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인생, 지금부터 시작입니다
문화 기획을 했던 사람이 '인쇄인들을 위하고 시민들에게 인쇄문화를 알리기 위한' 서울인쇄센터를 운영하게 되었습니다. 용역으로 공공 기관을 운영하면서 공간을 꾸리는 일, 시민들을 대하는 순간들을 소소하게 일지 형식으로 담아내고자 합니다. <기자말>
[최대혁 기자]
'독립출판'이 우리에게 꽤나 익숙한 단어가 되면서 작가로 활동하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다. 그러나 내 이름으로 책을 내는 일은 여전히 쉽지 않다. 열심히 글을 써 원고를 완성했다고 해도 그것을 책으로 인쇄하고 서점에 보내 독자들을 만나게 하기까지는 많은 과정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런 어려움을 조금이나마 해소할 수 있는 자리가 있었다. 지난 봄, 서울시 중구에서 <시작, 작가>라는 이름으로 지역 주민들이 출판에 대해 배우고 소정의 인쇄비를 지원해 직접 책을 만들어볼 수 있도록 프로그램을 운영했다.
▲ <시작, 작가> 전시장 서울 중구에서 인쇄업과 도심 제조업을 홍보하기 위해 만든 '공간 을'에서 <시작, 작가>의 결과물인 15종의 책들을 전시하고 있다. |
ⓒ 공공네트워크(사) |
약 3개월의 기간을 거쳐 완성된 <시작, 작가>의 작가들은 어떤 책들을 만들어냈을까? 마침 중구에서 작가들의 책을 전시하고 있다고 해서 전시장에 들러 15권의 책을 살펴보았다. 평범한 이웃이 낸 책을 살펴보는 일은 우리에게 위로와 공감, 그리고 나도 이들처럼 내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들려주고 싶다는 마음을 불러일으킨다.
여행이나 일로 타지에서 보낸 시간은 책으로 내기에 좋은 소재다. 20대에 남미로 떠난 배낭여행을 30대에 접어들어 돌아본 <남미에 간 이유를 아무도 묻지 않았다>(김지현 저)와 3년 간의 중동 건설현장 경험, 10년에 걸친 프랑스에서의 공부와 일과 삶을 각각 담아낸 <사막편지>(모래곰 저), <이방인의 공공살이>(추민아 저)가 그런 책이다. 특히 <이방인의 공공살이>는 얼마 전 크라우드펀딩에 성공해 시중에 유통되어 독자들을 만나고 있다.
책을 내고 싶어하는 사람의 상당수는 문학도이다. 서랍 속에 숨겨두었던 원고를 용기있게 책으로 펴내보는 건 어떨까? <누가 남긴 거슬림>(이민영 저)는 4편의 희곡을 실은 희곡집이며, 3편의 중편소설이 담긴 <하룻밤 나기>(이수빈 저)는 소설집, <2의 8제곱일의 시>(진동 저), <시작, 노트>(임온익 저), <파도는 망망대해에 떨어진 내 눈물이 할 수 있는 일>(이은미 저)는 한줄 한줄 진심을 담아 꾹꾹 눌러쓴 흔적이 역력한 시집이다.
꼭 글만 책이 되는 건 아니다. 100일 동안 매일 그린 그림을 모아 끈기와 꾸준함이 주는 단단한 힘이 느껴지는 <100일 100그림>(임종심 저), 사랑을 듬뿍 담아 아이와 가족의 모습을 그린 그림과 글을 묶어 책으로 펴낸 <다시 쓰는 드로잉 성장 육아일기>(꼼지락덕후 저)와 같이 내 생각과 마음을 표현했다면 어떤 흔적이든 종이에 찍어내는 게 가능하다.
▲ <시작, 작가> 전시회 모습 서울시 중구청에서는 지난 5월 8일, 사흘에 걸쳐 청사 1층에서 <시작, 작가>를 통해 제작된 책을 전시했다. |
ⓒ 공공네트워크(사) |
이정도로 갖춰진 책을 만들었다면 어느 정도 인쇄나 출판에 대해 아는 사람들이 참여했던 건 아닐까? 중구청과 협력해 이번 프로그램을 운영한 기획자 전율(공공네트워크(사))씨는 "기술이 전혀 없던 사람이라도 전문가의 도움을 받으면 짧은 기간 안에 인쇄용 디자인 원고를 제작하는 게 가능하다"며, "50대 이상의 구민들도 교육을 통해 직접 인쇄까지 해내는 것을 보며, 약간의 지원만 있다면 누구나 자신만의 책을 만들 수 있다는 확신을 얻었다"고 말했다.
서울시 중구에서는 도심산업과를 중심으로 을지로 전시·체험공간 '을'을 개관해 운영하는 등 을지로 일대에 자리 잡은 조명·인쇄출판·패션산업과 지역주민 사이의 접점을 넓히기 위한 다양한 노력을 기울이는 중이다. 나만의 이야기, 내 삶의 일면을 동네에서 풀어내보는 건 어떨까? 중구 일대에서 벌어질 새로운 '시작'들을 기대해본다.
* 소개된 책들은 을지로4가역 대림상가 3층 공중보행로에 마련된 도심 산업 그라운드 공간 '을'과 서울인쇄센터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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