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지혜 특파원의 여기는 베이징] ‘반간첩법’ CIA 스파이 2명 적발… 대국민 신고 독려하는 中

권지혜 2023. 8. 23. 0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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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 간첩 행위의 범위를 넓히고 처벌을 강화한 ‘반간첩법’ 개정안이 지난달 1일 시행된 뒤 비판 여론이 확산하고 있다. 중국에 있는 외국인과 기업들은 반간첩법을 의식해 몸을 사리는 분위기다. 사진은 지난 5월 베이징에서 열린 축제에서 한 남성이 행성 모양의 중국 오성홍기와 미국 성조기로 장식된 음식 판매 부스 옆을 지나가는 모습. AP뉴시스

국가안전부, CIA 거론은 이례적
전국서 간첩식별 방법 교육 나서
의심스런 활동 포착땐 보고 강조

중국내 외국인·기업들 몸사리기
상하이 외국인 공무원 채용 논란
“간첩 침투 경계를” 우려 목소리

중국의 한 부처 간부인 하오모(39)씨는 일본 유학 시절 미국 비자를 발급받기 위해 현지 주재 미국 대사관 소속 외교관을 만났다. 이 외교관은 하오씨를 식사에 초대하고 선물을 건네면서 친밀감을 쌓았다. 그는 임기를 마치고 귀국하기 전 동료 리쥔을 하오씨에게 소개했고 두 사람은 계속해서 협력 관계를 이어갔다.

하오씨의 유학 기간이 끝나갈 무렵 리쥔은 자신이 미 중앙정보국(CIA) 요원임을 밝히고 그에게 중국으로 돌아간 뒤 핵심 부서에서 일할 것을 요구했다. 미국 측의 스파이 활동 평가와 교육을 받은 하오씨는 그들의 제안대로 중국 국가 부처와 위원회에 근무하며 CIA 요원에게 정보를 제공하고 그 대가로 돈을 받았다.

중국 정보·방첩 기관인 국가안전부가 21일 SNS 위챗 공식 계정에 ‘CIA의 스파이를 또 적발했다’며 공개한 사건의 개요다. 개혁개방 이후 태어나 급속한 경제성장의 혜택을 누린 ‘바링허우’(1980년대생) 간부가 CIA에 포섭돼 스파이가 됐다는 뉴스는 큰 관심을 끌었다.

국가안전부는 지난 11일에도 CIA 간첩 적발 사실을 발표했다. 중국 군수업체에서 중요한 기밀을 다루던 쩡모(52)씨가 이탈리아에 연수를 갔다가 현지 주재 미국 대사관 직원을 알게 됐고 오페라 공연 등을 함께 보며 가깝게 지내다 결국 스파이가 됐다는 내용이다. 쩡씨는 가족의 미국 이민을 도와주겠다는 미국 측 제안에 각종 군사 관련 정보를 넘긴 것으로 알려졌다. 국가안전부는 “CIA 요원이 쩡씨에게 접근해 서구적 가치관을 주입했고 그의 허풍과 포섭에 쩡씨의 정치적 입장이 흔들렸다”고 설명했다.

국가안전부는 이전에도 방산, 항공우주 분야 등에서 활동하던 스파이를 색출했다며 이를 대대적으로 선전했지만 CIA를 직접 거명한 건 이례적이다. 지난 7월 개정 반간첩법이 시행된 이후 나타난 변화 중 하나다. 2014년 이후 9년 만에 개정된 반간첩법은 국가안보와 이익에 관한 문건 등을 취득·제공하거나 국가기관·기밀 관련 부처 및 정보 기반시설 등에 대한 촬영 등을 간첩 행위에 포함하는 등 적용 범위를 대폭 확대했다.

개정 반간첩법 시행 이후 중국에선 대국민 간첩 신고 독려 바람이 불고 있다. 중국 관영 매체 글로벌타임스 등에 따르면 베이징·상하이·충칭 등 대도시뿐 아니라 저장·푸젠·신장 등 전역에서 반간첩 교육이 진행되고 있다. 핵심은 간첩으로 의심되는 사람을 식별하는 방법이다.

당국은 중국의 지형·지물이나 군사기지 관련 질문을 하는 사람, 암호화 프로그램 등의 통신 수단을 쓰거나 은행 계좌번호 등 개인정보를 묻는 사람을 특히 경계하라고 강조했다. 또 조금이라도 의심스러운 활동이 포착되면 즉시 해당 부서에 보고하도록 했다. 베이징에선 평범해 보이는 사진과 영상으로도 국가기밀이 누설될 수 있다고 설명하는 영상 강연회가 열렸다. 중국현대국제관계연구원의 대테러 전문가인 리웨이는 “간첩의 활동이 광범위해지고 수법이 교활해지면서 국가 기관만으로는 방첩 업무를 효과적으로 수행하기가 어렵다”며 “국민의 참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실제로 국가안전부는 지난달 1일 중국에 사는 사람이면 누구나 쓰는 위챗에 계정을 만들어 홍보 활동에 나섰다. 국가안전부 출범 40년 만에 처음으로 온라인상에 플랫폼을 개설한 것이다. 이 계정에 처음 올라온 게시글 역시 간첩 잡기에 전 국민이 동참해야 한다는 안내문이었다. 국가안전부는 “인민대중의 광범위한 참여로 국가안보의 방어선을 확실히 구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미 국무부는 “사람들이 서로를 감시하도록 조장한다”고 비판했다.

반간첩법 시행 이후 중국에 있는 외국인과 기업들은 몸을 사리고 있다. 정부 인사와의 만남을 최소화하고 민감한 주제를 다룬 보고서 작성을 꺼리는 분위기가 퍼졌다. 베이징 소식통은 “본사로부터 ‘문제가 될 만한 인사는 만나지 말고 민감한 내용은 문서화하지 말라’는 지침이 내려온 회사들이 적지 않다”고 전했다. 중국 당국은 “법과 규정에 따라 경영하기만 하면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입장이다.

간첩 사건과 맞물려 상하이시의 외국인 공무원 채용을 둘러싼 논쟁이 불붙었다. 상하이시는 이달부터 외국인과 홍콩·마카오·대만 사람도 공무원 시험에 응시할 수 있도록 했다. ‘상하이시 기관의 고급 인재 채용 방법’에 따르면 내국인과 별개로 외국인 응시 요건이 명시돼 있다. 상하이시 거주증이 있고 1년 이상 거주한 석사 이상 학력자면 지원할 수 있다. 과학기술, 의료 등 중국보다 수준이 높은 분야의 고급 인재를 유치하고 지역 경제 발전을 촉진한다는 취지다.

그러나 여론은 좋지 않다. 3년의 코로나 봉쇄로 많은 중국인이 일자리를 잃었고 매년 1000만명 이상의 대학 졸업생이 쏟아져 나오는 상황에서 외국인에게 공무원직 문호를 여는 것이 바람직하냐는 문제 제기부터 문화적 차이가 갈등을 유발할 수 있다는 우려까지 다양하다. 외국인을 국가 기구 편제에 포함한 적이 없는 중국 역사와 전통에 대한 전복이라는 주장까지 나왔다.

이와 함께 간첩 침투를 경계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개정 반간첩법이 막 시행된 지금 왜 외국인에게 문을 열어주냐는 것이다. 중국인들은 “일단 사고가 나면 피해를 보는 건 국가와 인민 전체”라며 “일련의 간첩 사건은 국가안보와 사회안정을 보장하기 위해 중요 부문 간부와 유학생, 외국인에 대한 관리를 강화해야 한다는 경고를 줬다”고 주장했다.

베이징=권지혜 특파원 jhk@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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