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생자에 '부역 등급 표시'? '멸공의 시대'로 돌아가자는 건가
[서부원 기자]
▲ 27일 경북 칠곡군 다부동 전적기념관에서 열린 '이승만·트루먼 대통령 동상 제막식'에서 시민들이 동상 앞에서 기념사진을 남기고 있다. |
ⓒ 연합뉴스 |
얼마 전 경북 칠곡의 6.25 전쟁 다부동 전적지에 세 사람의 동상이 세워졌다. 그곳에서 북한 공산군의 공세를 막아낸 '전쟁 영웅' 백선엽 장군과 함께 두 사람의 동상이 조연인 양 마주하고 있다. 이승만 전 대통령과 당시 미국의 대통령이었던 트루먼을 기리는 동상이다(아래 인물의 직함은 생략).
백선엽은 그렇다 해도, 별 상관도 없는 두 사람의 동상까지 그곳에 한데 세워놓은 건 뜬금없다. 애꿎은 트루먼에게까지 경의를 표하는 건 당황스럽기까지 하다.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킨 또 한 명의 '전쟁 영웅' 맥아더를 해임한 게 그 이유라면, 한반도에 원자탄 투하를 막은 공로라고 받아들여야 하나.
황당하기는 이승만의 동상도 마찬가지다. 4.19 혁명 때 시민들이 무너뜨린 그의 동상을 다시 일으켜 세운 꼴이 됐다. 부정선거를 저지르고 국민에게 총부리를 겨눈 독재자가 윤석열 정부에 의해 사면 복권됐다는 해석이 나온다. '4.19 민주 이념을 계승한다'는 헌법 정신도 부정된 모양새다.
이승만이 '역사상 최악의 대통령'으로 꼽히는 이유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미래세대 아이들의 이승만에 대한 평가는 현 정부의 그것과는 하늘과 땅 차이다. 아이들은 주저 없이 1980년 광주학살로 권력을 찬탈한 전두환과 더불어 이승만을 대한민국 역사상 최악의 대통령으로 손꼽는다. 다른 독재자들과 '차원'이 다르다는 이유를 댄다.
아이들이 이구동성 말하는 이승만의 대표적인 과오는 무엇일까. 교과서에서는 3.15 부정선거와 정권 연장을 위한 발췌 개헌과 사사오입 개헌, 정적 제거를 위한 진보당 사건 등에 비중을 둔다. 해방 직후 친일파를 중용하고 반민특위를 강제 해산한 것도 결코 빼놓을 수 없다.
그런데, 아이들이 매기는 순위는 사뭇 다르다. 이승만의 노회한 권력욕에 기인한 사달에 대해선 비교적 관대하다. 일제강점기 국제연맹에 위임 통치를 청원한 사실이 드러나며 임시정부 대통령직에서 탄핵당하고, 해방 직후 38도선 이남에서의 단독 정부 수립을 주장한 것까지도 '정상참작'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들이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는 건, 그가 6.25 전쟁이 발발한 직후 한강 철교를 폭파한 것과 석 달 뒤 서울 수복 후 부역자를 색출해 처형했다는 점이다. 교과서에는 일언반구도 없는 내용이지만, 이 사실을 모르는 아이는 없다. 미군의 폭격을 받아 파괴된 평양의 대동강 철교의 교과서 사진을 한강 철교로 오해하는 경우가 태반인 것도 그래서다.
뒤늦게 피난길에 나선 숱한 민간인들이 다리를 건너고 있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음에도 폭파를 강행했다는 건, 이승만 정권의 야만성을 증명한다고 잘라 말했다. 당시 천 명 가까운 피난민이 폭사했다고 추정하는데, 정확한 공식 통계는 없는 상태다. 하나뿐인 다리가 끊겨 피난하지 못한 서울시민들은 공산군 치하에서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했다.
한강 철교를 갑작스럽게 폭파한 건 북한 공산군의 남하 속도를 늦추기 위해서였다. 그저 이승만의 피난에 시간을 벌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다는 해석마저 나온다. 전쟁이 터지자 이승만은 대구까지 퇴각했다가 너무 멀리 갔다는 비난이 쏟아지자 다시 대전으로 되돌아왔다는 건 모두가 익히 아는 '웃픈' 역사다.
게다가 그는 서슴없이 거짓말까지 했다. 서울 함락이 눈앞에 닥친 긴박한 상황인데도, 우리 국군이 공산군의 침략을 막아내고 있다며 걱정하지 말고 생업에 종사하라는 대통령의 훈시를 서울시민들에게 내보냈다. 거짓 방송을 녹음한 곳도 서울이 아닌, '임시 수도' 대전이었던 걸로 알려져 있다.
공산군이 파죽지세로 남하하자, 이승만은 대전에서 기차를 이용해 목포까지 간 뒤 배편으로 부산에 이르렀다. 전쟁이 끝나고 1953년 여름 정전협정이 체결될 때까지 부산은 대한민국 정부의 공식 수도 역할을 했다. UN군이 참전한 후 그가 '북진통일'을 부르댄 곳도 '안전한 후방' 부산이었다.
전쟁이 한창이었던 부산 피난 시절에도 그의 권력에 대한 집착은 조금도 누그러지지 않았다. 이승만은 재선을 위해 느닷없는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공권력을 동원해 야당 국회의원을 폭행하고 감금하는 만행까지 저지르며 개헌을 강행한다. 이른바 '부산 정치파동'으로, 오로지 장기집권을 위해 국민의 안위를 내팽개친 흑역사로 남았다.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며 전세가 뒤바뀐다. 9월 28일 서울이 수복된 후 여세를 몰아 북진을 감행했고, 남쪽에 고립된 공산군들의 대대적인 토벌에 나섰다. 동시에 부역자 색출이 진행되어 전국 각지에서 숱한 민간인들이 우리 국군과 경찰의 손에 학살됐다.
서울도 예외는 아니었다. 서울이 수복되자마자 이승만 정부가 가장 먼저 한 일이 부역자 색출 작업이었다. 그들은 다리가 끊겨 어쩔 수 없이 서울에 남았고, 살아남기 위해 공산군의 지시를 따라야 했던 사람들이었다. 피난을 못가 온갖 수난을 겪은 이들을 되레 한강 철교를 끊고 도망간 이들이 치도곤 하는 적반하장의 상황이 전개된 것이다.
당시 부역자 색출을 담당했던 합동수사본부의 통계에 따르면, 부역자로 간주된 이들만 55만여 명이다. 피난하지 못해 남았던 서울시민의 절반에 가까운 엄청난 숫자다. 그중 재판에 회부되어 처형당한 이들만도 수백 명이라고 한다. 그들의 사형을 집행한 곳이 지금의 미아리 고개이며, 1956년에 발표된 <단장의 미아리 고개>는 이를 배경으로 만들어진 노래로 알려져 있다.
물론, 6.25 전쟁 중 부역자 색출과 관련된 내용은 교과서에 거의 언급되어 있지 않다. 인천상륙작전과 서울 수복, 중국군 참전 이후 교착 상태의 지속 등의 내용만 무미건조하게 나열되어 있을 뿐이다. 적어도 교과서를 통해선 3년여의 전쟁 과정에서 공산군과 국군에 의해 무고하게 희생된 민간인들의 존재를 알 수 없다.
아이들은 다른 건 몰라도 이승만이 한강 철교를 폭파하고 이로 인해 피난 못 간 이들을 부역자로 내몰아 처형한 것만큼은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고 말한다. 한 아이는 '인간이기를 포기한 짓'이라며 성토하기도 했다. 국민의 세금으로 그를 기리는 동상이 다시 세워졌다는 걸, 아직 그가 모르는 것 같아 다행스러울 따름이다.
"희생자를 두 번 죽이는 부관참시"
사실 한강 철교 폭파와 서울 수복 후 부역자 색출이라는 이승만의 과오를 떠올린 이유가 있다. 진실화해위원회가 작성한 6.25 전쟁 당시 민간인 희생자 명단에 부역 혐의에 관한 등급을 표시했다는 소식을 접하고서다. 지난 5월 "부역 혐의 희생자 중 부역자를 세심하게 살피겠다"는 김광동 진실화해위원장의 발언이 나온 터였다.
이는 전쟁 당시 충남 태안군 이원면에 살던 주민 35명이 공산군에 부역했다는 혐의로 학살된 사안에 대한 진실규명 보고서를 진실화해위원회가 의결하는 과정에서 드러났다. 부역자 선정 기준은 신뢰도가 의심스러운 과거 경찰 기록이 전부라고 한다. 그것도 정전협정이 체결되고 수십 년이 지난 이후에 작성된 것이어서 진실규명의 의지조차 의심케 한다.
유족들은 "희생자를 두 번 죽이는 부관참시"라며 분노했다. 진실화해위원회가 명확한 근거도 없이 민간인 희생자를 부역자로 낙인찍는 모습을 보며, 동네 어귀마다 '때려잡자 공산당'이라는 표어가 나붙었던 '멸공의 시대'로의 퇴행을 실감한다. 얼마 전 흡사 6.25 전쟁 기념사 같은 윤석열 대통령의 광복절 경축사를 들은 마당에 억측이라고 무지르진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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