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향기] 나는 그림으로 분노를 해결한다

2023. 8. 22. 0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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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주리 화가

꿈에 사람을 죽였다.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을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과 공모하여 총으로 쏴 죽였다. 총이 어디서 났는지도 모르겠다. 계속되는 살인 예고 등등, 요즘 충격적인 뉴스를 많이 접한 탓이다. 경계선에 선 고립된 젊음이 컴퓨터 게임 속에서 죄의식도 없이 막 죽이듯, ‘나는 죽인다. 고로 존재한다’, 그런 기분인 걸까. 바야흐로 자살의 시대에서 살인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긴 전쟁이야말로 무차별 랜덤 살인의 극대화일 것이다.

「 살인예고, 전쟁 등 충격적 뉴스
유튜브에서 사라진 단어 ‘용서’
이 험악한 시대 어떻게 건널까

그림=황주리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이미 50만 명의 사람이 죽었다. 2000년대쯤이면 세상의 전쟁은 종식될 줄 알았던 건 순진한 착각이었다. 핵폭탄을 만든 오펜하이머가 꿈꾼 전쟁 종식이 더 큰 전쟁의 서막이 된 건지도 모르는 것처럼. 사람을 죽인 꿈을 꾼 건 아마 요즘 권총을 많이 그려서일 거다. 그림의 떡이 아닌 그림의 권총이다.

화가는 그림으로 분노를 해결한다. 일기에 나는 그렇게 썼다. 나조차도 요즘 부쩍 별것도 아닌 일에 울컥 화가 난다. 세상이 부추기는 것도 같다. 유튜브를 보면 용서라는 단어가 사라져가는 걸 느낄 수 있다. 세상의 많은 소리가 아무리 친해도 이런 사람은 끊어라, 손절하라, 멀리하라 등등, 응징의 권유들로 넘쳐난다.

오래전 보았던 텔레비전 드라마 ‘수사반장’ 중 인상 깊은 이야기 하나가 떠오른다. 부잣집 아들이 구두를 닦는 같은 반 친구의 아버지에게 매일 외상으로 구두를 닦는다. 아버지가 돈도 받지 못하고 구두를 닦는 걸 본 아들은 살의를 느낀다. 부잣집 아들이 다른 친구에게 이렇게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저 영감에게 목돈으로 주려고 통장을 만들었어.” 그걸 모르는 구두 닦는 아저씨 아들은 어느 날 부잣집 아들을 죽여서 파묻는다.

그 드라마를 본 날 나는 잠이 오지 않았다. 그때 어린 나는 뭔가 깨달은 것 같다. 내가 네 마음을 모르듯 너도 내 마음을 모른다는 걸, 하지만 그런 마음의 시대는 이제 먼 추억이 되었다. 적어도 예전에는 누군가를 죽일 때는 일정 상대에 대한 분노라든지 복수라든지 금품을 뺏기 위해서라든지, 이유가 있었다.

요즘의 ‘묻지마’ 살인은 미국에서 살아본 적이 있는 사람에게는 익숙한 제목이다. 폭력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한 수단으로 승인된 총기 소유는 맘만 먹으면 아무나 죽일 수 있도록 오·남용된 지 오래다. 드디어 이 땅에도 시작된 랜덤 분노 시대는 미국의 총기 난사 사건이 드디어 남의 일이 아니라는 걸 보여준다.

분노의 폭발을 제대로 목격한 건 9·11 월드트레이드센터 참사 때다. 작업실이 바로 그 건물 옆에 있어서 내게 그곳은 하루의 이정표와 같았다. 10여 년을 그곳으로 걸어 들어가 지하철을 타고 외출했고, 돌아올 때도 그곳을 통해 귀가했다. 내 생일 이틀 전에 일어난 참사의 기억이 엊그제 같다.

하지만 굳이 말하자면 그조차도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의 미국에 대한 해묵은 분노의 폭발이라는 이유가 있었다. 사춘기 시절 읽었던, 지금으로부터 81년 전에 탄생한 알베르 카뮈의 소설 『이방인』이야말로 미래를 예견한 지금 여기, 불행한 시대의 초상이 아닐 수 없다.

소설은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그게 어제였나? 잘 모르겠다”라는 문장으로 시작된다. 슬픔에 대한 공감 능력이 없는 인물의 묘사로 이보다 적합할 수는 없을 것이다. 햇빛이 눈이 부셔서 사람을 죽였다는 주인공의 말이 그 책을 읽었던 시절엔 초현실적으로만 느껴졌다. 지나고 보니 그가 바로 비뚤어진 지금 이 시대의 초상이다.

엉뚱하게 사람을 죽인 꿈속에서 세상 떠난 동생이 생전처럼 내게 말한다. “누나 큰일 났다. 아무래도 무기징역이거나 20년은 감옥에서 지내야 한다는데 도대체 왜 그랬어?” 꿈속에서 살인을 저지른 나는 누구를 왜 죽였는지 도대체 알 수가 없다. 그리고 감옥에서 20년 이상을 산다니 기가 막혀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 생전에 도맡아 하던 근심과 걱정을 이번엔 동생이 내게 해준다. 인생이 그렇다. 동생은 위로하지 않는다. 그 애 생전의 내가 그랬던 것처럼. 동생은 그냥 나를 슬픈 눈으로 바라만 본다. “술 한 잔 줄까?” 한다.

이렇게 슬픈 꿈은 처음 꿔본다. 꿈속에서도 그보다 불행한 일은 없었다. 꿈에서 깨고 나니 세상에 걱정이 하나도 없어졌다. 그저 모든 게 고마울 뿐 미운 사람 하나 없었다. 극장에 가서 아름다운 영화음악으로 영원히 남은 ‘엔리오 모리꼬네’의 다큐 영화를 보았다. 잊히지 않는 주옥같은 음악을 우리에게 선물하고 간 그의 생애와 음악을 마음 가득 담고 왔다. 느낄 수 있는 마음이라는 게 이렇게 좋은 거구나 싶어 눈물이 났다.

황주리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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