굽어진 벽과 나선형 계단, 가족을 둥글게 감싸 안는 집
서울 신당동. 세월이 묻은 연립주택과 작은 빌라들 사이로 한 점의 테라코타 조각품 같은 적갈색 건물이 반짝인다. 앞에서 보면 나팔 모양의 콘크리트 기둥이 우람한 비정형의 건물을 받치는 필로티 구조, 남쪽을 향하는 면에 네 개의 창문만 낸 간결함까지. 외관에서 건축주의 취향과 독창성이 직관적으로 드러나는 집의 주인은 주얼리 브랜드 젬앤페블스 오너 디자이너 전선혜와 프랑스 공인 건축사이자 호서대학 교수인 서민범 부부 그리고 사랑스러운 두 명의 아이다.
“건축가 렌조 피아노와 마리오 보타를 좋아해요. 둘이 매우 상반되죠? 마리오 보타의 건축은 기본에 충실한 클래식함, 웅장함이 좋고 렌조 피아노는 ‘킥’이 있어서 좋아요. ‘럭셔리’하지만 절대 뻔하지 않은 건축이죠. 반면 남편은 안도 타다오처럼 미니멀한 건축을 좋아해요.”
첫째아이는 부부가 주택설계를 위해 나눈 수많은 대화를 들으며 자랐다. 가족의 미감과 취향, 삶의 방식을 조화롭게 담아낸 집을 짓기 위해 긴 여정을 거치는 동안 네 사람은 팬데믹을 겪었고, 부부는 경험한 적 없던 어려움을 함께 이겨내며 원하는 삶의 모습을 다시 정립할 수 있었다.
3개 층에 걸쳐 거실, 주방, 아이들 방 그리고 세 곳의 각기 다른 발코니가 펼쳐지는 트리플 구조. 거실 중앙부에서 나선형 계단을 타고 오르면 마스터 룸과 다이닝 룸이 나타나고, 다이닝 룸에서 다시 계단을 오르면 아이들의 방이 나온다.
“계단을 수없이 오르내려야 하는 일상이죠. 아이들이 환경에 적응하는 능력을 키울 수 있다고 생각은 했지만 세 살, 여섯 살 아이들이 오르내리기엔 계단이 많은 게 걱정됐어요. 그런데 살아보니 오히려 놀라운 순간을 목격하게 돼요.
막내인 세 살배기는 돌아다니다 계단 앞에 다다르면 몸을 돌려 뒤로 천천히 내려갑니다. 계단에 안전 도어가 있는데도 지금은 거의 사용하지 않아요.” 매끈한 계단 난간, 아이 방의 폴딩 유리창부터 마스터 룸과 아이 방 가구, 도어 핸들 등 실내의 하드웨어는 기성품이 아니라 모두 맞춤 제작했다.
외관의 적갈색 타일벽에 맞춰 내부의 날렵한 창틀에도 같은 색을 주조해 외관의 멋을 실내로 끌어들였다. 마스터 룸과 거실 디자인에는 서민범이, 부엌과 아이들 방은 전선혜가 주도권을 쥐었다. 마스터 룸은 서재, 파우더 룸, 욕조가 있는 배스 룸과 세면대, 침실까지 있어 대부분의 일상이 집약된 방이다. 서민범의 실험 중 하나다. 그는 프랑스에 살던 시절, 건축가 도미니크 페로 사무실에서 일했다. 자신의 모든 설계에 한 가지 새로운 시도를 했던 도미니크 페로의 철학은 이 집에서도 읽힌다.
“안팎으로 우려가 많았던 설계였어요. 안 예쁠 것 같다는 둥, 너무 과할 것 같다는 둥, 너무 실험적이다 등등 한국 가정집에서는 생소한 구조니까요.” 한옥의 댓돌에 신발을 벗고 들어서면 출입구와 다이닝 룸 등 집 안 곳곳에 권오봉, 남춘모, 이배 작가의 작품이 맞춘 듯한 자리에 걸려 있다. 전선혜는 오래전부터 자신만의 컬렉션을 만들어왔다.
“집 설계를 마치고 완공되길 기다리며 작품이 걸릴 자리를 잡았어요. 제 삶에 중요한 일부죠. 둥근 벽이 많아 고민 좀 했어요.” 북쪽으로 낸 커튼 월은 이 집의 또 다른 작품이다. 테라스 너머 탁 트인 서울의 낮과 밤 풍경이 그림처럼 걸린다. “제가 사랑하는 공간이죠. 선선한 밤이면 가만히 앉아서 와인을 한잔하기도 하고, 아이들과 볕을 쬐며 아침 식사도 해요. 테라스가 있는 삶에서 큰 행복을 느껴요. 앞으로 이 집이 제 삶의 흔적, 가족의 흔적과 어우러져 천천히 자라났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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