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캐는글쓰기] '익명의 시민'이 비치한 호신용품, 이게 말해주는 것
글쓰기 모임에서 만나 시민기자가 된 그룹. 70년대생 동년배들이 고민하는 이야기를 씁니다. <편집자말>
[이정은 기자]
인천에 살고 있는 나는 거주 지역을 벗어나 움직이는 날엔 대부분 승용차를 이용하는 편이지만, 목적지가 서울이면 고민 없이 대중교통을 탄다.
버스를 타고 전철을 타면서 길에서 소비하는 시간은 결코 적지 않아도, 그동안 버스 안에서 혹은 전철 안에서 읽는 책이나 듣는 음악은 평소와는 조금 다르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일상에서는 꺼두고 지내는 감성 버튼에 불이 들어오는 기분이랄까.
며칠 전 서울에 일이 있어 여느 때처럼 읽을 책과 이어폰을 가방에 챙겨 넣었다. 책을 펼쳤지만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이어폰을 귀에 꽂고 음악을 들으려 해봐도 마찬가지다. 왜일까.
▲ 지하철. |
ⓒ unsplash |
불안감 때문이었다. 언제 어디에서 발생할지 모르는 사건에 조금이라도 빠르게 대응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마음. 그 불안감에 읽으려던 책도, 음악을 들으려 꺼냈던 이어폰도 다시 가방에 넣고 말았다.
용산행 급행열차를 타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무렵, 어떤 사람이 한 손에는 정체 모를 흰색 물건을 들고 있었고, 다른 한 손으로는 음료수 병을 들고 마시며 내가 앉아있는 칸의 끝에서 끝까지를 수차례 왕복하고 있었다. 노래를 부르는 건지, 그저 중얼거리는 건지 알 수 없는 소리를 내는 그 사람이 내 앞을 한 번씩 지나갈 때마다 내 마음의 불안은 점점 더 커졌다.
'저 사람의 손에 들려있는 것이 무기가 되어 나를 공격하면 어떡하지. 손에 들고 있는 음료를 내게, 혹은 내 옆의 사람에게라도 뿌리면 어떡하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나뿐만 아니라 앉아 있는 다른 승객들 역시 미세한 표정 변화와 함께 눈으로 조심스레 그 사람을 쫓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사람은 그저 마음이 조금 불편하거나 다른 사람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공공 장소라는 것을 인지해 일반적인 상식에서의 행동이 아닌,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 혼자만의 놀이를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 사람으로 인해 어떠한 사건이 발생되는 것보다 사회적 불안에 편승해 내가 괜한 편견을 가질 확률이 훨씬 더 높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러나 가슴속에서 서서히 자라고 있는 불안감은 머리로 인지하는 것과는 달리 그 몸집을 빠른 속도로 키워나가고 있었다.
용산에 도착하기 전 어느 역에서 모두의 이목을 집중시키던 그는 내렸다. 눈덩이처럼 커져버린 내 불안은 조금씩 다시 작아지고 있었다. 그러나 특정되지 않은 누군가로부터 발생될 수 있는 사건에 대한 불안마저 사라지진 못했다. 더불어 타인에 대한 경계심이 이토록 고조될 수 있다는 것에 몹시 씁쓸해졌다.
▲ 맥북과 장갑 낀 손. |
ⓒ unsplash |
그동안의 나라면 이와 같은 상황에서 지금처럼 불안을 느꼈을까.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 있어 타인과의 소통이 수월하지 않은 그를 측은지심으로 바라볼 필요까지는 없더라도, 불편한 눈을 하고 만에 하나 발생할지 모르는 일을 머릿속으로 상상해가며 불안에 떨지는 않았을 거다. 아니, 그보다 준비해 간 이어폰을 통해 좋아하는 음악을 듣거나 책 속에 시선을 뒀겠지. 그게 내 일상 속 모습이니까.
매일같이 대중교통을 이용해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길 위에서 출퇴근을 하는 사람들을 생각한다. 불특정 다수를 향한 사건과 사고는 비단 출퇴근이 아니어도 저녁을 먹으러 가다가, 가볍게 산책을 나섰다가, 쓰레기를 버리러 나갔다가... 그렇게 일상을 살아내는 그 어디에서도 일어나고 있다. 범죄의 대상이 바로 내 친구, 내 가족 그리고 내가 될 수도 있다는 얘기다.
하루가 멀다하고 차마 입에 담기도 힘든 범행이 벌어지고 있다. 원한 관계도 아니고 면식범도 아니다. 그저 나 혼자만 불행한 게 싫어서,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은 모두 즐거워 보여서, 그저 강간하고 싶어서, 혹은 아무런 이유도 없이 닥치는 대로 누구에게라도 분풀이를 하듯이 범행을 한다.
그리고 그런 불안감을 이용해 마치 게임을 하듯 범행을 예고하는 글들이 쏟아지고 있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전철역, 공연장, 특정 지역, 특정 대상 등을 거론하며 사람들의 불안을 관심으로 착각한 사람들. 그런 예고를 그저 묵인할 수만은 없으니 경찰이 투입되고, 적지 않은 시간을 수사하고, 사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것에 안도하는 일이 반복되고 있다. 그러나 그 안도는 이내 분노로 바뀌게 된다.
▲ 흉기 난동과 살인 예고 온라인 게시물로 국민 불안감이 커지는 가운데 지난 6일 오후 서울 강남역 인근에서 경찰특공대원들이 순찰하고 있다. |
ⓒ 연합뉴스 |
오늘도 뉴스는 정치권의 이슈로 시끄럽다. 하지만 어디에서도 국민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한 논의는 보이지 않는다. 국민을 대표하겠다고 나서서는 '국민'이 안전하게 살 방법이 아닌 '개인'의 안전을 위한 싸움을 하고 있다.
누군가는 실질적으로 있어서는 안 될 사건의 피해자가 됐다. 그런 피해자와 피해자의 가족들이 받은 상처, 쏟아지는 사건에 일상이 흔들리고 있는 국민은 보이지 않는지를 묻고 싶다. 개인 호신용품의 판매량이 늘고 있다는 것이 무얼 의미하는지 부디 알아주기를 바란다.
각자도생(各自圖生). 각자가 스스로 제 살 길을 찾는다는 뜻의 사자성어가 떠오른다. 일상을 살아가는 삶의 영역 안에서마저도 불안감을 느껴야만 하는 불편하고 불안한 현실이 퍽 슬프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어제와 같은 일상을 살아낸 것에 감사하며 안녕을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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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이정은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와 브런치에 게재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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