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에서] 반일·반공의 무한 루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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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김수영이 1960년 12월 25일에 쓴 일기의 한 대목이다.
永田絃次郞(나가타 겐지로)은 일본에서 활약하다 해방 후 북한으로 간 성악가 김영길의 창씨명이다.
해방 이후 한국 사회를 짓누르는 두 개의 강력한 금기, '반공'과 '반일'에 대해 저항했다는 뜻이다.
두더지 잡기 게임처럼 반일이 쑥 들어가자 옆 구멍에서 반공이 다시 튀어나오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씁쓸한 기분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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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永田絃次郞’과 ‘○○○○○’를 함께 월간지에 발표할 작정이다. […] 암만해도 나의 작품과 나의 산문은 퍽 낡은 것같이밖에 생각이 안 든다. 내가 나쁘냐 우리나라가 나쁘냐?”
시인 김수영이 1960년 12월 25일에 쓴 일기의 한 대목이다. 永田絃次郞(나가타 겐지로)은 일본에서 활약하다 해방 후 북한으로 간 성악가 김영길의 창씨명이다. ‘친일파’와 ‘빨갱이’를 온몸으로 구현한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이란 시의 제목은 나중에 발견된 유고를 통해 ‘金日成萬歲’(김일성만세)였던 것으로 밝혀졌다. 김철 연세대 명예교수는 ‘우리를 지키는 더러운 것들’이란 책에서 “김수영은 ‘빨갱이’와 ‘친일파’를 씻어냄으로써 흠 없는 순결에 이르고자 하는 민족·국가의 욕망에 가차 없이 침을 뱉었다”고 평했다. 해방 이후 한국 사회를 짓누르는 두 개의 강력한 금기, ‘반공’과 ‘반일’에 대해 저항했다는 뜻이다.
김수영이 저 일기를 쓴 시점은 정전협정 체결 후 불과 7년이 지났을 때다. 올해는 정전 70주년이다. 정말 많은 세월이 흘렀는데 그동안 우리 사회를 짓누르던 두 개의 금기는 사라졌을까?
문재인정부 때 ‘반공’은 사라진 줄 알았다. 남북 화해의 달뜬 분위기 속에 “김정은은 계몽군주”라는 찬미가 나오고 ‘백두칭송위원회’까지 만들어지던 때였으니 반공은 박제된 구닥다리 구호로 느껴졌다. 대신 ‘반일’은 조금도 위축되지 않고 맹위를 떨쳤다. 대통령부터 “다시는 일본에 지지 않을 것”이라며 전의를 불태웠으니 말이다.
정권이 바뀐 뒤 양상은 또 급변했다. 윤석열 대통령의 올해 광복절 경축사를 보면 확연히 느낄 수 있다. 윤 대통령은 공산전체주의를 맹종하는 반국가세력이 여전히 활개치고 있다면서 이들에게 속거나 굴복해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없어진 줄 알았던 반공이 되살아난 것이다. 대신 반일이 없어졌다. 윤 대통령은 과거사에 대한 언급 없이 일본을 ‘협력 파트너’로 규정했다.
반일이 사라진 것은 바람직하다. 오랜 원한에 계속 사로잡혀 있으면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다. 또 북한과 대만 문제 등 동북아시아의 안보 리스크에 대비하려면 한·미·일 공조가 필요하고, 이를 위해선 한·일 관계가 좋아져야 한다. “과거를 반성하지 않는 일본과 협력이 웬 말이냐”는 식의 반발은 아무것도 하지 말자는 얘기다. “같은 민족인 북한과 맞서려고 일본과 손을 잡다니”라는 한탄도 너무나 시대착오적이고 현실과 동떨어진 인식이다.
두더지 잡기 게임처럼 반일이 쑥 들어가자 옆 구멍에서 반공이 다시 튀어나오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씁쓸한 기분이 든다. 주사파 같은 반국가세력이 지금 이곳에 없다는 얘기가 아니다. 있더라도 위기의식을 느낄 정도는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불온한 세력이 준동한다는 과장된 표현에 고개를 끄덕이며 경각심을 가질 국민이 얼마나 될까 싶다. 금태섭 전 의원은 “광복절 78주년을 맞은 대한민국이 고민해야 할 가장 중요한 문제가 토착왜구나 공산당이란 말인가”라며 “거울에 비친 똑같은 모습을 보는 것 같다. 어쩌면 양쪽(전·현 정권)이 모두 이렇게 퇴행적이고 수구적인지”라고 지적했다. 반일에 매달리는 쪽이나 반공에 열을 올리는 쪽이나 모두 과거지향적이다.
반일과 반공이라는 두 개의 금기가 사회적 통합을 유지하는 기능을 하던 때는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친일파와 빨갱이를 모두 씻어낸 순결의 상태가 가능한지 의문이고, 그것이 필요한지도 모르겠다. 국가나 민족이 그런 상태를 욕망한다면 김수영처럼 침을 뱉고 싶다.
천지우 정치부 차장 mogu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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