잇단 감산에도…더 늘어난 삼성 반도체 재고
올 들어 반도체 시장에서는 하반기 ‘V자 반등론’이 득세했다. HBM(High Bandwidth Memory·고대역폭메모리)을 비롯한 인공지능(AI) 관련 칩 수요가 급증하면서 업황 회복의 기울기가 시간이 갈수록 가팔라질 것이라는 낙관론이 팽배했다. 정작 하반기로 접어들면서 이런 시각에 미묘한 균열이 관찰된다. AI 투자가 기대만큼 빠른 속도로 늘지 않고 있는 데다, IT 산업 수요도 여전히 부진하다. 반도체 업황 궤적도 바닥이 짧거나 거의 없는 ‘V자’가 아니라, 바닥이 길고 회복 기울기가 완만한 ‘나이키’ 모양에 가까울 것이라는 주장이 점차 힘을 얻고 있다.
삼성·하이닉스, 재고 증가폭 둔화
감산 효과 아직 미미한 듯
최근 반도체 산업에서는 일률적으로 경기 진단을 내리기 모호한 대목이 동시다발적으로 목격된다.
우선, 올 상반기 기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반도체 재고 자체는 거의 줄지 않았다. 두 회사의 감산 노력에도 올 상반기 재고자산에는 눈에 띄는 변화가 없었다. 증가폭이 줄었을 뿐 재고 규모 자체는 오히려 늘었다. 삼성전자 반기보고서에 따르면, 올 6월 말 기준 DS부문 재고자산은 33조6896억원이다. 지난해 말과 비교하면 올 상반기(1~6월)에만 4조6320억원의 재고가 늘었다. 반도체 산업이 하강 국면에 접어들기 전인 2021년 말(16조4551억원)과 비교하면 두 배가 넘는다. 반도체 재고가 크게 늘면서 삼성전자 전체 재고자산은 지난해 말 52조1878억원에서 올 상반기 55조5048억원으로 3조3317억원(약 6%) 증가했다. SK하이닉스의 올 6월 말 재고자산은 총 16조4202억원이었다. SK하이닉스의 경우 조기 감산 효과로 증가폭은 크게 줄었다. 업계에서는 삼성전자의 뒤늦은 감산 효과가 아직 본격적으로 반영되지 않은 탓으로 분석된다. 감산 효과는 시차를 두고 3·4분기부터 반영되면서 재고 조정이 두드러질 것으로 분석된다.
반도체 출하 등 관련 거시 경제 지표도 회복 중인 것은 맞다. KDI의 ‘8월 경제 동향(그린북)’에 따르면, 전년 동월 대비 반도체 수출물량지수는 지난 4월 1.3% 감소했지만 5월 8.1%로 반등했고, 6월 21.6%로 급등했다. 반도체 생산은 5월 -18.7%에서 6월 -15.9%로 감소폭이 줄었다. 반도체 출하는 5월에는 20.5% 줄었지만 6월에는 15.6% 증가세로 돌아섰다.
그럼에도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의 주력 분야인 범용 메모리 시장은 아직 반등을 낙관하기 이른 분위기다. 시장조사업체 디램익스체인지에 따르면, 지난 7월 PC용 D램 범용제품(DDR4 8Gb)의 평균 고정거래 가격(1.34달러)은 전월보다 1.5% 내려갔다. D램 가격이 20% 하락한 지난 4월이나 2~3%대로 떨어진 5, 6월보다 하락폭은 줄었다. 하지만 명확한 반등 신호로 보기는 힘들다는 분석이 대체적이다. 역대급으로 쌓인 재고를 털어낼 만큼 강한 수요 회복은 아직 요원하다는 인식이 대세다. 시장점유율을 여러 제조사가 나눠 갖는 낸드(NAND) 시장은 더 심각하다. 시장 구조가 파편화돼 있어 공급사의 재고 조절 효과가 거의 먹히지 않는다는 분석이다. 주요 제조사의 낸드 재고는 아직 1년 이상 쌓여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트렌드포스는 올 3분기 D램과 낸드플래시 가격이 전분기 대비 각각 최대 5%, 8% 하락할 것으로 봤다.
최근 주요 반도체 기업 최고경영자(CEO)들도 신중론에 합류했다. 특히, 미국 반도체 업황의 선행 지표 역할을 하는 대만 테크업체의 실적 부진은 향후 시황을 낙관하기 힘들게 만드는 요인이다. 반도체 후공정 업체가 몰려 있는 대만 IT 산업 특성상 이들 기업의 실적을 통해 최종 수요자인 미국 빅테크 실적을 가늠해왔다. 세계 1위 파운드리 기업인 대만 TSMC의 웨이저자 CEO는 최근 “3분기에 접어들면서 AI 관련 수요가 증가하는 것을 관찰했지만, 아직 충분하지 않다”며 “전반적인 거시 경제의 약세, 예상보다 더딘 중국 시장 회복, 완만한 시장 수요 때문에 고객들은 더 신중해졌고 4분기까지 재고 조절에 나설 움직임”이라고 밝혔다.
증권가도 “V자 반등 힘들다”
일률적인 반도체 경기 진단을 힘들게 하는 원인으로 시장 일각에서는 수요 변동성을 확대하는 ‘채찍 효과(Bullwhip)’를 지목한다. ‘채찍 효과’는 채찍을 쓸 때 손잡이 부분에 작은 힘만 가해져도 끝부분에서는 큰 파동이 생기는 현상에 빗댄 용어다. 공급망관리(SCM) 분야에서 주로 쓰인다. 공급망에 있어 소비자 수요의 작은 변동이 공급 단계를 거쳐 제조업체에 전달될 때 단계마다 정보의 왜곡이 생겨 기업의 관점에서 수요 변동성이 크게 확대되는 현상을 말한다.
이에 비춰, HBM과 AI 등 신(新)메모리와 비(非)메모리 반도체에 대한 자본 시장의 기대가 실제 업황보다 부풀려져 있다는 신중론도 읽힌다.
전문가들은 전체 D램 시장에서 HBM 점유율이 1%를 밑돌 것으로 보고 있다. 단기간 가파른 성장세를 보이더라도 전체 반도체 산업의 이익을 좌우할 영향력을 갖기까지는 적잖은 시간이 걸릴 것이라는 게 대체적인 시각이다. 삼성 내부에서도 HBM 시장의 성장률이 가파른 것은 맞지만 아직 절대적인 규모가 작아 작금의 점유율 자체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 분위기다. 시장조사기관에서 내놓는 HBM 점유율 추정도 정확하지 않다는 게 삼성 경영진의 인식이다.
무엇보다 HBM 생산 공정은 아직 수율 등의 측면에서 안정화되지 못한 상황이다. 그럼에도 HBM은 기존 D램 가격보다 7배 정도 비싸다. 생산과 매입 원가가 높다 보니 고객사 입장에서는 HBM에 사소한 문제라도 생기는 것을 원하지 않아 발주에 최대한 신중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AI 등 비메모리 시장을 바라보는 시각도 달라지고 있다. 미국 투자은행(IB) 모건스탠리는 “월가의 AI 열풍을 주도하고 있는 엔비디아 버블이 정점을 향해 가고 있다”며 “버블이 곧 터질 것”이라고 강조했다.
특히 미국과 중국 간 기술 패권 갈등은 비메모리 시장 수요에 찬물을 끼얹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지난 8월 9일(현지 시간) 사모펀드와 벤처캐피털 등 미국의 자본이 중국의 첨단 반도체와 양자컴퓨팅, AI 등 3개 분야에 대해 투자하는 것을 규제하는 행정명령을 발표했다. 이에 따라, 중국에 투자를 진행하려는 기업은 사전에 투자 계획을 의무적으로 신고해야 해 전반적인 투자 심리가 악화했다. 이승우 유진투자증권 리서치센터장은 “미국이 AI 관련 중국 투자를 규제하기로 한 가운데, 엔비디아가 슈퍼칩 GH200을 공개했지만, 칩 성능 향상으로 더 적은 수의 칩으로도 동일 성능의 AI 데이터센터를 구축할 수 있다는 발언으로 주가는 오히려 하락했다”고 전했다.
최근 중국에서 대형 부동산 개발 회사의 디폴트 위기 등 디플레이션 우려가 확산 중인 것도 수요 회복을 예단하기 어렵게 만드는 요인이다. 중국 부동산 개발업체의 연쇄 디폴트 위기가 해결되지 않으면 투자자 사이에서 중국 경제 불안감이 확산할 수 있다.
사정이 이렇자 하반기 반등을 일제히 예측했던 증권가에서도 속도 조절론이 확산 중이다.
서승연 DB금융투자 애널리스트는 “올 2분기 들어 미국과 중국 테크 기업의 소매 매출액은 전년 대비 개선되고 있으나 일반 서버를 포함한 전방위적 실수요 회복은 부진한 상황”이라고 진단했다. 또, 서 애널리스트는 “극악의 업황을 경험하고 있는 낸드의 경우 글로벌 공급사가 추가 감산을 표명했다”며 “D램은 낸드 대비 양호한 수급을 보이고 있으나 B2C 수요 회복이 미진할 경우 연내 D램 공급사의 재고가 정상 수준에 진입할 가능성은 낮다”고 짚었다.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223호 (2023.08.23~2023.08.29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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