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온기, 두 여자가 깨닫게 된 집밥의 의미

조영준 2023. 8. 22. 1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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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넘버링 무비 286] 인디그라운드 독립영화 라이브러리 <국물은 공짜가 아니다>

[조영준 기자]

 
 영화 <국물은 공짜가 아니다> 스틸컷
ⓒ 인디그라운드
* 주의! 이 글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01.
언제부터 하루 세끼를 매일 챙겨 먹지 못하게 되었는지를 생각해 본다. 아마도 가족의 품을 떠나 혼자 나와 살기 시작하면서가 아닐까? 지금 떠올려 보면 아침마다 식탁 위에 차려져 있던 그 밥상이 보통의 수고와 노력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겠다 싶다. 물론 그때는 그 고마움을 조금도 알지 못했지만. 무엇이든 그렇다. 다른 사람에 의해 만들어진 것을 이제 내가 만들어야 할 때가 되면, 겉으로 보이는 것 말고 그 안에 담겨 있는 다른 무형의 것들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한다. 우리를 이만큼 자라게 한 것도 그 식탁 위에 놓여 있던 눈에 보이지 않는 무엇이 아닐까. 영양학적인 요소만큼이나 넘치도록 담겨 있었을 사랑.

영화 <국물은 공짜가 아니다>에는 볶음면 가게를 운영하면서도 자신의 한 끼는 제대로 챙겨 먹을 줄 모르는 수민(나애진 분)이 등장한다. 아침은 피곤해서 건너뛰고, 점심은 인스턴트 음식으로 대충 때우고, 저녁은 밤늦은 시간 영업이 끝나고 나서야 가게 한쪽에서 볶음면 한 그릇을 겨우 챙겨 먹는 생활의 연속. 딱히 스스로는 그 삶에 큰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삶의 온기라고는 식당 부엌의 화롯불만큼도 되지 않는 역시 조금은 안타까운 삶이다. 영화는 유정(김차윤 분)이 그 자리를 비집고 들어오면서 조금씩 변하기 시작한다. 어떻게든 집밥을 직접 만들어먹는 그녀로 인해 수민의 표정과 시간이 달라지기 시작하고, 그 모습은 다시 영화의 전체적인 분위기마저 바꾸어 놓는다. 국물이 공짜가 아니라고 외치는 이 영화에는 사실 집밥에 숨겨진 타인에 대한 사랑과 마음이 놓여있다.

02.
영화는 어두침침한 가게를 찾은 손님과 실랑이 중인 수민의 모습으로 시작된다. 술에 취한 듯한 손님은 속이 불편한 모양인지 국물이 있는 국수 요리를 찾지만, 그녀는 냉정한 표정으로 가게 한 편의 안내문을 가리킨다.

'국물은 없습니다.'

볶음면을 전문으로 하는 가게라서 국물이 없다는 말이다. 코팅까지 해서 써붙여둘 정도이니 평소에도 국물을 찾는 손님이 꽤 많았던 모양이다. 이내 다시 또 말다툼이 이어진다. 들어온 김에 정수기 물 한 컵만 달라는 손님에게 요리를 주문하지 않은 손님은 물도 돈을 내고 마셔야 한다는 수민. 자신이 운영하는 가게의 규칙이 그렇다는 것이니 손님도 할 말은 없을 테지만, 어쩐지 조금은 야박하고 깐깐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늦은 밤 가게 문을 닫고 집으로 돌아온 수민은 이제 막 룸메이트가 된 유정에게도 냉랭한 태도를 유지한다. 함께 살게 되었으니 인사도 하고 앞으로 잘 지내자는 그녀에게 자신은 매일 이렇게 늦게 들어올 것이니 몇 가지만 주의해 달라고 고지하고는 방으로 들어가 버린다. 영화의 시작점에 놓인 단 두 개의 장면뿐이지만, 수민이 어떤 종류의 인물인지는 대충 감이 오는 듯하다. 억척같고 인정이 없으며 타인을 자신의 곁에 두고 싶어 하지 않는 종류의 사람. 그런 사람이 운영하는 가게의 분위기가 밝고 따뜻할 리 없다.

그런 그녀와 함께 살게 된 유정은 그럼에도 꽤 살갑고 친근하려고 애를 쓴다. 수민이 불편한 기색을 온몸으로 드러내도 아랑곳하지 않고 두 사람 사이의 거리를 좁혀보려고 노력하는 모습. 딱 봐도 인스턴트식품만 먹고 끼니를 잘 챙기지 못하는 수민을 자신의 밥상에 굳이 같이 앉히려는 것 역시 그 노력의 일환이다. 아니 사실은, 애를 쓰고 노력하는 모습이라기보다는 너무 당연한 것을 수민이 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듯 알려주려는 모양새다. 집밥을 꼭 먹어야 하는 이유도, 우리가 함께 살아가야 하는 이유도.
 
 영화 <국물은 공짜가 아니다> 스틸컷
ⓒ 인디그라운드
03.
일반적으로 영화의 극에서 인물은 빼놓을 수 없는 요소 중에 하나이지만, 이 작품에서는 조금 더 중요하게 다뤄지는 부분이 있다. 극의 전체가 어떤 대가를 바라는 인물과 그렇지 않은 인물의 대립으로 지지되고 있기 때문이다. 표면상으로 드러나는 것은 역시 수민과 유정 두 사람이다. 극 중에 직접 등장하고 있는 인물이기도 하면서 결합을 통해 입체적 변화를 보여주는 인물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극에서 더 중요한 인물은 두 사람의 기저에 존재하는 두 엄마다. 간접적으로 제시되는 엄마의 행동은 두 딸이 현재의 모습을 하게 된 직접적인 근거가 되며 조금 전 이야기했던 이 극을 지지하고 있는 대립의 씨앗이 된다.

자신이 키워준 비용을 정산해 갚으라고 말하는 수민의 엄마는 대가를 바라는 쪽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수민이 자신의 청춘을 볶음면 가게에 쏟아부으며 악착같이 돈을 버는 이유가 된다. 심지어는 그녀의 엄마는 때마다 돈을 보내라는 연락이 아니고서는 별다른 감정적 교류를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악독한 모습을 보이는데, 이는 수민이 현재의 모습이 될 수밖에 없는 근거로 기능한다. 한편, 유정의 엄마는 완전히 반대쪽에 놓여 있다. 굳이 먼저 이야기하지 않아도 집을 나가 살고 있는 딸의 끼니를 걱정하는 마음으로 반찬과 먹을거리를 챙겨 보내는 인물. 수민의 엄마가 수민을 키웠듯이 자신 역시 유정을 키워왔지만, 그에 대한 대가를 바라기는커녕 지금 가까이에서 조금 더 해주지 못하는 것을 아쉬워하고 있다는 걸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서로 다른 엄마의 모습과 가정환경에서 수민과 유정 역시 완전히 다른 모습을 하며 살아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 그런 두 사람이 룸메이트가 되어 한 집에서 함께 생활하게 되는 설정은 집밥의 온기를 경험하며 살아온 사람에 의한 그런 온기를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의 변화에 대한 이야기로 자연스럽게 이어지게 된다.

04.
영화 전체의 분위기가 다소 어둡고 차가웠던 쪽에서 따뜻한 분위기로 변하는 이유는 그 시선이 수민의 내러티브를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 전체가 수민의 내면과 거의 일치한다고도 볼 수 있는데, 그녀의 내면을 채우는 온기의 크기만큼 영화의 분위기 역시 바뀌어간다. 그 과정 속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역시 유정의 집밥이다. 밥을 얻어먹었으니 값을 치르겠다는 수민의 말에 집밥에 무슨 돈을 주고받냐고 일갈하는 그녀는 말라있던 수민의 마음에 온기를 채우는 존재가 된다.

유정의 집밥은 자신이 자라온 환경 속에서 엄마로부터 받은 사랑과 애정을 의미하는 대상이며, 반대로 수민은 가질 수 없었던 대상이기도 하다. 그동안 채울 수 없었던 내면의 온기와 성장의 발판을 유정을 만나고 난 후에야 마련할 수 있게 되는 셈이다. 같은 맥락에서 아무런 비용도 받지 않고 수민이 만들어주는 볶음면만 먹으며 배달일을 돕고, 또 오랜 친구로 곁을 지키는 태웅도 그녀가 최소한의 인간성을 잃지 않도록 하는 장치다. 다만 유정이라는 인물이, 그리고 그녀의 집밥이 조금 더 적극적이고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칠 뿐이다.

이 과정에서 조금씩 변화를 보이는 수민이라는 인물의 표정과 행동을 포착하고 이를 전달하기 위해 영화는 온기를 상실한 쪽에서 회복하는 쪽으로의 전개를 택하고 있지만, 사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 영화의 배경에는 곳곳에 온기가 놓여있음을 알 수 있다. 지난밤 잃어버렸던 자전거를 찾아주며 귤 세 개를 바구니에 담아주는 이름 모를 아저씨의 마음이 이 이야기 속에 존재하는 대표적인 따뜻함 가운데 하나다.
 
 영화 <국물은 공짜가 아니다> 스틸컷
ⓒ 인디그라운드
05.
"야 너 이제 빚 없잖아. 돈이야 이제 벌면 되는 거고. 돈 벌자."

영화의 끝자락에서 태웅은 여전히 마음을 모두 열지 못하는 수민에게 이제 누군가에게 갚을 돈이 아닌 자신의 돈을 함께 벌어보자고 손을 건넨다. 그 곁에는 유정도 함께다. 여전히 조금은 불편하지만 두 사람의 도움을 못 이기는 척 받아들이는 수민. 두 사람의 월급을 아직은 제대로 챙겨줄 수 없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요리 실력을 발휘해 따뜻한 국물이 담긴 국수를 내민다. 어쩌면 앞으로 그녀의 볶음면 가게에서 정식으로 판매하게 될지도 모르는 메뉴다.

세 사람이 함께 앉은 가게의 테이블 위로 따뜻한 국물의 온기가 피어오른다. 오로지 볶음면만 팔던 가게에서 국물이 함께인 국수가 판매되는 것이 성장의 한 모습이라고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하나의 음식만 만들던 셰프가 이제 하나의 음식을 더 만들 수 있게 된 것은 분명 성장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뿐만이 아니다. 함께 음식을 먹는 일의 의미도 깨닫게 되었고,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자리를 내어주는 일의 소중함도 알게 되었고, 무엇보다 이제부터는 자신의 내일을 그려나갈 수 있게 되었으니 이제부터의 수민은 분명 어제와는 다를 것이 분명하다.

수민의 가게에서 국물은 여전히 공짜가 아닐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이제 국물이 먹고 싶은 손님도 이 작은 가게에서 온기를 안고 집으로 향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과 앞으로 이 공간에 세 사람이 함께일 것이라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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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작품은 영화진흥위원회에서 설립한 인디그라운드(Indieground)의 독립영화 라이브러리 열네 번째 큐레이션 ‘내일도 만날 너와 나’ 중 한 작품입니다. 오는 2023년 8월 30일까지 인디그라운드 홈페이지를 통해 무료회원가입 후 시청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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