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은 당연한 걸까? 도발적 질문 던지는 '가족각본'
김홍규 2023. 8. 22. 15:51
'선량한 차별주의자' 쓴 김지혜 교수의 신작
수많은 사회학, 교육학 연구들이 학업성취와 보호자의 경제적·문화적 자본이 연계되어 있다고 반복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굳이 이런 연구 결과가 아니더라도, 주변을 잠깐만 봐도 쉽게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미 벌어진, 바뀌지 않는 결과만을 좁히기 위해선 애를 쓰면서, 근본 원인을 해결할 제도와 사회를 만들려는 노력은 하지 않았던 것 아닐까.
하지만 이들도 가정의 경제 환경 변화에 따라 가족 구성원의 삶은 크게 출렁일 수 있다. 한국 사회는 사람들이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사회 안전망'은 거의 없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도대체 누구와 무엇을 위해 지금과 가족 제도가 필요한 것일까. 한국 사회는, 가족을 사람들이 함께 생활하는 돌봄과 생계 공동체로 여기고 있기는 한 것일까? 그토록 늦게 변한다는 교육 분야에서조차 개인 '맞춤형'을 강조하는데, 다양한 형태와 상황에 처한 가족에 대해서 우리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비장애인 605명이 참여했는데, 그 가운데 70%가 ①번 '예'를 골랐다고 한다(책, 83쪽). 나의 망설임 속에도, "결혼은 안전한 자녀의 출산과 양육을 위한 전제조건(56쪽)"이라는 오래된 편견이 큰 역할을 했다.
'태생적 불평등'의 고리 끊으려면
한편, 한국 사회를 휩쓴(여전히 휩쓸고 있는) '수저론'과 '헬조선'은 선택 불가능한 출생과 가족 상황이 '계층 불평등'을 생산하는 주요한 출발 가운데 하나임을 보여줬다. 'MZ 세대'라는 표현은 사람들에게 쉽게 스며들 수 있는 요소를 많이 갖고 있지만, 한편으론 불평등을 은폐하는 용어이기도 하다.
현대 국가는 개개인을 돌볼 책임과 의무가 있다. 이것은 오래된 법적 약속이다. 우리 헌법도 마찬가지다. 달리 말하면, 개인은 돌봄을 받을 권리가 있고 국가는 이를 돌볼 의무가 있다. 만약 국가라는 공동체가 구성원을 돌볼 수 없다면, 지금처럼 돌봄의 책임이 가족 단위나 개인에게 떠넘겨지는 사회에서 '태생적 불평등'의 세습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김홍규 기자]
▲ 책 <가족각본> 표지 <선량한 차별주의자>를 썼던 김지혜가 <가족각본>이라는 새로운 책을 펴냈다. |
ⓒ 창비 |
<선량한 차별주의자>를 썼던 김지혜 교수(강릉원주대학교 다문화학과)가 <가족각본>이라는 새로운 책을 펴냈다. 앞서 출판했던 책에서 그는 마치 탐정처럼, 사소해 보이지만 우리 사회의 개인과 사회가 보여준 차별과 혐오, 불평등을 끝까지 쫓아가는 모습을 보여줬다.
새 책에서도 이런 그의 '탐정' 기질은 잘 드러났다. 잘 쓰여진 추리 소설 같다. 이번 범죄 현장은 우리가 흔히 만나고 누구도 예외 없이 연관되고 마는 '가족'이다. "가족이 견고한 각본 같다는 생각을 한다"(책, 9쪽)는 첫 문장부터 심상치 않다.
'가족'과 '각본'은 '선량'과 '차별'의 연결만큼이나 쉽게 만들지 않는 단어 조합이다. 책을 끝까지 읽고도 계속 이 문장이 남았다. 결국 이상하지만 매우 인상적이고 좋은 시작인 셈이다.
너무나 익숙했던 단어, '가족'
항상 너무 가까이 있고,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들에 함정이 있기 마련이다. 처음부터 자연스러운 것은 없다. '가족'도 분명 그랬을텐데, 나는 심각하게 생각해 본 적이 별로 없었다. 가끔 아들들에게 농담 반 진담 반으로 한두번 "남자 애인 데려와도 돼"라고 말해 본 정도다.
"가족은 태어날 때부터 정해지는, 개인이 선택할 수 없는 것으로 여겨지곤 한다. 그렇기에 가족제도의 불합리함과 그로 인한 불평등은 개인의 책임이나 운으로 돌려진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기에는 우리 삶에서 가족은-당신이 누구를 떠올리든, 그 의미가 무엇이든-너무 중요하지 않은가. 그러니 우리가 붙들고 있는 '가족'이 무엇인지 우선 들여다보면 좋겠다." (책, 14쪽)
수많은 사회학, 교육학 연구들이 학업성취와 보호자의 경제적·문화적 자본이 연계되어 있다고 반복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굳이 이런 연구 결과가 아니더라도, 주변을 잠깐만 봐도 쉽게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미 벌어진, 바뀌지 않는 결과만을 좁히기 위해선 애를 쓰면서, 근본 원인을 해결할 제도와 사회를 만들려는 노력은 하지 않았던 것 아닐까.
보호자의 문화적·경제적 자본이 풍부하고, 또 관심을 쏟을 충분한 시간적 여유가 있는 청소년들은 자신이 원하는 바를 분명히 알고 꿈을 가지는 경우가 잦다. 게다가 학업성취 수준이 높고 '교양있는 매너'까지 지닌 경우가 많다. 그들은 악을 쓰면서 무언가를 요구하지 않아도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고는 한다.
▲ 다양한 가족, 가정의 모습(자료사진) |
ⓒ 픽사베이 |
하지만 이들도 가정의 경제 환경 변화에 따라 가족 구성원의 삶은 크게 출렁일 수 있다. 한국 사회는 사람들이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사회 안전망'은 거의 없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학교를 포함한 사회 곳곳서 가족 또는 가정은, '블랙박스'처럼 취급된다. 생계 문제를 해결하느라 허덕이고 있는 보호자는, 자녀를 위해 학교에 무언가를 요구할 시간과 기력조차 없다. '가족'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크게 관심을 두지 않고, 혹 관심을 갖더라도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 데다 '세계 최저 수준의 저출생'이 문제라며 나라가 들썩이지만, 정작 그 출발인 가족 문제를 말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가족이 사람을 재생산해서 공급하는 공장도 아닐 텐데 말이다.
"'우수 인력을 양성'한다는, 생각해보면 인간을 도구적으로 바라보는 이 섬뜩한 언어에 우리는 익숙하게 길들여졌고, 가족 역시 그러한 목표를 향해 (어쩔 수 없이) 달려가며 살아왔다." (책, 208~209쪽)
도대체 누구와 무엇을 위해 지금과 가족 제도가 필요한 것일까. 한국 사회는, 가족을 사람들이 함께 생활하는 돌봄과 생계 공동체로 여기고 있기는 한 것일까? 그토록 늦게 변한다는 교육 분야에서조차 개인 '맞춤형'을 강조하는데, 다양한 형태와 상황에 처한 가족에 대해서 우리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2018년 국가인권위원회가 '장애인 모·성권 증진을 실태조사'를 했다고 한다(책, 82~3쪽). 다음 질문은 그 가운데 하나다. 나는 한참을 망설인 후에야 선택했는데, 여러분은 몇 번을 골랐는지 궁금하다. 어떤 결과가 나왔을까?
"직접 양육이 어려운 장애인 부부는 임신이나 출산을 하지 않는 것이 더 낫다고 본다."
① 예 ② 아니오
(책, 82쪽)
비장애인 605명이 참여했는데, 그 가운데 70%가 ①번 '예'를 골랐다고 한다(책, 83쪽). 나의 망설임 속에도, "결혼은 안전한 자녀의 출산과 양육을 위한 전제조건(56쪽)"이라는 오래된 편견이 큰 역할을 했다.
가족이 서로를 돌보는 '작은 공동체'여야 함에도 우리는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정상가족'이라는, 현실에 존재하기 어려운 '환상 속 가족'을 만들어 놓고 "정상과 비정상을 구분"했다(67쪽). 제도를 바꾸고 사회를 변화시키려 노력하기 보다는 '이념형 가족'에서 벗어난 이들을 '일탈자'로 탓하기만 했다.
가족을 포함한 모든 공동체는 평등을 전제로 운영돼야 한다. 그럼에도 한국 사회는 책 <가족각본>이 여러 곳에서 지적하듯 '성별 분업 구조'를 전제로 한다. 겉으로는 성 불평등이 사라졌다고 말하지만 각종 통계는 아직도 '양성 평등'조차 이루어지지 않고 있음을 다양하게 보여준다. 남녀가 아닌 n개의 성별은 접어두고서라도 말이다.
"여성의 경력단절 현상은 대졸 여성에게도 나타난다. 2019년 보건사회연구원이 7년차 이내 신혼부부(19~49세)를 대상으로 '청년세대의 결혼 및 출산 동향에 관한 조사 연구'를 실시했다. 연구 결과, 대졸 여성 가운데 결혼 당시 일자리가 있는 경우가 67.7퍼센트였는데 조사 시점에서는 44.0퍼센트로 줄었다. 대졸 남성은 결혼 당시 일자리가 있는 경우가 82.7퍼센트였고 조사 시점에도 80.8퍼센트로 비슷하게 유지된 것과 차이가 있었다." (책, 157쪽)
▲ 여성 노동자. 책 <가족각본>이 지적하듯 한국 사회는 ‘성별 분업 구조’를 전제로 한다. |
ⓒ pixabay |
'태생적 불평등'의 고리 끊으려면
우리는 지난 IMF 외환 위기, 코로나 상황을 겪으면서 두드러지게, 또 일상적으로도 특정 성별이 생계를 책임지는 가족제도가 얼마나 허약한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교육과 사회는 가족 제도의 변화가 아닌 '인구 정책'을 주로 이야기한다. 다양한 가족을 인정한다면서도 제한을 두거나 은근슬쩍 '해체'나 '위기'를 덧붙인다.
"역사적으로 가족은 상이한 생변화에활조건 속에서 다양한 형태로 구성되어왔다. … '위기'와 '해체'의 담론은 공포를 조장하고 과거로 회귀하게 만든다. 반면 '변화'와 '다양성'의 담론은 유연하게 대처하여 새로운 제도를 만들게 한다."(책, 188쪽)
한편, 한국 사회를 휩쓴(여전히 휩쓸고 있는) '수저론'과 '헬조선'은 선택 불가능한 출생과 가족 상황이 '계층 불평등'을 생산하는 주요한 출발 가운데 하나임을 보여줬다. 'MZ 세대'라는 표현은 사람들에게 쉽게 스며들 수 있는 요소를 많이 갖고 있지만, 한편으론 불평등을 은폐하는 용어이기도 하다.
"지금 한국사회의 저출생이 국가적 위기라면, '인구'가 줄어서가 아니다. 웬만해서는 사람이 태어나 살 수 있는 땅이 아니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다양한 돌봄의 공동체가 시간과 마음을 나누며 행복하게 살아가기 어려운 사회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책, 210쪽)
현대 국가는 개개인을 돌볼 책임과 의무가 있다. 이것은 오래된 법적 약속이다. 우리 헌법도 마찬가지다. 달리 말하면, 개인은 돌봄을 받을 권리가 있고 국가는 이를 돌볼 의무가 있다. 만약 국가라는 공동체가 구성원을 돌볼 수 없다면, 지금처럼 돌봄의 책임이 가족 단위나 개인에게 떠넘겨지는 사회에서 '태생적 불평등'의 세습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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