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국 독립지사들 한자리에, 역사여행 다녀왔습니다
[정만진 기자]
▲ (왼쪽부터) 2019년 독립운동정신계승사업회가 달성토성에서 처음 개최한 광복회 결성 기념식, 광복회가 대구경찰서 바로 앞에 사무실을 차려놓고 활동했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당시 신문 기사, 광복회가 결성 후 처음으로 항일 활동을 펼쳤던 경주 효현교의 모습 |
ⓒ 대구근대역사관 |
독립운동정신계승사업회는 2019년 8월 25일 달성토성에서 광복회 결성 104주년 기념식을 거행했다. 창립 현장에서는 역사상 처음으로 열린 광복회 기념식으로 꼽힌다. 지나간 역사의 순간들을 일반 시민이 생생하게 감상하기는 쉽지 않다. 그 어려운 일을 대구근대역사관이 해결해줬다.
대구근대역사관 '광복회' 특별전, 오는 11월까지
'1910년대 광복을 꿈꾼 청년들(대구에서 만나자)'이라는 제목의 광복회 특별 전시회가 대구근대역사관에서 오는 11월 5일까지 열린다. 혼자 보기엔 아까운 전시, 그래서 태전도서관이 준비한 '길 위의 인문학' 프로그램에 참가해 지난 19일 대구근대역사관 2층을 찾았다.
▲ (왼쪽부터) 대구형무소 사형장 터에 건립된 삼덕교회60주년기념관 1층에서 볼 수 있는 이육사 부조, 대구형무소 배치도, 삼덕교회60주년기념관 건물 |
ⓒ 정만진 |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디 닭 우는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하진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 홀로 가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의 뒤에 : 미래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 놓아 부르게 하리라
마음 속으로 '광야'를 읊조린 다음, 들어올 때와 반대편인 건물 뒤쪽 문을 이용해 밖으로 나갔다. 삼덕교회는 1층 전시 공간 설치에 멈추지 않고 기념관 뒤편에 '대구형무소 사적 안내' 공간도 마련해 두었다. 내심 고맙게 생각하면서 조형물과 전시물들을 살펴보았다.
여러 사진들 아래에 형무소 담장 모형의 벽이 설치되어 있다. 그런데 벽돌마다 사람 이름이 보인다. 대구형무소에서 순국했거나 투옥된 독립지사들이다. 광복회 총사령 박상진 지사, 충청도 지부장 김한종 지사 성함도 보인다. 의열단 활동으로 수감되었다가 악랄한 고문에 못 이겨 스스로 생명을 끊은 고인덕 지사도 있다. 숙연한 마음으로 묵념을 올렸다.
1910년부터 1930년까지를 찾는 역사여행
이육사는 1904년 경북 안동에서 태어났다. 이상화는 1901년 대구에서 출생했다. 3년 차이에 불과하지만, 이상화는 1920년대 시인, 이육사는 1930년대 시인으로 흔히 기억된다. 이상화는 1926년에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발표했다. 그에 견줘 이육사는 1933년 발표 '황혼'이 등단작일 뿐만 아니라 '광야'는 독립 후에야 대중에 알려졌다.
대구형무소 사형장 터인 삼덕교회60주년기념관 다음 행선지가 '이장가 문화관·상화 기념관'이다. 물론 이상화를 비롯한 이장가 집안 인물들의 묘소도 참배한다. 그렇게 보면, 오늘 독립운동 답사는 1910년대 광복회, 1920년대 이상화, 1930년대 이육사를 찾는 역사여행이 된다.
도서관에서 준비한 버스로 30여 분을 달려 달서구 명천로 43 '이장가 문화관 · 상화 기념관'에 당도했다. 문중 묘소는 건물 뒤편 약 200미터 지점, 남재(재실)와 제각(제사 지내는 집)을 지나 얕은 산비탈에 있다.
묘소 참배부터 하는 것이 예의일 터, 일행은 줄지어 건물 뒤쪽에 꾸며져 있는 오솔길을 걸었다. 도로에서 남재 앞으로 개설된 큰길도 있지만 이장가문화관에서 출발하는 경우에는 이 오솔길을 걷는 것이 운치도 있고, 지름길이기도 하다.
▲ (왼쪽부터) 이일우의 장남이자 이상화의 사촌 맏형인 이상악, 이상화, 이상화의 친형 이상정의 부인 권기옥(우리나라 최초의 여류 비행사), 이상정 독립지사, 이상화의 큰아버지 이일우 |
ⓒ 정만진 |
그 아랫줄 가장 왼쪽에 이상정·상화 형제의 할아버지 이동진 선생 묘소가 있다. 이동진은 네 살 때 아버지를 잃고 아무런 재산도 없이 홀어머니와 함께 어렵게 유년기를 보냈다. 그래도 그는 불굴의 노력으로 대구 굴지 민족자산가로 성장했다.
이동진은 230마지기(15만1800㎡)나 되는 땅을 가난한 친족과 이웃에 나누어주고, 400마지기(24만㎡)를 공동 소유로 내놓아 거기서 생산되는 소득으로 어럽게 사는 사람들의 병 구완 및 길흉사 경비로 사용하도록 했다. 사람들은 그 후 이동집 집안을 '이장가'라 불렀다. (이장가의 '장庄'은 대략 '땅'을 의미한다)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 도서관'
이동진과 그의 장남 이일우는 1904-5년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 도서관으로 평가되는 우현서루를 세우고, 그를 곧이어 교육기관 시무학당으로 운영했다. 계몽운동 차원에서 이루어진 우현서루 설립과 운영은 민족교육 기능을 감당했다. 이를 눈엣가시로 여기던 일제는 경술국치 후 강제로 폐쇄해버렸다.
이일우는 이미 100년 전에, 후손들이 기제사를 지내지 않도록 조치했다. 허투루 재물을 낭비하지 말라는, 소위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전형다운 실천이었다. 그런가 하면, 이동진 · 일우 부자는 수준 높은 시를 남겨 이상정·상화 형제의 예술 재능이 우연의 소산이 아니라는 사실도 증명했다.
답사여행 참가자들을 이끈 태전도서관 김현지 담당관은 "광복회의 독립운동사적 의의도 그렇고, 이상화 집안이 경주최부자 이상 가는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했다는 이야기는 처음 들었다. 감동적"이라며, "'길 위의 인문학'을 진행하는 보람을 느낍니다. 앞으로도 이런 프로그램을 최대한 많이 마련하겠다"라고 소감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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