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멜로킹’ 조인성이 다시 멋있어졌다 [홍종선의 캐릭터탐구㊻]
영화 ‘안시성’(2018) 개봉을 전후해 조인성의 태도에서는 자신감을 찾기 어려웠다. 겸손이라고 생각했는데 최근 영화 ‘밀수’와 드라마 ‘무빙’을 보며, 당시 배우 조인성의 고민이 맞았다는 깨달음이 왔다.
서른일곱의 조인성은 양만춘을 연기했다. 불과 5천의 군사로 당나라 20만 대군에 맞서 우리나라 변방을 지켜낸 고구려 장수였다. 장군이기에 앞서 백성을 내 자식처럼 살피는 선한 지도자였고, 젊은 병사를 의심하기보다 넉넉한 품으로 감화시켜내는 어른의 모습을 부족함 없이, 넘치지 않게 잘 표현했다. 흥행 성적도 무려 544만 관객에 이르렀다.
“제가 이 정도 큰 사람, 이 정도 큰 영화를 이끌만한 그릇인지 모르겠어요. 아직 배우로서 갈 길이 먼데요. 너무 일렀던 건 아닌가.”
필자의 생각은 달랐다. 스타 의식 없이 주변을 조용히 품고 챙기는 선한 사람, 여전히 어릴 적 동네 친구들과 모여서 살 부대며 노는 게 제일인 털털한 사람, 독립영화 감독이 연락해도 공손히 응하는 배우이기에 마을의 정신적 지주이면서 촌민들을 지키는 군인이기도 한 문무 겸장의 양만춘을 맡기기에 제격이라고 여겼다. 배우의 인성에 빚진 캐릭터이기에 뽐내지 않고 온화하게 표현한 조인성의 연기에 설득당했다.
500만 명 넘는 관객의 사랑을 받은 배우는 보통 차기작 촬영과 공개가 빠르다. 하지만 조인성은 물 들어올 때 노 젓지 않았다. 흥행 수치로 되돌려지지 않는 배우로서의 고민인가, 혼자 생각했다. 예능은 논외로 하고, 오랜만에 배우 조인성을 본 것은 영화 ‘모가디슈’(2021)였다.
의아했다. 주연도 아니고, 배우 조인성의 최고 장점인 눈빛이나 그를 활용한 멜로도 없다. 인성에 어울리는, 은근하게 선한 역도 아니다. 긴 ‘기럭지’를 활용한 발차기 액션은 있으나 영화 최고의 압도적 장면도 아니다. 뭐지? 현장부터 작품, 흥행까지 모든 것을 책임지려는 ‘부담’을 내려놓고 천천히 시동을 걸려는 것인가.
“뭐가 멋있어요~. 아휴, 이제 아저씬데요, 뭘”. 보통은 세월을 비껴가려 난리인데 빨리 나이 들고 싶어 안달이 난 듯한 모습에 지나친 겸손은 여전한가 싶었지만, 적어도 표정은 ‘안시성’ 때보다 밝아서 걱정을 덜었다.
영화 ‘밀수’(2023)를 보기 전까진 좀 걱정했다. 왜 연이어 류승완 감독이지, 해녀들의 수중 액션이 주가 될 영화인데 왜 자꾸 주연급 조연을 자청하지? 영화를 보고 나서 속이 뻥 뚫렸다. ‘모가디슈’ 때보다 훨씬 멋있다. 영화를 보고 나서 한참을 생각했다. 와, 수중 액션을 표방하는 영화에서 이렇게 멋진 지상 액션 ‘반칙’ 아닌가! 왜 이렇게 멋있지?
필자가 찾은 답은 ‘신사도’였다. ‘모가디슈’에서 남측 강대진 참사관은 외교적 고립 상황에서 정치적이고 전략적인 대결 양상을 북측 태준기 참사관(구교환 분)과 만들어 싸웠다. ‘밀수’에서 권 상사는 장도리(박정민 분)의 습격으로 아수라장이 된 호텔 스위트룸 내 좁은 복도에서, 사귀기는커녕 ‘썸’도 탄 적 없는 조춘자(김혜수 분)를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그 외로운 싸움의 이유는 단지, 나보다 체력적으로 연약한 여자는 상대적으로 강한 내가 지키겠다는 신사도였다. 류승완 감독의 표현으로는 ‘기사도 정신’.
조인성의 액션에는 명분이 필요하구나! 그것도, 사랑하는 연인이든 약자든 지키려는 이가 여성일 때 더욱 빛나는구나. 많은 이가 보았을 것이다. 본격적으로 장도리와의 싸움을 시작할 때 빛나던 조인성의 안광을. 조인성의 액션 기운, 멋짐의 에너지가 그 찰나의 번쩍 안광을 통해 깨어났다.
두 손 모아 눈에서 하트를 뿜으며 ‘밀수’의 권필삼을 추억하기가 무섭게, 또 하나의 ‘선물’이 도착했다. 디즈니+ 드라마 ‘무빙’의 김도식, 대한민국 국가안전기획부 최정예 블랙요원, 코드네임 ‘무산’(2023) 되시겠다.
‘무빙’의 무산. 이번엔 제대로, 조인성이 대한민국 배우 가운데 가장 잘하는 우수에 찬 멜로 눈빛을 머금었다. 드라마 ‘발리에서 생긴 일’(2004)에서처럼 사랑하지 않으려 누르고 눌러도 솟아오르는 연심이 조인성의 미모를 부활시켰다. 국가안전기획부 제5차장 민용준(문성근 분)의 지시로 이뤄진 작전, 6급 주사 이미현(한효주 분)의 의도적 접근인 줄 알면서도 사랑에 빠졌다.
이유가 있다. 미현의 첫 번째 작전, 무산의 유일한 실패 작전이었던 ‘갈매기 작전’ 당시 무산은 이미 미현에게 반했다. 얼굴이 너무 예뻐서, 노래마저 잘해서, 아니 휴머니즘으로 가득한 마음이 예뻐서 반했다. 내게 닥칠 위험을 무릅쓰고 타인의 생명을 먼저 생각하는 모습이 나와 똑 닮아서 반했다.
민용준이 무산의 사상 검증을 위해 미현을 붙인 작전은 적중했다. 출신 지명을 따서 붙여지는 코드네임, 함경북도 무산 출신임을 알게 하는 도식의 코드명. 북쪽 출신이어서, 슈퍼맨처럼 하늘을 나는 초능력이 있으니 이동과 접근이 유리해서, 전투력과 작전 수행 능력 면에서 막을 자 없는 최고의 에이스여서 무산을 ‘극비 임무’ 요원으로 낙점하고도 같은 이유로 주저하던 차. 바로 휴머니스트인 점을 이용해 휴머니스트를 붙여 무산의 마음을 남쪽에 남겨두면, 작전의 최종 단계인 ‘원대 복귀’를 강제해 낼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 악랄한 작전 덕에, 우리는 오랜만에 뜸을 한참 들여 짓는 밥처럼 서서히 무르익는 사랑을 지켜보았다. 배우 조인성은 역시 ‘멜로킹’임을 재확인했다. 조인성과 한효주가 얼마나 그럴싸한 멜로를 가능하게 하는 배우 조합인지 알게 됐다.
한효주의 말을 빌리면 조인성의 아이디어였다는 “죽을 것 같아서요”. 무산이 돌아온 이유는 미현을 못 보면 죽을 것 같아서였다. 다른 거 필요 없고 보는 것만으로 목숨이 구해지는 사랑, 정말 오랜만에 보는 클래식, 고전적 사랑이다.
못 보면 죽을 것 같은 기다림을 부르는 드라마 ‘무빙’은 오는 9월 20일까지 매주 수요일 오후 4시 2회분씩 공개된다. 아직 화요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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