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빠따' 맞고, 회사랑 '싸우던' 그가 인생 2막 준비하는 법
[문세경 기자]
▲ 전태일재단에서 인터뷰하고 있는 윤제훈. |
ⓒ 문세경 |
"35년 7개월이 눈 깜짝할 새에 흘렀어요."
윤제훈을 만나기로 한 8월 10일은 태풍 '카눈'이 서울을 관통한다는 날이었다. 서울을 관통하면 비바람이 장난이 아닐 텐데 큰일이다. 그를 만나기로 한 전태일재단 2층 회의실에 약속 시각인 5시보다 30분 일찍 도착했다.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윤제훈을 기다렸다. 오후 4시 55분, 전화가 왔다. "동대문역에 내렸어요. 곧 도착해요."
윤제훈(63, 이음나눔유니온 조직위원장)은 1985년 5월 서울지하철공사에 역무원으로 입사했다. 지하철을 이용하는 승객에게 표를 팔고 안전을 위한 시설물 관리를 하고, 역사에 관련한 모든 일을 하는 노동자였다. 1987년 서울지하철공사 노동조합이 생기기 전까지는 자연스럽게 승진과정을 밟다가 퇴직할 줄 알았다. 그러나, 회사는 윤제훈을 평범한 지하철 노동자로 살게 두지 않았다.
"입사를 하고 보니까 이건 회사가 아니라 완전 군대였어요. 모든 시스템이 군대식으로 굴러 갔어요. 상명하복에 줄빠따(체벌 대상들을 줄세워놓고 순서대로 다음 사람을 폭행하게 하는 비인간적인 행위)도 있었고. 출근하면 주머니에 있는 돈 다 꺼내서 사금함에 보관하고 금액을 적었어요. 점심 식사 할 때 돈을 꺼내고 얼마 남았다고 적고, 퇴근할 때 찾아갔어요.
만약 주머니에서 동전이라도 나오면 징계받고 그랬죠. 그러니까 다들 분노하고 회사에 대한 적개심이 쌓였죠. 당시에는 주야간 전일제 교대 근무로 일했어요. 아침 9시에 출근하면 그 다음날 9시에 퇴근하고 또 그 다음날 아침 9시에 출근하고. 거의 24시간 근무였죠. 이건 아니다 싶어서 회사와 싸웠어요. 노동조합이 생긴다니까 쌍수 들고 환영했죠. 누가 시키지 않아도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그때는 노동조합 할 맛이 났어요."
▲ 1995년 해고동지 복직.손해배상 철회 촉구 집회 (당시, 서울시청 정문 앞. 맨앞 오늘쪽 안경 쓴이가 서울지하철노조의 역무지부장으로활동하던 윤제훈 |
ⓒ 문세경 |
1987년 8월 12일, 드디어 서울지하철공사 노동조합이 설립됐다. 서울지하철공사 노동조합은 설립 한 달 만에 4800명이 넘는 조합원이 가입하며 공공부문의 선두 노동조합으로 자리매김했다. 이후 3년 동안 차별철폐를 위한 직제개편 투쟁을 줄기차게 했다. 군자기지, 지축기지, 창동기지는 노동자들의 함성과 요구로 가득 메웠다. 노동조합 결성과 동시에 터져나온 요구의 핵심은 '기능 동물'을 끝내자는 차별철폐와 인간으로서의 권리 회복이었다(정경원, 전누리, 서울지하철노동조합 30년사, 한내, 2017. 593~594p 참조).
윤제훈은 서울지하철공사 노동조합의 초대 집행부 대의원으로 활동했다. 노동조합이 설립된 지 얼마 안 됐기 때문에 회사는 노동조합 활동을 인정하지 않았다.
"서울지하철공사는 공익사업장이라 노사 합의가 안 되면, 노동부에서 직권 중재를 명령해요. 노사간 합의를 못 보니까 노동부에서 하라는 대로 따르라는 거죠. 노동조합에서는 이것을 법적으로 거부할 권리가 없어요. 만약에 거부하고 쟁의발생결의를 하면 무조건 불법으로 규정하고 탄압했어요. 순식간에 불법파업으로 몰렸죠. 그때 집행부는 구속되거나 아니면, 해고되는 거죠."
해고보다 더 무서운 것은 파업시에 닥치는 공권력과 사측의 탄압이 아니었다. 어용노조가 생기고 민주노조와 갈등이 생길 때였단다. 같은 일을 하는 노동자인데 노동조합이 다르다는 이유로 서로를 원수처럼 여길 때, 그때가 노동조합 활동을 하면서 가장 힘든 때였다고 한다.
2017년 5월 31일, 서울 지하철 1~4호선 운영기관인 서울메트로와 5~8호선의 운영기관인 도시철도 공사가 통합돼 '서울교통공사'가 출범했다. 윤제훈이 퇴직을 3년가량 남겨둔 시점에 2개의 운영기관이 통합돼 '서울교통공사 노동조합'으로 노조 이름이 바뀌었다.
▲ 2022년, 서울교통공사노동조합 반전평화통일위원회 워크숍에서 인삿말 하고 있는 윤제훈. |
ⓒ 문세경 |
윤제훈은 2020년 12월, 서울교통공사 신설동(2)역 부역장으로 퇴직했다. 그는 퇴직 전부터 퇴직 후의 삶을 고민하고 퇴직(예정)자를 조직하기로 한다. 퇴직하는 사람들을 조직하고 후배들의 든든한 울타리가 되겠다는 결심이다. 많은 조합원들이 퇴직 후의 삶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는 것을 봤기 때문이다.
마침 민주노총 서울본부가 '퇴직자가 지하철에만 있는 게 아니니 판을 키워서 같이 해보자'고 했다. 1987년 민주화투쟁때 싸웠던 동지들을 다 모아서 퇴직자 위원회 활동을 함께 해보자고 제안했다.
35년 7개월간의 회사 생활을 마치고 퇴직한 윤제훈은 퇴직 후, 쉴틈도 없이 본격적으로 퇴직자 위원회 활동을 한다. 2021년 10월 말이었다. 몸이 이상했다. 피곤해서 그런가 보다 하고 지인이 운영하는 병원에 갔다. 링거나 하나 맞으면 괜찮을 줄 알았다.
"링거 맞을 상태가 아니라고 했어요. 심각한 상태니까 빨리 119 불러서 큰 병원에 가라고 했죠. 패혈증이었는데 여드레 동안 의식불명 상태였어요. 다들 죽는다고 했대요. 중환자실에서 석달 동안 치료 받고 2022년 1월 말에 퇴원했어요.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온 거죠."
퇴직 후 쉴틈도 없이 활동을 하다가 경을 칠 뻔했다. 스스로 몸을 돌보지 않은 대가였다. 윤제훈은 퇴직 후 왜 쉬지도 않고 퇴직자를 위한 활동에 매진했을까. 그 이유를 들어봤다.
"퇴직을 하면 내가 소속된 조직인 회사뿐만 아니라, 사회적 네트워크가 단절돼요. 그러면 바로 고립되죠. 고립은 무서운 거에요. 퇴직한 선배들을 보면서 알았어요. 고립되고 고독한 삶이 이어지면 허무감이 와서 바로 주저 앉아요. 1987년 노동자 대투쟁때 최선봉에서 싸웠던 사람들이 그래요. 엄청난 사회적 손실이죠."
윤제훈은 눈앞에서 무너지는 선배들을 보고 이래선 안 되겠다고 다짐했다.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정보를 공유하고 서로 의지하면 더 건강한 퇴직 후의 삶이 될 것이라고 믿었다.
'함께해보자'는 민주노총 서울본부의 제안에 그는 퇴직자 조직의 대상을 수도권 지역만 할 것인지, 직종별로 어떻게 나눌 것인지, 봉사활동을 강화할 것인지, 사회적 발언에 중점을 둘 것인지 고민했다.
"노인들이 보수화 돼 가고 있어요. 후배들에게 손가락질받고, 균형 감각을 잃는 노인이 되면 안 되겠죠. 연금제도 개혁 같은 건 전문가들이 할 테지만 우리도 손 놓고 있으면 안 되고. 노인이 됐어도 일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그런 사람들을 위해 질 좋은 일자리를 만들어야겠죠. 연금만으로 살 수 있으면 좋지만 그러기는 힘드니까요.
▲ 2016년 성과연봉제 폐지 투쟁 결의대회에 참여한 윤제훈 |
ⓒ 문세경 |
"축하하러 갔다가 낚였어요"
2022년 12월 16일, '이음나눔유니온'이 창립했다. '이음나눔유니온'은 퇴직자들이 마을로 돌아가 자신이 사는 곳에서 활동하고 연대하며 사는 것을 목표로 한다. '제2의 전태일 운동'과 '기후정의 운동'이 포함된다. 이음나눔유니온이 한창 창립 준비를 하고 있을 때 윤제훈은 건상 상의 문제가 생겨서 적극 참여하지 못했다. 창립 총회를 할 즈음에 몸이 회복돼 축하를 하러 갔었다. 그리고 곧 조직위원장을 맡아 달라는 청을 받는다.
"축하하러 갔다가 낚였어요(웃음). 지하철공사만 해도 퇴직자가 엄청 많아요. 퇴직 후의 활동을 고민하는 사람은 퇴직(예정)자의 20% 밖에 안 돼요. 나머지 80%는 퇴직하면 그걸로 끝이죠. 다들 손 털고 나가는 거예요. 수십 년 동안 봤던 사람들을 퇴직 후까지 봐야 하나, 하는 마음도 있고. 생계 활동을 연장해야 하니까 바빠서 안 하는 사람들도 있고요.
그래서 저는 조직화가 필요하다는 걸 절실히 느꼈어요. 현직에 있을 때는 현직에 매몰돼 미래를 생각하지 않잖아요. 전태일 정신도 많이 잊어버리고. 퇴직 후에는 그렇게 살지 말아야죠. 누가 저보고 그러더라고요. 사람 모으는 걸 잘한다고요. 비결은 '진정성' 아닐까요?(웃음)"
이음나눔유니온 첫 수련회(4월 중순)에서 윤제훈을 처음 봤다. 처음 보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서로의 이름을 알기 위해 명찰을 목에 걸었다. 명찰에는 별명을 적었다. 윤제훈의 명찰에는 '술통'이라고 써 있었다. 필자는 '스머프'라고 썼다. 수련회가 끝난 뒤, 다음 모임에서 윤제훈을 만났다. 그는 내 별명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제가 어릴 때 스머프 만화영화를 좋아했어요. 스머프에 종류가 많은데, 무슨 스머프에요?"
별명을 쓴 명찰이기에 오래 걸고 있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는 내 별명을 기억하고 있었다. 사람을 기억한다는 것은 이름을 기억한다는 것이고, 이름을 기억한다는 것은 관심이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윤제훈은 처음 보는 사람의 별명을 기억할 만큼 주변 사람을 허투루 보지 않았다. 나는 윤제훈의 질문에 답했다. "투덜이 스머프에요."
그럴 줄 알았다는 듯한 얼굴엔 웃음이 가득했다. 뒤이어 내게 말했다. "조직위원회에 조직위원으로 들어오시죠." 나는 윤제훈에게 낚이고 말았다.
▲ 2023년 7월 28일, 노원 도봉 중랑 지역 이음나눔유니온 조합원 간담회에서 조합 설명회를 하고 있는 윤제훈(가운데 일어선 사람). |
ⓒ 문세경 |
"퇴직한 친구들은 그동안 배우고 싶었던 분야의 공부를 한다 하고, 시간 없어서 하지 못한 운동을 한다 하고, 가보지 못한 곳을 여행한다고 해요. 저는 그런 게 하나도 당기지 않아요.
이음나눔유니온에서 새로운 동지들 만나는 게 좋아요. 전태일 정신을 공유하고, 남은 인생 어떻게 하면 더 의미 있고 행복하게 살까를 도모하고 싶어요. 10년 전에 지하철노조 동지들과 백두산 여행을 다녀왔어요. 광개토대왕비를 둘러보고 천지의 물을 떠먹었어요. 그 뒤로는 여행에 별로 관심이 없어요. 세계여행은 TV에서 하는 '세계테마기행'을 보면 돼요. 그걸로 만족해요.
중환자실에 있다가 퇴원했을 때 아내가 그러더군요. 맨날 술만 먹는 줄 알았는데 인생 헛살지 않았다고요.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은 걸 보고 그런 생각이 들었나 봐요. 남은 인생은 걱정해 준 분들께 보답하는 마음으로 살아야죠."
고령화 시대가 왔다. 퇴직 후의 삶은 누가 어떻게 보장해 줄 것이며 어떤 삶을 살 것인가가 화두다. '인생 2막'이라는 커튼을 열어젖혔을 때 먹구름이 잔뜩 낀 하늘보다는 맑게 갠 하늘이 보이면 좋겠다. 맑은 하늘을 보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할까. 필자도 퇴직하면 윤제훈처럼 전태일 정신을 되새기며 열정적으로 살고 있을까. 인터뷰를 마칠 무렵 깜빡했다는 듯이 그가 말했다.
"아, 참! 제 아내는 제일 마지막에 이음나눔유니온 조합원으로 가입시키려고요. 아내를 조합원에서 빠트릴 순 없죠(웃음)."
[관련 기사]
53살에 생애 최초로 노동조합에 가입했습니다 https://omn.kr/23n94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필자의 브런치에도 싣습니다.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당선무효 3개월 만에 또 출마 김태우, 선거비용도 세금으로?
- '여성안심길 없앴다' 자랑한 구의원, 국힘은 엉뚱한 대답
- 오염수 방류, 어쩌다 일본이 윤석열 정부를 챙겨주게 됐나
- 더 클라이밋 그룹은 왜 윤 대통령에게 강력 항의했나
- 런웨이 휩쓴 백발의 남자... "저 사실, 공무원이었어요"
- 지금의 백범 김구를 만든 뜻밖의 장소
- 어머니의 '인스타그램 피드'가 엉망이 되었다
- "성 파시즘" 외치며 '여성 지우기' 주력한 최인호 관악구의원
- [오마이포토2023] '아침 9시 등교, 저녁 8시 하교? 직장인도 이렇게 안 해'
- 권태선 방문진 이사장까지 해임... 방통위 두달새 공영방송 이사 4명 날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