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인스타그램 피드'가 엉망이 되었다
가족이지만 아주 다른 사람들, 농사 짓는 부모님 vs. 마케터 딸이 함께 농사일 하는 이야기. <기자말>
[최새롬 기자]
이틀하고 반나절 동안의 양파 담기가 끝났다. 이제 밭에는 양파가 한 톨도 없다. 빈 밭을 뒤로 하고 부모님과 귀인, 나와 동생은 여러 가지의 고됨과 성과를 이야기하며 걸었다. 그러기에 언어는 보잘것없어서 '고생했다'라는 뜻을 좀처럼 벗어나지 못했다.
가끔의 말 없음, 몇 포대 양파를 실은 손수레의 들썩임, 어기적어기적 걷는 발소리가 말보다 더 밭에서 있었던 일을 잘 설명해 주는 것 같았다. 털어도 털어도 흙이 나오는 양말, 소금이 허옇게 뜬 작업복의 무늬를 본다. 양파를 수확했으니 후련한 마음일 법도 한데, 옆을 보니 어머니는 크게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관련 기사: 양파 머리 1400여 개 자른 것보다 힘들었던 것 https://omn.kr/24v2y ).
▲ 양파를 수확하고 아무것도 없던 밭이었으나... 들깨를 심어 들깨밭이 되었다 |
ⓒ 최새롬 |
"하... 고구마밭 풀이 허리까지 자랐다."
"어머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풀이 허리까지 자라요?"
나는 어쩐지 웃음을 꽉 참으며 대답한다. 속으로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생각해 보라. 고구마는 옆으로 기면서 자라는 작물인데 잡초가 아무리 자랐기로서니 사람의 허리춤까지 클 수는 없는 것이다. 나는 이 말이 어머니의 과장이라고 생각하며, 고구마 밭매기가 시급하니 풀을 매면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때는 몰랐다. '풀을 매면 되는 일'이라는 것은 사실 굉장히 지독한 노동이고, 풀은 며칠만 지나도 매우 무성하게 자라며, 이 과정은 고구마를 수확할 때까지 반복돼야 한다는 것을. 그리고 결정적으로 풀매기란, 20kg이 넘는 컨테이너 박스도 번쩍번쩍 잘만 들던 아버지가 가장 어려워하는 일이기도 했다.
"풀이 허리까지 자라서, 동네 창피해서 얼굴을 들고 다닐 수가 없다."
어머니의 이 말이 무슨 뜻인지도 처음엔 몰랐다. 고구마밭의 풀이 허리까지 자랐다고 하더라도, 이게 어째서 동네 창피한 일이 되는가? 더 자세히 들여다 보자.
부모님이 계신 이 동네는 점촌이다. 집이 드문드문 있다는 뜻이다. 이웃이 언제 청소기를 돌리는지 언제 퇴근하는지, 가족과 친구가 언제 모이는지 알고 싶지 않아도 알게 되는 도시에서의 삶과 다르게, 이곳은 가장 가까운 이웃라 해도 적어도 5분은 걸어가야 도착할 수 있다.
그 오 분이나 십 분이나 이십 분의 거리 사이에는, 밭 아니면 논이 위치해 있다. 논밭이야 다 비슷하게 생긴 것 같지만 누구네가 부치는지는 동네 사람이라면 다 아는 사실이었고, 그것은 동네 사람이 어디에 사는지만큼 중요하다.
▲ 고구마 흙 털어주기 작업을 하는 동생 |
ⓒ 최새롬 |
여름이면 논밭이 다 같이 푸르러지는 것 같아도 논의 물길과 풀과 두둑의 사정은 다 다르며, 아는 사람들에겐 이게 표가 잘 나기 마련이다. 농사일을 하는 사람들은 새벽같이 일어나 저녁 늦게까지 일을 하지만, 더 일찍 일어나 일을 하는 성실한 분들이 계시다.
그런 이들은 논밭을 돌보는 그 근면함에 감화되어 마을 사람들 사이 여러 날 오래 회자가 된다. 그러나 반대로 밭에 풀이 너무 자랐거나, 때를 놓친 것 같아도 말이 나오게 마련이다. 이건 단지 논밭의 문제가 아니라, 혹시 그 집에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닌가 안부를 물어야 할 사안인 것이다.
▲ 울창한 고구마밭 |
ⓒ 최새롬 |
거대하고 현실적인 인스타그램. 겨울부터 준비하는 봄의 피드. 질서 정연하게 심는다. 여름의 게시물은 단연 왕성한 푸름이겠다. 이모지와 태그를 활용해 게시글을 쓰는 것처럼, 적시에 또 필요한 곳에 병충해 예방을 잘 하는 일도 중요하다.
풀을 뽑는 일은 보다 자주 있어야만 한다, 인스타에서 시시때때로 '스토리(24시간 이후 삭제되는 게시물)' 올리기 등으로 관심과 '좋아요'를 부르는 것처럼 말이다. 어떻게 생겼는지도 눈에 다 담기 어려운 현실 인스타그램. 보는 사람은 동네 사람이 전부지만, 저마다 엄청나게 큰 피드를 애써서 꾸린다.
고구마밭 잡초를 뽑다 보니, 앞서 오리걸음으로 걸었던 양파밭의 작업이 더 나은 노동조건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떠올려보면 양파밭의 일은 '쪼그려+걷기'였다. 그러나 고구마밭 풀매기는, 쪼그려 앉아서 잡초를 다 뽑을 때까지 거기 '체류'해 있어야만 한다. 그것도 그냥 앉아 있는 게 아니라 땅을 향해 수그려 앉은 채로 말이다.
쪼그려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
▲ 고구마 밭의 잡초. 어느 정도 뽑아낸 뒤라, 이 정도면 거의 없다고도 할 수 있다. |
ⓒ 최새롬 |
나는 그늘진 얼굴로(작업날은 땡볕이라 얼굴에 그늘은 전혀 지지 않았다) 아까 웃었던 나를 반성했다. 잡초의 키는 서 있는 사람의 허리가 아니라, 앉아서 작업하는 사람의 허리만큼의 높이였다.
게다가 고구마밭의 잡초들은 뭐랄까, 거의 고구마나 마찬가지였다. 전혀 다른 외양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그들은 자신을 고구마라고 여기는 게 분명했다. 고구마와 한몸인양 자라고 있었다는 뜻이다. 어떤 잡초는 고구마 뿌리를 억세게 휘감고 있어서, 아무리 애를 써도 뽑아낼 수조차 없었다.
고구마 이파리는 고구마 덩굴 사이사이에 잘도 삐죽삐죽 나왔다. 꽃꽂이 같은 미감으로 보자면, 하트 모양의 잎사귀 사이를 지루하지 않게 보이면서도 안정감 있게 솟아있어 묘한 균형감이 느껴졌다.
오후부터 해가 질 무렵까지 부모님과 나는 여섯 고랑을 맸다. 풀이 어지간한 고랑은 다음에 매기로 했다. 우리는 양파밭 때보다 더 어기적거리면서, 할 말을 잊은 채로 집에 돌아왔다. 집에 왔을 때쯤 어머니가 말씀하신다.
"고구마를, 그냥 먹는 게 아니여~"
그렇다. 이 풀을 다 매야 고구마가 자랄 수 있다! 통상 먹으려고 산 고구마에서 잡초의 기미는 조금도 보이지 않겠지만, 당신이 손에 들었던 그 고구마는 저 좁고 긴 고랑에서 풀 매는 사람들의 발소리를 듣고 자랐을지 모른다. 우리 고구마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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