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금개혁 논의에서 퇴직급여를 제외해야 하는 이유
[정재철 기자]
퇴직급여의 본질은 임금
연금 패러독스(pension paradox)라고 들어본 적 있는가? 연금제도는 불확실한 미래의 불안과 걱정을 덜어주는 보험제도인데 그 불확실한 미래에 관해서 말하지 않으면 안 되는 숙명을 가리킬 때 쓰이는 말이다. 연금제도는 지금부터 100년 후까지 내다 본 초장기의 미래를 다루지만 경제예측은 멀리 내다볼수록 틀리기 쉬워 미래학자 피터 드러커는 "미래는 예측할 수 없다. 예측하려고 해봤자 현재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의 신뢰를 떨어뜨릴 뿐"이라고 지적했다. 그렇다면 연금 패러독스 상황에서도 제도의 신뢰를 떨어뜨리지 않으면서 미래의 생활불안을 덜어주는 방법은 없을까? 이러한 고민에서 나온 제도가 '재정재계산제도'다.
재정재계산제도는 국민연금법 제4조에 근거하고 있는데, 5년마다 국민연금 재정 수지를 계산하고, 국민연금의 장기재정 균형 유지, 인구구조의 변화, 국민의 생활수준, 임금, 물가, 그 밖의 경제사정에 뚜렷한 변동이 생기면 거기에 맞게 연금보험료, 급여액, 급여의 수급 요건 등을 조정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 규정에 따라 인구요소, 경제요소에 관한 기초적 가정을 전제로 70년 후의 초장기의 급여와 부담의 균형을 맞춰보는 연금재정의 재계산이 실시되어 왔고 올해로 5번째를 맞았다.
인간의 '인지의 한계'를 뛰어넘는 불확실성에 대처해 보자고 5년마다 재정을 다시 계산하도록 법에 규정했고 그 계산 결과 인상이 필요한 보험료 수준과 목표로 지켜야 할 급여 수준 이 두 가지 목표가 양립하기 어렵다고 결론이 나면 어느 하나를 조정할 수 있도록 했다. 재정재계산제도는 연금제도의 지속가능성을 위해서 필수적인 제도로 잘 고안된 '자동조정장치'인 것은 분명하다.
문제는 성능이 그다지 좋지 못했다는 점이다. 1999년에 재정재계산제도가 도입된 이후, 5년마다 제도를 둘러싼 제반 상황을 다시 계산했고 그 결과로 급여액(소득 대체율)을 깎았고(70%→40%), 수급개시 연령을 늦추는 등(60세→65세) 급여 부분의 개선에는 좋은 성능을 보였지만 부담부분인 보험료율을 올리는 데는 매번 실패했다. 1999년 재정재계산제도가 도입된 이후 4번의 재정재계산을 했지만 필요한 보험료 수준을 계산만 했지 부담부분의 개선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보험료율 9%는 24년째 제자리걸음이고 그러는 동안 새로 필요한 보험료 수준을 추계할 때마다 미래세가 부담해야 할 보험료 수준은 높아만 갔다. 당연히 세대 간의 부담과 급여의 적정성이 흔들렸고 젊은층을 중심으로 제도 불신이 팽배해져 갔다. 이번 제 5차 재정재계산제도도 보험료를 올리지 못한 채 종료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든다.
국민연금보험료를 인상하기 어렵다는 인식이 팽배하면서 그 대안으로 주목받고 있는 것이 퇴직급여다. 국민연금 보험료 인상을 포기하는 대신 퇴직급여의 일부를 국민연금 보험료로 전환하여 소득 대체율도 높이고 연금제도의 지속가능성도 높이자는 제안이다. 이러한 제안은 새롭지는 않다. 과거 한때(1993년∼1999년) 퇴직금 전환제를 떠올리는 정책 제언인데, 이것은 퇴직급여의 본질을 오해한 제안이다.
아무리 퇴직급여 전환제가 시행된 적이 있다고 해도 퇴직급여는 노동의 대가로서 지불되는 임금이나 성과금과 본질적으로 같다. 아무리 국민연금 보험료를 인상하기 어렵다고 해도 1999년에 폐기된 퇴직금 전환제를 부활시키려는 움직임은 2005년 퇴직급여보상법이 별도로 제정되면서 공적 연금과 퇴직 연금 간의 역할 분담을 집중적으로 논의해야 할 연금개혁의 과제를 혼란스럽게 할 소지가 많다. 지금 상황에서도 퇴직금 전환제가 부활하면 사업주만 너무 큰 이득을 보게 된다.
분명하게 알아 두어야 할 것은 퇴직연금의 설정이나 급여내용 등을 어떻게 설계할지는 각 기업의 임금분배 정책상의 문제며, 그 형태가 강제적이든 임의적이든 상관없이 기업 활동의 성과의 일부를 생산요소인 노동자에 배분하는 것으로 그 본질은 임금에 다름 아니라는 사실이다. 다만 퇴직급여가 은퇴 후에 지불된다는 차이가 있기 때문에 그 기능에 착목한다면, 노후의 소득보장의 일환을 담당할 수 있어 국민연금과 접점이 발생한다.
국민연금과 퇴직급여의 역할 정립
퇴직금 전환금은 근로기준법에 의해 퇴직금 준비금 중 일부를 국민연금 보험료로 전환하여 납부토록 한 제도다. 1986년 국민연금법 제정 때 도입되어 1988년부터 1992년까지는 부담하지 않고 1992년부터 1997년까지는 6%의 보험료 중 2%를, 1998년 이후 9%의 보험료 중 3%를 부담하도록 법에 규정했다.
퇴직금 전환금에 대해서 처음에는 노사 모두 반대가 심했으나 근로자는 당장의 가처분소득이 줄지 않고 사업주 입장에서는 주어야 할 임금을 지연시켜 내부 유보를 통해 운영자금으로 사용할 수 있는 등 퇴직금을 대신 연금 보험료로 전환하는 것에 크게 저항의 이유가 없었다. 정부 입장에서는 퇴직금의 일부를 연금 보험료로 전환하도록 배려함으로써 일본처럼 별도로 10%의 국고부담을 하지 않고도 제도를 런칭시킬 수 있다는 이점이 작용한 결과로 보인다.
이러한 퇴직금 전환금제도는 1998년 IMF 경제위기가 한창이었던 1999년 4월부터 폐지되었다. 당시 야당 의원인 정의화 의원이 발의한 국민연금법 개정안 및 전문위원 심사보고서를 보면, 퇴직금 전환금 폐지는 근로자는 물론 사업주에게도 이득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퇴직금 전환금을 폐지하면, 근로자 및 사용자는 현행 3%에서 4.5%로 부담해야 하므로 1.5%p씩 부담이 늘어나지만 향후 퇴직금의 감액 없이 전액을 지급받게 되고 사용자도 퇴직금 전환금 3% 중 추가 부담하는 1.5%를 뺀 나머지를 연금 보험료로 납부하지 않고 사내 유보시켜 운영자금으로 사용할 수 있어 양자가 이득"이라는 것이다.
▲ 국민연금과 퇴직급여 비교 국민연금과 퇴직급여 비교 |
ⓒ 정재철 |
필자가 생각하기에 퇴직금 전환금 폐지는 당연한 수순이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국민연금과 퇴직급여는 달라도 너무 다르기 때문이다. <표>은 국민연금 보험제도와 퇴직급여를 간략히 비교 정리한 것인데 이 중에서 주요 특징 중심으로 간략히 살펴보자.
재정재계산제도와의 연관성에 중점을 두고 살펴보면 가장 두드러진 차이는 성격과 실질소득 보장방법, 소득 대체율 계산 등이다. 먼저 국민연금은 헌법 및 사회보장기본법 등의 생존권 규정을 간접적으로 반영하여 국민생활 및 복지향상을 위한 중요한 수단으로 전 국민을 대상으로 강제가입의 형식이지만 퇴직급여는 생활자기 책임의 원칙에 근거한 임금 혹은 공로에 대한 보상의 성격을 갖는다(➀,➁).
다음 제도의 성격을 보면 국민연금제도는 노령·사망·장애 등의 사고에 대비하고 동시에 평균수명보다 더 오래 살게 살 장수위험에 대비한 보험제도다. 이에 반해 퇴직급여는 후불임금(지연된 임금)으로 공로보상적인 저축제도다(③). 부담은 국민연금은 근로자와 사업주가 공동으로 절반씩 부담하지만 퇴직급여는 후불임금이기 때문에 사업주만 부담한다(④).
그리고 국민연금은 재평가제도를 통해 연금을 수급하기 시작할 때부터 노후의 실질소득을 보장하고 이후에는 매년 물가상승률을 적용하여 노후의 실질소득을 보장한다. 따라서 종전소득에 대한 소득 대체율을 계산할 수 있다. 이에 반해 퇴직급여는 재평가제도도 물가슬라이드도 없기 때문에 종전소득에 대한 소득 대체율을 계산할 수 없다. 단지 납부한 기여금 총액과 퇴직급여 총액 사이에 보험 수리적 균등관계가 확보되도록 약정했던 운용이율을 적용할 뿐이다(⑤,⑥,⑦). 이것도 높은 수수료를 떼고 나면 실질적으로 남는 게 없다(⑨).
보장기간도 국민연금은 종신으로 보장하며 유족연금의 형태로 계승되지만 퇴직급여는 기간을 정해 지급하고 본인이 사망하면 계승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퇴직급여에 소득공제를 주는 것은 제도 가입을 장려하는 취지도 있지만 국민연금의 소득 재분배에 참가한 중간층 이상의 소득자에게 일정의 범위 내에서 주어지는 혜택으로 생각해야 한다. 따라서 이러한 우대 조치를 '부자 우대'라고 비판하면서 폐지하자라는 주장은 소득재분배 기능과 사적 연금의 역할 분담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에 나온 거라고 봐야 한다.
이상에서 살펴봤듯이 목적과 기능 역할 등에서 퇴직급여와 국민연금은 확연한 차이가 있어 서로가 대체관계라기 보다는 보완관계로 바라봐야 문제를 풀 수 있다. 그럼에도 최근 재정재계산 논의과정에서 보여지는 퇴직금 전환제의 부활 주장은 다시 원점에서 재검토 되어야 한다.
OECD가 발행하는 'Pensions at a Glance'(연금 한눈에 보기)에서는 공적 연금의 소득 대체율이라는 개념에 사적 연금도 포함된 수치가 기재되긴 한다. 그런데 사적 연금에 모든 사람이 가입할 수 있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사적 연금에 근로자의 40% 이상이 가입해 있다는 이유만으로 사적 연금을 포함한 소득 대체율을 계산하여 공표하는 것은 상당히 부적절하다.
스웨덴이나 네덜란드에서는 사적 연금이 근로협약 체결 시 모든 근로자를 가입 대상으로 하여 소득비례연금의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기 때문에 사적 연금을 포함해서 계산하는 것은 일정 정도 의미가 있을지 모르지만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사적 연금에 저소득층이 가입할 수 없기 때문에 사적 연금을 포함한 소득 대체율을 계산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신중히 판단할 필요가 있다. 앞서 설명한 것처럼 퇴직급여는 임금이나 물가에 연동하지 않아 임금에 대한 소득 대체율을 계산하면 논의가 산으로 갈 수 있다(독일 리스터연금 제외).
퇴직급여는 노동시장과 공적 연금의 '가교역할'에 집중하자
▲ 퇴직급여의 역할 퇴직급여의 역할 |
ⓒ 정재철 |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2021년 기준 만 55세 요건을 충족해 퇴직연금 수급을 개시한 계좌 중 95.7%가 일시금을 선택했다. 연금 수령을 선택한 비중은 5%도 채 안 된다. 실제로 퇴직급여에 대한 국민의 수요는 변함없이 '일시금'이다. 만일 연금으로 강제하려고 일시적으로 국고지원 등의 방법을 쓴다고 해도 연금 수령 선택이란 새로운 수요가 창출될 것 같지도 않다.
중요한 것은 100세 시대의 워크라이프를 생각하면 보다 더 오랫동안 취업활동을 하고 정년 후에는 재고용 등의 형태로 낮아진 임금을 퇴직급여가 보충하면서 공적 연금으로 바통을 건네 줄 수 있어야 한다. 100세 시대에는 가급적 연기연금으로 높아진 소득 대체율을 통해 장수 리스크에 대비하도록 해야 한다. 이것이 공적연금과 사적연금 간의 역할 재정립이다. 지금 같은 일시금이 수령이 아닌 5년 연금, 10년 연금 등의 형태로 수급하도록 유도하기 위해서라도 공사의 역할 정립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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