝 떨어진다면, 어느 나라에서 ‘한 달 살기’를 하고 싶은가. 고민 없이 우리는 대답할 것이다. 스위스요! 지금부터 이 지면은 스위스 예찬으로 꽉 채워질 예정이다. 한 번도 스위스에 다녀와 본 적이 없다면 지금 당장 ‘알프스 적금’을 개설하길 권한다.

아내의 여행


스위스 융푸라우요흐 정상에서 바라본 유럽에서 가장 긴 빙하, 알레치.
“뭐? 일주일짜리 패키지여행도 아니고 한 달씩이나 스위스에 있다가 왔다고? 돈이 얼마나 많은 거야?”

2021년 9월, 스위스 취리히에서 ‘한 달 살기’를 하고 왔다. 스위스는 비싼 물가로 워낙 악명이 높은 나라다. 당연히 많은 이가 부러워했고 몇몇은 질투 어린 시선을 보냈다.

누구나 동경하는 알프스지만, 이전의 나는 좀 시큰둥했다. ‘케이블카 타고 오르는 산이 뭐 그리 매력적인가’ 싶었다. 게다가 나는 산보다 바다에 끌리는 ‘바다파’다. 준비물이 많은 산보다 비키니 한 장이면 충분한 바다가 좋다. 하지만 스위스에선 나를 바꿔야 했다. 버스‧기차‧케이블카 등을 무제한으로 탈 수 있는 ‘스위스 패스’를 들고 매일 아침 기차역으로 향했다.

'007' 시리즈 촬영지 쉴트호른으로 향하는 아찔한 케이블카.

스위스는 생각보다 작은 나라여서 취리히에서 당일치기로 알프스를 다녀오는 데에도 무리가 없었다. 그렇게 나는 타고난 ‘산파’처럼 이 산 저 산을 유랑했다. 스위스 패스라는 이 무적의 패스는 나를 영화 ‘007과 여왕’의 촬영지인 쉴트호른(2971m)과 인터라켄, 융프라우요흐(4166m)에 데려다주었다. 알레치 빙하도, 니체가 사랑했다는 ‘고독한 은신처’ 실스마리아도 보여줬다.

알프스에서의 마지막 날. 그린델발트에서 피르스트(2184m)까지 올랐다가 바보같이 울음이 터져 나왔다. 난 좀 건조한 인간이라 분할 때 빼고는 울지 않는 편이다. 그날 무슨 일인지 정상까지 오르는 케이블카가 운행을 멈췄고 두 시간가량 힘든 산행을 해야 했다.

우리가 꿈꾸던 스위스의 모든 이미지를 품고 있는 피르스트와 그린델발트의 풍경.

산에 올라 맥주 한 병을 마시고 하산했다. 그게 다였다. 걷는 내내 발밑에는 푸른 허브 밭이, 눈앞에는 가을 단풍이 그리고 등 뒤에는 하얀 설산이 우리와 함께였다. 아름다운 이 풍경을 종민과 함께 걸어서 눈시울이 붉어졌다고, 알프스를 걷고 있는 이 삶에 감사해서 눈물이 났다고 말하지는 못했다. 그저 케이블카가 고장 나서 안 해도 되는 등산을 한 게 억울했다고 건조하게 답했을 뿐이다.

취리히에서 한 달을 지낸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일생에 한 번쯤은 큰 결심을 해보라고 말하고 싶다. 한 달 내내 취리히를 거점 삼아 알프스 이곳저곳을 오르내리고, 그러다 지치면 고요한 호숫가에 발라당 누워 현지인처럼 휴식을 취해 보시라. 그럼 당신도 나처럼 일주일에 네 번 이상 동네 뒷산을 찾고, 한 달에 한 번꼴로 ‘한국의 100대 명산’을 오르게 될지도 모른다. 요즘 나는 산과 관련한 장비가 하나둘 늘어나는 걸 불편해하면서도 점점 ‘산파’가 되어간다. 다 이놈의 스위스 때문이다.
김은덕 think-things@naver.com


남편의 여행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 촬영지로 유명한 린덴호프에서 바라본 취리히 시내.
당시만 해도 코로나가 한창이었다. 한데 바이러스보다 살인적인 물가가 더 걱정이었다. 여행 짐을 싸면서도 손이 덜덜 떨렸다. 스위스에서는 돈 좀 아껴보려고 햄버거를 사 먹어도 2만원이 필요하고, 작은 식당에서도 한 사람당 5만원이 우습다고 했으니까.

걱정과 달리 스위스도 사람 사는 곳이었다. 마트에 진열된 식재료는 물건값이 서울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 한 끼 음식으로 먹기 좋은 반조리 식품과 샐러드도 우리 동네 편의점 물가와 비슷했다. 메뉴도 다양해서 풍기 리소토, 볼로냐 스파게티, 태국 그린 카레, 피자, 치킨 등 취향대로 고를 수 있었다.

취리히의 가을은 알프스에서 내려온 바람과 빙하가 녹은 호수 덕분에 상쾌하다.

취리히 사람이라고 해서 세끼를 전부 근사한 레스토랑에서 해결하는 건 아니었다. 공원이나 호숫가를 산책할 때마다 목격한 것이 벤치에 앉아 간단히 끼니를 때우고 떠나는 현지인의 모습이었다. 사람 잡는다는 취리히의 물가 속에서도 한 달 살기를 할 수 있었던 건 현지인처럼 지냈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주 마트에서 점심거리를 사 들고 취리히 시내가 내려다보이는 린덴호프 광장에 올랐다. ‘사랑의 불시착’ 촬영지로도 유명한 그곳이 우리의 아지트이자, 레스토랑이었다.

현지 문화를 이해하는 데 전통 음식만큼 좋은 재료도 없다. 그런 이유로 가끔은 레스토랑의 문도 열어봤다. 스위스 전통식에서 탄수화물은 감자가 책임지고 있었다. 우리네 쌀처럼 말이다. 뢰스티(감자 부침 요리)를 먹을 때는 강원도에서 먹었던 감자전이 생각났고, 라클레트(치즈를 녹여 빵이나 고기 위에 얹어 먹는 요리)를 먹을 때는 치즈보다 바구니에 담긴 삶은 감자의 양에 놀랐다.

퐁듀는 어떤 치즈를 쓰느냐에 따라 맛이 달라진다. 그런 이유로 어느 칸톤(스위스의 자치주)에서 먹느냐에 따라 퐁듀에 대한 기억이 바뀐다.

사계절 젖과 꿀이 흐를 것만 같았던 알프스도 1960년대 이전에는 가난한 산골이었다고 한다. 우리 정부가 베트남전쟁에 군대를 파견해 돈을 벌어 왔던 것처럼, 스위스도 전쟁터에 용병을 보내 겨우 먹고 살았다. 먹을 것이 부족했던 겨울, 딱딱하게 굳은 치즈를 수프처럼 녹인 다음 빵을 찍어 먹었던 것이 퐁듀의 원형이 됐단다.

사연 많은 스위스 음식을 먹는 건 늘 행복했지만, 내 주머니를 설득시키기엔 부족했다. ‘감자전이 3만원, 찐 감자가 5만원…’ 지갑을 열 때마다 정신이 아득했다. 그때마다 기분 풀라고 은덕은 내 입에 스위스 초콜릿을 넣어줬다. 초콜릿 박물관에서 달콤함을 한 움큼씩 주워 먹었더니 움츠러들었던 마음이 사르르 녹아내렸다. 초콜릿에 둘러싸여 있는 것만으로도 인생이 달콤해진다는 걸 알게 된 순간이다. 주머니 사정 때문에 힘들었던 취리히 한 달 살기를 발랄하게 즐길 수 있었던 비결이었달까.
백종민 alejandrobaek@gmail.com

취리히 호숫가를 걷다 보면 평일 한낮의 여유를 즐기는 이들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 스위스 취리히 한 달 살기 정보

맥도날드 빅맥 세트마저 비싼 스위스. 그래서 현지인들의 일상은 마트에서 시작해서 마트로 끝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비행시간 : 약 13시간
날씨 : 알프스 하이킹이 목적이라면 5~10월이 적기!
언어 : 독일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등 지역마다 사용하는 언어가 다른데 기본적으로 영어도 잘함.
물가 : 외식비, 교통비 등은 비싸지만 마트 물가는 한국과 비슷한 수준. 되레 더 저렴한 품목도 있음.
숙소 : 1500 스위스프랑(약 220만원) 이상(집 전체 사용, 취리히 시내에서 30분 내외 거리)

■ 여행작가 부부 김은덕, 백종민

한시도 떨어질 줄 모르는 작가 부부이자 유튜버 부부. ‘한 달에 한 도시’씩 천천히 지구를 둘러보고, 그 경험의 조각들을 하나씩 곱씹으며 서울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다. 마흔여섯 번의 한 달 살기 후 그 노하우를 담은 책 『여행 말고 한달살기』를 출간했다. 지은 책으로 『사랑한다면 왜』 『없어도 괜찮아』 『출근하지 않아도 단단한 하루를 보낸다』 등이 있다. 현재 미니멀 라이프 유튜브 ‘띵끄띵스’를 운영하며 ‘사지 않고 비우는 생활’에 대해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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