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도를 기다리는 밤
[강지영 기자]
▲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 아트원씨어터 매표소에 포스터와 배우의 사진이 걸려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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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 시절, 사무엘 베게트의 책 <고도를 기다리며>를 처음 만났을 때였다. 책 제목의 '고도'가 '古都'인 줄 알았다. 내 곁에 있던 친구는 '高度'일 거라고 말했다. 둘 다 얼토당토않음을 알고 한참을 웃었다. 언어에 대한 편견과 무지는 독서에 걸림돌이 된다. 책의 의미를 잘 이해하지 못한 채 여러 해가 지났다.
기억이 맞다면, 큰딸이 초등학생이었을 때 함께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를 보았다. 초등학생이 이 연극을 이해했을 리가 없다. 나도 큰 감동을 받지 못했다. 그렇게 또 시간이 지나갔다. 최근 연극을 보고 싶어서 검색을 하다가, <고도를 기다리며> 연극 공연이 있음을 알았다. 반가운 마음에 티켓 예매를 했다. 연극을 더 잘 보기 위해 책장에서 책을 빼들었다. 책 속이 깨끗한 걸로 보아 언젠가 읽다 만 것이 틀림없다.
연극이나 영화의 원작이 있는 경우에는 원작을 먼저 찾아 읽는 편이다. 그래야 연극이나 영화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반대로 연극이나 영화를 먼저 보고 책을 읽으면, 독서의 즐거움이 줄어든다. 책을 읽는 동안 연극이나 영화의 장면이 떠올라 상상하는 재미가 덜하기 때문이다. 2004년부터 2005년에 걸쳐 SBS에서 방영한 드라마 <토지>를 본방으로 흥미롭게 시청했다. 그 후 원작 <토지>를 읽으려고 했더니 잘 읽어지지 않았다. 독서하는 동안, 텔레비전에서 봤던 영상이 아른거려 독서에 방해가 되었다. 5년쯤 지난 후에야 정상적으로 책을 읽을 수 있었다.
이런 습관 때문에 이번에도 연극을 보기 전에 책을 읽기로 했다. 사무엘 베게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민음사, 2001). 책 자체가 연극대본이다. 책 앞표지를 넘기면 저자 소개가 있다. 사무엘 베게트는 1906년 아일랜드 폭스로크의 신교도 가정에서 태어났다. 1939년 2차 대전 중 프랑스에서 레지스탕스에 참여했다. 1942년 나치를 피해 남프랑스 보클루주의 농가에 피신하여 작품을 구상하고 집필한다. 1952년 파리에서 <고도를 기다리며>를 출간했다. 추측하건대, 나치를 피해 숨어 살면서 자유와 평화에 대한 갈망을 '고도'로 상정한 것이 아닌가 한다. 20대의 나이에 이해하지 못했던 책 내용을 50대가 되어서야 이해하게 되었으니, 나이 듦이 나쁘지만은 않다. 물론 영민한 사람은 20대에도 깨달을 터이지만.
여름 한낮 기온이 35도를 기록하던 날 오후, 서울 혜화역에 내려서 마로니에 공원을 지나 '아트원씨어터'에 도착했다. 김기하 연출가를 비롯해 연극에 등장하는 배우가 연세가 높으신 분이라서 그런지, 아니면 나처럼 오랫동안 고도의 의미를 몰라 헤매다가 느지막이 온 사람들이라선지, 관객 대부분이 머리가 허옇다. 관객 중 다수가 꽃다발을 준비해 온 것으로 봐서도 연출가나 배우의 또래친구임이 확실했다.
무대 조명이 켜지자, 텅 빈 시골길에 한 그루 앙상한 나무가 서 있다. 거지꼴을 한 늙은 방랑자 한 명이 바위에 걸터앉아 신발을 벗기려고 한다. 애는 쓰는데 잘 되지 않는다. 그 곁에 마찬가지로 누더기 차림의 노인 한 명이 다가온다. 오랜 친구 사이로 보인다. 우여곡절 끝에 신발을 벗는다. 둘은 하나마나한 얘기를 주고받는다. 권태스러운 나날을 보내고 있음을 느끼게 한다. 여러 날을 기다려도 온다던 고도는 오지 않는다. 기다림에 지쳐 앙상한 나무에 목을 매달 생각까지 한다.
부유한 차림의 포조가 자기의 노예를 데리고 나타난다. 늙은 노예는 목줄로 묶여 있다. 노예는 양손에 무거운 짐을 들고 있다. 포조는 노예를 인간 이하로 취급하고 무시한다. 노예는 '자발적 복종'을 하는 듯이 보인다. '모자'를 쓰고 읊어대는 노예의 말은 앞뒤가 맞지 않는 의미 없는 말이지만, 내뱉는 단어들은 뭔가 지식인들이 쓰는 말로도 들린다. 권위에 굴종하게 된 지식인의 약한 모습처럼 보이기도 한다. 포조 또한 의미 없는 장광설로 분위기를 압도하려 하나 두 방랑자는 말려들지는 않는다.
모두가 하나마나한 얘기를 이어가고 있으나 그마저도 하지 않으면 권태로워 죽을 지경이다. 그러면서도 두 방랑자는 고도를 기다린다. 아무리 기다려도 고도는 오지 않는다. 한 소년이 나타나 고도가 올 것이라고 말하지만 고도는 오지 않는다. 소년이 고도가 올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그건 아마도 고도의 존재를 의심하지 않게 하려는 장치가 아닌가 한다.
▲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 무대장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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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무대에서도 한 가지가 반짝인다. 한줄기 희망처럼. 고목에서 싹터 자란 푸른 잎이다. 푸른 잎이 있다는 건 그래도 삶의 끈을 놓지 말라는 위로요 희망이 아닐까. 두 방랑자는 나란히 서서 달을 쳐다본다. 그러면서 막이 내린다.
이제는 알 것 같다. 고도의 의미를. 고도는 어느 한 가지로 정해진 것이 아니라, 사람들 각자가 열망하는 그 '어떤 것'이다. 억압된 자에게는 자유가 고도일 것이다. 굶주린 자에게는 빵이 고도일 터이다. 불안한 삶을 사는 자에게는 평온이 고도일 수도 있다. 절망에 빠져 힘든 삶을 사는 사람에게는 희망이 고도가 아닐까. 창작의 고통에 몸부림치는 예술가에게는 영감이 고도일지도 모른다.
살면서 자기가 간구하는 그것이 고도의 의미라는 것을 깨달았다. 안개가 걷히는 느낌이 든다. 오늘 밤, 기다리던 나의 고도는 오지 않았다. 내일은 올지도 모른다. 오지 않는다 하여도 실망하지는 않으리. 또 그다음 내일이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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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강지영 시민기자의 개인 브런치스토리에도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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