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흥무관학교의 숨겨진 영웅, '원병상'을 아십니까

조세열 2023. 8. 21.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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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래 신흥무관학교 출신이야!" 영화 속 그 인물... 교관 활약했던 '원병상 회고록' 발간

[조세열 기자]

"내래 신흥무관학교 출신이야!"

영화 〈암살〉에서 배우 조진웅이 분한 '속사포'의 대사이다. 이 영화가 관람 연인원 1300만 명 가까운 대기록을 세우면서 뜻하지 않게 신흥무관학교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다. 조진웅은 이 배역을 맡은 인연으로 이후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의 홍보대사가 되었다.

1910년 8월 29일 강제병합으로 나라를 빼앗기자 뜻있는 이들은 가산을 처분한 뒤 일가를 이끌고 만주로 망명했다. 국외에서 독립군기지를 건설해 국권을 회복하겠다는 결단이었다. 국망 이후 국외 최초의 독립군기지인 신흥무관학교는 이회영·이시영 6형제, 이상룡, 김대락, 김동삼 등 기라성 같은 민족지도자들이 힘을 합쳐 이룩한 독립운동의 요람이었다.

독립지사들의 심신 훈련소, 신흥무관학교
 
 영화 암살 스틸컷.
ⓒ ㈜쇼박스
신흥무관학교는 1911년 6월 10일 서간도 류허현 삼원포에서 신흥강습소란 이름으로 첫걸음을 떼었으며, 점차 규모를 확대해 갔다. 이동녕·윤기섭·김창환·남상복·이장녕·이세영·여준 등 명망 있는 독립지사들이 교장과 교관으로 복무하며 생도들의 정신무장과 군사훈련을 지도했다.

신흥무관학교는 3·1운동 직후 애국 청장년들이 대거 망명해 입교하면서 전성기를 맞았다. 이때 일본군 중위로 복무하다 탈출한 지청천과 김경천, 중국 윈난 육군강무학교를 수석 졸업한 이범석 등이 신흥무관학교로 찾아와 교관으로 합류했다. 신흥무관학교는 일제의 탄압과 연이은 사고로 1920년 가을 폐교하기 전까지, 약 3500여 명에 이르는 독립전사를 배출했다.

학교는 비록 문을 닫았으나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은 봉오동·청산리·대전자령 전투 등 독립전쟁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웠으며, 의열단·한국광복군 등 항일무장투쟁의 핵심으로 불멸의 업적을 이루었다. 그리하여 상당수 구성원들이 항일투쟁의 도상에서 이름도 명예도 남김없이 장렬한 죽음을 맞이했다.

독립운동사에 빛나는 별이 된 영웅들도 적지 않다. 교관 지청천과 이범석은 청산리전투를 비롯한 독립전쟁에서 탁월한 지도력을 발휘했으며, 한국광복군의 총사령관과 참모장으로 활약했다. 성주식(성준용)은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하고 교관을 지냈으며, 조선민족혁명당에 참여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위원을 지냈다. 의열단과 조선의용대를 창설하고 뒤에 한국광복군 부사령관으로 합류했던 김원봉은 신흥무관학교에서 폭탄제조법을 배운 중퇴자이다.

김원봉의 의열단 동지 윤세주 역시 3·1운동 당시 밀양장터 만세시위를 주동하고 망명해 신흥무관학교에서 군사훈련을 받았으며, 조선의용군으로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다 태항산에서 전사했다. 님웨일즈의 <아리랑>에 나오는 김산(장지락)은 15세에 특별입학을 허락받아 속성반을 졸업했으며, 신흥무관학교의 맹렬했던 훈련과정을 술회했다. 김훈(양림)은 중학생으로 평양의 3·1운동 당시 학생만세운동 지도자로 활약한 뒤 망명해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했다. 이밖에도 셀 수 없이 많은 조선의 청년들이 신흥무관학교를 정신적 지주로 삼으며 항일전선에서 조국독립을 위해 헌신했다.

주목해야 할 또 한 사람, 원병상
 
▲ 『신흥무관학교 교관 원병상 회고록』 일제강점기 최대의 독립군 기지 신흥무관학교의 졸업생으로 교관을 지낸 원병상의 회고록
ⓒ 민족문제연구소
 
여기에 신흥무관학교 출신으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또 한 사람이 원병상이다. 그는 신흥무관학교 4년제 본과 3기생으로 입학해 3년간 생도반장을 맡았으며, 졸업한 뒤에는 류허현 대사탄소학교에서 교사로 복무하며 신흥학우단 총무부장과 서기를 역임했다. 3·1운동 직후인 1919년 5월에는 모교 교관으로 부임하여 지청천 등과 함께 밀려드는 애국청년들의 훈련에 진력했고, 해방 뒤엔 신흥무관학교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신흥학우단의 부활과 신흥대학 개교에 앞장섰다.

원병상은 교관으로서, 누구보다도 신흥무관학교의 전모를 가장 구체적으로 알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그의 회고에 의하면 상당한 자료들을 비밀리에 보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격동의 시기를 지나면서 모두 멸실되고 말았다. 이후 그는 이를 안타까워하면서, 자신의 기억을 되살려 시대를 증언하는 수기 두 편과 회고록 한 권을 남겼다.

수기는 <신동아>(1969년 6월호)와 <독립운동사자료집 제10집 : 독립군전투사자료집>(1976년 2월)에 실린 '신흥무관학교'란 제목의 약사(간략한 역사)이며, 회고록은 자필 원본의 복사본만 전해지고 있는 <백암 원병상 회고록-피눈물로 얼룩진 36년 유랑 생애>이다. 원병상은 한국전쟁 와중이던 1951년 10월경부터 1973년 1월 1일 별세하기 직전까지 오랜 기간 회고록 집필에 공을 들였다. 식민지배와 독립운동, 분단과 동족상잔이라는 근현대사를 온몸으로 겪은 시대의 산 증인으로서, 반드시 그 고난과 극복의 역사를 후세에 남겨야겠다는 일념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는 원병상이 남긴 회고록과 수기 두 편, 그리고 참고자료들을 새로이 편제해 최근 <신흥무관학교 교관 원병상 회고록>을 내놓았다. 민족문제연구소의 연구자 다수가 참여해 치밀한 교열을 거쳐 주석을 붙이고 사진과 지도 등 시각자료를 수록한 교주본(校註本: 해석을 달아 풀이한 책)이다. 나도 여기에 참여했다.

이 책에는 원병상의 출생·가계, 만주 망명과 신흥무관학교 시절, 영농과 사업, 팔로군 점령 후의 상황과 탈출, 환국 후의 혼란상, 군 복무와 한국전쟁 등 장년에 이르기까지의 개인사와 시대상이 소상히 서술되어 있다. 무엇보다도 신흥무관학교의 설립에서부터 그 변화과정과 교육내용, 생활상과 여러 사건들이 매우 구체적으로 담겨있다는 점에서 독립운동 사료로서 큰 의미를 지닌다. 신흥무관학교의 졸업생이자 교관이었던 원병상이 이를 상당 부분 복원했기에, 그나마 오늘 우리가 신흥무관학교의 일면이라도 살펴볼 수 있게 된 것이다.

국망 이후 만주로 망명한 독립지사들의 신산한 삶이나 이주민 정착과정의 고투를 생생하게 전해주고 있는 점도 이 책의 가치를 높여준다. 강제병합 이후 뜻있는 많은 이들이 국권회복을 위해 생면부지의 이역으로 기약 없는 발걸음을 내디뎠다.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남부여대 정든 고향을 떠난 원병상 일가는 만주에 정착하기까지 이루 말 할 수 없는 고초를 겪어야 했다. 이들은 풍토병과 연속되는 재해, 경신참변, 친일 부역자들의 악행, 만보산 사건, 대도회 동란 등 온갖 수난을 겪으면서도 좌절하지 않고 굳건히 터전을 일궈나갔다.

만주 건너간 동포들 삶의 이야기

이 책은 만주로 이주한 우리 동포들의 디아스포라(diaspora), 즉 이주자들의 삶에 관한 절절한 회고이기도 해서 읽는 이들을 한층 더 숙연하게 만든다.

또 이 책에는 주목할 만한 여러 내용이 담겨 있다. 만주 지역에 벼농사를 확산시킨 주역이 바로 우리 동포였다는 사실, 또 그 개척 과정의 간난신고가 어떠했는지를 실감나게 묘사하고 있다. 일제의 패망 이후 만주의 상황이나 일본인이 겪어야 했던 고초, 팔로군의 만주 점령과 조선의용군의 진입, 인민재판과 숙청, 탈출과 귀환과정 등도 희귀한 증언이라 하겠다.
 
▲ '이분들의 이름을 기억하십니까?' 광복절을 이틀 앞둔 지난 13일 서울도서관 외벽 서울꿈새김판에 독립운동가 사진과 문구가 게시돼 있는 모습.
ⓒ 연합뉴스
 
환국 이후 저자의 행보도 여러모로 특이하다. 일본군이나 만주군 출신들이 육군사관학교 특별반으로 입학해 장교로 임관한 후, 30대에 참모총장 등 군 고위직을 독점하며 특권을 누리던 시기, 50대 늙은 독립운동가는 모멸을 받아가며 하급장교를 전전했다. 해방 조국의 부끄러운 실상이 원병상의 군 복무 이력에서도 여실히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한국전쟁 기간 지휘관으로서 직접 체험했던 전투의 실상과 전쟁의 참상에 대한 생생한 회상도 특기할 만하다.

여러모로 한 개인이 겪었다고 믿기 힘든 그야말로 파란만장한 일대기가 아닐 수 없다. 구절구절 피맺힌 통한의 기록인 것이다.

한편, 하마터면 이 소중한 자료가 빛을 보지 못할 수도 있었다. 〈백암 원병상 회고록-피눈물로 얼룩진 36년 유랑 생애〉의 자필 원본은 멸실되고, 후손들에게 나누어 준 복사본 중 한 부만이 가까스로 전해졌다. 독립운동사에 빛나는 금자탑이라 할 신흥무관학교가 기억의 저편으로 스러지지 않고 위대한 전설이 역사로 남게 된 것은 참으로 다행이 아닐 수 없다.

질곡의 한국근현대사를 이렇게 생생하게 전해주는 기록도 드물다. 이 책을 전문 연구자만이 아니라 일반 독자들에게도 일독을 권유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정권의 조직적인 계획 아래 독립운동이 희화화되고 친일파의 복권이 체계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역사의 위기 앞에서, 다시 한 번 독립전쟁에서 숨져간 무명전사들의 헌신을 떠올려 본다. 영화 〈암살〉에서 속사포가 외친 대사 중 하나는 "나, 끝까지 갑니다"라는 것. 독립운동은 어쩌면 여전히 계속되는 중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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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글쓴이 조세열씨는 현재 민족문제연구소 상임이사로 재직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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