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년째 고래 부검, 인간 위한 일”
“여기 골반이 보이죠? 상괭이가 원래 육상에서 살던 동물이었다는 걸 증명하는 흔적이죠. 바다로 오면서 뒷다리는 사라지고 골반만 남은 거예요.”
18일 충남 태안군 근흥면의 한 수산물 가공창고. 상괭이 사체를 부검하던 이영란 플랜 오션 대표가 작은 뼛조각을 가리키며 말했다. 국내에 몇 안 되는 해양생물 전문 수의사인 그는 15년째 고래 사체를 부검하고 있다. 이날도 그는 새벽에 전남 고흥과 부산의 해변에서 토종 돌고래 상괭이 사체가 연이어 발견됐다는 연락을 받고 급히 이곳으로 와 부검을 진행했다.
에어컨도 없는 부검실에서 땀이 비 오듯 쏟아지는데도 그는 상괭이를 죽음으로 몰고 간 흔적을 찾아내기 위해 차분히 사체 이곳저곳을 살폈다. 곧이어 상괭이의 위에서 50㎝ 크기의 물고기가 소화도 되지 않은 채로 발견됐다. 이 대표는 “상괭이의 몸에서 이렇게 큰 물고기를 발견한 건 처음”이라고 놀라면서도 “큰 먹이를 사냥해 먹었을 정도면 죽기 직전까지 상괭이의 건강 상태가 나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한 시간 넘게 부검이 진행됐지만 결국 정확한 사인을 밝혀내지는 못했다. 이 대표는 “혼획(어획 대상종에 섞여서 다른 물고기가 함께 잡히는 것)으로 인한 질식사의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다”면서도 “여름철이다 보니 너무 더워서 부패가 빨리 일어났고 많은 정보를 알 수 없어서 아쉽다”고 했다.
이 대표가 고래 부검의가 된 건 한반도 주변 바다에서 고래가 점점 줄어드는 이유를 밝혀내기 위해서다. 특히 상괭이는 자산어보에 ‘상광어(尙光漁)’라는 이름으로 기록될 정도로 오래전부터 흔하게 볼 수 있었던 토종 돌고래지만 혼획과 오염 등으로 인해 개체 수가 급감하는 추세다. 그는 “상괭이를 부검하면 질식사가 많이 나온다”며 “상괭이는 포유류라서 우리랑 똑같이 폐호흡을 해야 하고, 폐호흡을 하려면 물 위에 나와서 숨을 쉬어야 하는데 그물에 걸리면 숨을 못 쉬고 질식사한다”고 말했다.
고래가 대형 포유류이다 보니 사체를 구하는 것부터 부검 후 처리까지 난관이 적지 않다. 비용이 많이 들어갈뿐더러 마땅한 장소를 찾지 못해 부검을 포기하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이 대표는 “부검을 마친 고래 사체는 의료 폐기물로 분류돼 소각 처리해야 한다”며 “예전에 제주에서 참고래를 부검한 적이 있는데 처리비로만 2000~3000만원이 들었다. 예산 지원이 없으면 고래 부검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했다. 또 고래가 죽고 나면 지방층이 밀폐 용기 구실을 하기 때문에 부패 과정에서 내장에 메탄가스가 차서 폭발할 위험도 있다.
이런 난관에도 이 대표는 고래의 죽음에 대해 여전히 밝혀지지 않은 게 많다며 단순히 고래를 보호하는 것뿐 아니라 인간을 위해서라도 부검 연구를 계속할 거라고 강조했다.
“부검을 통해 고래가 어떻게 살고 어떤 일이 있을 때 못 살게 되는지에 대한 지도를 그리고 싶어요. 우리가 같이 사는 바다에서 고래들이 왜 죽어가는지를 알아야 인간한테 올 수 있는 (위협을) 막을 수 있어요.”
천권필 기자 feeling@joongang.co.kr
Copyright © 중앙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내 아이 예민할까 둔할까, 생후 5분 만에 알아보는 법 | 중앙일보
- 250t 순식간에 완판…구미산 '냉동김밥' 미국서 대박 무슨 일? | 중앙일보
- 봅슬레이 강한, 25년 만에 만난 생모 사망 "온갖 죄책감으로 미안" | 중앙일보
- 부여군의원 극단적 선택…부인은 72억 투자 사기 치고 잠적 | 중앙일보
- '전 펜싱 국대' 남현희 이혼 발표…동시에 새 연인 깜짝 고백 | 중앙일보
- 신혼 첫날밤 성관계 했다가…태국인 아내에 '강간' 고소 당했다 | 중앙일보
- "버스 놓치면 끝" 비장한 아침…남들 운동할 때, 난 살려고 뛴다 [출퇴근지옥②] | 중앙일보
- 韓 103건 뿐인데 10배 많다…中 단체 관광객 몰려가는 나라 | 중앙일보
- "허탈했다"…판결 오자에 2000만원 손해, 그걸 고친 대법도 오자 | 중앙일보
- 감자전 한장에 3만원?…그래도 달콤했다, 알프스서 한달 살기 | 중앙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