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호의 시시각각] 암탉마저 울지 않았다면…
재앙의 시작은 지진이었다. 서울 전체를 집어삼킨 대지진으로 모든 게 폭삭 주저앉았다. 오직 아파트 한 채만 살아남았다. 황궁아파트다. 한데 고관대작·억만장자가 으스대는 곳이 아니다. 흔한 서민아파트다. 이름과 실체의 어긋남이다. 그래도 낫다. 웬만한 연립주택에도 ○○팰리스, ○○캐슬 등 황궁에 대한 선망이 이글대는 오늘날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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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공포
100년 전 간토 대지진의 학살극
차별·혐오는 국가폭력의 두 얼굴
」
재앙의 ‘끝판왕’은 사람이었다. 사방천지가 잿빛 먼지로 무너진 세상, 그곳에서 유일하게 생존한 아파트 주민들의 ‘나 살고, 너 죽자’ 전쟁이 섬뜩하다. 그들은 바깥 세계와 높은 담장을 쌓아 놓고 ‘으라차차 황궁~’을 외치며 적의를 불태운다. 외부에 대한 그들의 차별과 배제는 ‘천하태평’의 버팀목이었다.
역시 재앙의 시작은 지진이었다. 1923년 9월 1일, 일본 도쿄와 간토 일대에 강진이 발생했다. 진도 7.9, 최악의 피해를 기록했다. 이재민 340만여 명, 사망자 9만여 명에 달했다. 재산 손실도 이루 셀 수 없었다.
간토 참사의 후폭풍은 엉뚱하게 흘렀다. 일본 정부는 재일 조선인을 희생양으로 삼았다. 즉각 계엄령을 선포하고 조선인 폭동설을 퍼뜨렸다. 조선인이 방화를 일삼고, 우물에 독약을 타고 다닌다는 헛소문이 급속도로 번졌다. 지진이란 천재(天災)가 조선인 혐오라는 인재로 비화했다. 무려 6000여 명의 조선인이 학살됐다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와 100년 전 대참사를 바로 견줄 순 없다. 무엇보다 영화에선 재난을 수습하는 국가의 역할이 100% 거세된 반면 간토 대진재(大震災)에선 국가가 ‘조선인 사냥’을 주도한다. 일본어로 ‘15엔 50전’을 제대로 발음하지 못하거나, 일본 교육칙어나 역대 천황을 외지 못하면 창칼을 맞기 일쑤였다.
두 지진은 다른 듯 닮아 보인다. 영화 속 국가의 부재나 역사 속 국가의 과잉은 이란성 쌍둥이와 같기 때문이다. 사회 구성원 간의 혐오와 차별, 이른바 편가르기를 묵인 또는 조장한다는 의미에서다. 결국 남는 것은 ‘재주껏 살아라’라는 각자도생의 살풍경이다.
문학평론가 김응교의 신간 『백년 동안의 증언』에 처음 완역된 일본 시인 쓰보이 시게지의 장시 ‘15엔 50전’의 한 구절을 보자. ‘당신들(조선인)을 죽인 것은 구경꾼이라고 할까?/ 구경꾼에게 죽창을 갖게 하고, 소방용 불갈구리를 쥐게 하고, 일본도를 휘두르게 한 자는 누구였던가?/ 나는 그것을 알고 있다.’
물론 우리도 ‘그것’을, 또 지금껏 ‘그것’의 존재를 부정해 온 일본 정치권을 알고 있다. 지난 20여 년간 간토의 흔적을 답사해 온 저자는 말한다. “반일(反日)이 아니라 한국과 일본의 평화를 기원한다. 한·일 사이의 100년을 기억하는 것은 새로운 미래를 향한 기회다. 희망은 과거의 기억에서 나온다.”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주민대표(이병헌)에게 반발하는 한 여성(박보영)에 의해 금이 가기 시작한다. 주민대표는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며 얼굴을 찌푸린다. 그런데 왜 수탉은 울지 않았을까. 암탉이 없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백년 동안의 증언』에서도 조선인 학살을 은폐하려는 일본 권부를 성토해 온 사회운동가·문인 등 수많은 ‘암탉’이 홰를 친다.
윤석열 대통령이 1박 4일 빠듯한 일정 속에 한·미·일 정상회의를 마치고 어제 돌아왔다. 북·중·러에 맞서는 자유진영 3각편대를 다졌다. 하지만 출국 직전 광복절 경축사는 여전히 논란이다. 대통령은 “우리 사회에 반국가세력이 여전히 활개 치고 있다”며 으름장을 놓았다. 정부에 비판적인 이들을 공산주의 세력으로 몰고 갔다. 옛 권위주의 시대에 많이 들었던 말이다. 정말 그럴까. 야권의 고질병처럼 ‘콘크리트 지지층’만 바라보는 외눈박이 시선이 아닐까. 대통령이 그토록 강조하는 ‘자유’와도 충돌한다. 일본 우익 세력처럼 한쪽만의 자유·평화는 상대에겐 엄청난 폭력이다. 철근(균형감각)이 부실한 아파트(정부)는 언제나 위태롭다.
박정호 수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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