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2035] 형벌은 구원이 될 수 있을까
MBTI 유형 중엔 걱정을 많이 하는 성격이 있다. ENFJ는 티는 안 내지만 속으로 걱정이 많은 유형이다. 최근 길을 걷다 보면 속으로 온갖 시뮬레이션을 한다. 앞에 걸어오고 있는 저 사람이 주머니에서 칼을 꺼내 갑자기 찌르면 어떡하지. 발로 차서 칼을 떨어트릴 수 있을까, 역시 도망을 가야 할까. 그러나 따라잡히겠지. 다행히 별일 없이 지나친 뒤엔 휴대전화로 호신용품을 찾아본다.
한 달 전인 7월 21일 서울 신림동에서 시작한 칼부림이 여전히 이어지는 모양새다. 경기 분당 서현역에서 최원종이 칼을 들었고, 신림동 등산로에선 너클을 끼고 무차별 폭행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한 달 새 이어진 세 사건에서 모두 3명의 피해자가 사망했다. 19일엔 서울 지하철 2호선 합정역에서 50대 남성이 휘두른 흉기에 2명이 다치기도 했다.
경찰청 범죄통계에 따르면 살인·강간·강도·절도·폭력 등 5대 강력범죄 중 칼을 흉기로 사용한 사건은 2011년 6549건에서 2021년 7900건으로 1351건(20.6%) 늘었다. 형벌을 강화해야 한다는 여론이 들끓자 법무부는 가석방 없는 종신형을 신설하기로 했다. 법원이 무기징역을 선고할 때 가석방 허용 여부를 결정하고, 흉악범을 영구적으로 사회에서 격리할 수 있도록 한다.
형벌이 우리를 범죄로부터 구원할 수 있을까. 신림동에서 칼부림을 벌였던 조선은 경찰이 도착하자 저항 없이 체포됐고, 서현역 칼부림 피의자인 최원종은 범행 후 주변을 걸어가다 붙잡혔다. 신림동 등산로 성폭행 피의자는 현장에서 체포됐다. 모두 도주하지 않았다. 어떤 처벌이든 두려웠다면 나오지 않았을 반응이다.
신림동의 조선은 부모와 교류가 없었고 무직이었다. 부산에서 살인을 저지른 정유정도 어린 시절 부모의 이혼으로 할아버지 집 등을 전전했고, 아버지에겐 가정폭력을 당했다. 그 역시 긴 시간 직업이 없었다. 가정환경이 어렵다고 범죄자가 되는 건 결코 아니지만, ‘묻지마 범죄’의 피의자들에겐 분명한 공통점이 있다.
사회 분위기상 형벌 강화는 불가피해 보인다. 특히 절대다수인 선량한 국민에게 안도감을 줄 수 있다면 필요한 조치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게 전부라면 같은 일은 또 일어날 터다. 끔찍한 살인을 저지른 이들이 과연 가석방이라는 개념을 알긴 했을까. 2012년 미국 영화관 총기난사로 12명의 사망자를 낸 제임스 홈스는 징역 3318년을 선고받았는데 미국 내 범죄는 끊이지 않는다.
낙오자를 양산하고 은둔형 외톨이를 만드는 사회. 이런 본질적 문제가 법으로 해결하는 문화에 가려진다. ‘수사-기소-판결’로 이어지는 형사소송 절차는 ‘도라에몽 주머니’가 아니다. 법이 우리의 안전을 지켜줄 수 있을까. 조선과 최원종이 죽을 때까지 감옥에서 나오지 못한다고 한들 머릿속 시뮬레이션은 멈추지 않을 것 같다.
정진호 경제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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