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헌이란 이름만으로 갖는 기대와 믿음 [D: 인터뷰]
이병헌은 각각의 캐릭터를 깊이 이해하고 본질을 표현해 내며 관객들에게 짜릿한 전율을 선사할 수 있는 배우 중 하나다.
그의 연기는 단순히 스크린 위에서의 순간이 아니라, 현실적이고 공감 대상이 되며, 우리의 내면에 다가가는 힘을 지니고 갖고 있다. 이병헌은 신작 '콘크리트 유토피아' 관객의 기대를 배반하지 않았다.
영화가 개봉한 후 대지진으로 폐허가 되어버린 서울, 유일하게 남은 황궁 아파트의 리더로 군림하는 영탁을 연기한 이병헌을 향한 찬사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이병헌은 김영탁이란 인물을 통해 '콘크리트 유토피아'에서 모든 걸 잃고 남은 건 아파트밖에 없는 남자의 집착을 불쾌함을 뚫고 설득력을 전달했다.
박찬욱 감독은 '콘크리트 유토피아' GV에 참석해 "특히 이병헌 연기의 역사에서 새로운 장을 열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라고 극찬하기도 했다. 매번 대중을 놀라게 하는 연기를 선보이는 그는 캐릭터에 젖어드는 걸 최우선으로 생각한다.
"'이번엔 이런 연기 했으니 다음엔 새로운 거 해야지' 이런 건 없어요. 그런 노력을 할 바에야 내게 주어진 캐릭터를 조금 더 깊이 있게 들어가 연구하는데 쓸 것 같아요. 병의 모양에 따라 물을 넣으면 물의 모양이 바뀌는 것 같은 배우가 있는가 하면 자기 색깔이 뚜렷하지만 그게 매력인 배우가 있죠. 어떤 것이 더 좋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지만, 두 가지 중에 나는 어떤 스타일의 배우인가 막연하게 궁금하긴 했어요. 저는 캐릭터의 삶에 젖어들어 그 안에 가깝게 하는 노력을 하다 보면 인물이 만들어지는 것 아닌가 싶어요."
이병헌은 처음부터 '콘크리트 유토피아' 시나리오가 자신의 마음에 꼭 들었다고 밝혔다. 시나리오의 매력이 영상으로 만들어졌을 때 잘 전달될 수 있을까 걱정도 됐지만 완성본을 본 후 한층 더 확신과 자신감이 생겼다. 그리고 이를 집념으로 완성해 낸 엄태화 감독에게 공을 돌렸다.
"시나리오를 읽고 '아 나 이런 블랙코미디 좋아했었지'란 그런 생각이 새삼스럽게 들더라고요. 이런 장르는 이전부터 있었지만 오랫동안 우리가 못 봤죠. 너무 신나서 출연하기로 결정했어요. 이후에는 이 영화의 만듦새가 어떻게 나올까, 이야기를 잘 받쳐줄 수 있게 만들어질까, 걱정이 되기도 했어요. 영화를 만들어놓고 본의 아니게 긴 시간을 기다려야 했는데, 이 시간이 오히려 우리에게 도움이 된 것 같아요. 엄태화 감독이 이걸 한 땀 한 땀 열심히 후반작업을 했구나 느껴졌죠. 영화가 완성되는 동안 편집본을 몇 번 봤는데 볼 때마다 영화가 달라지더라고요. 정말 하루도 쉬지 않고 편집실에서 살았구나란 생각에 고마웠어요."
이병헌은 황궁 아파트 주민인 영탁이 우리 주변에 있을 법한 인물로 그리고 싶었다. 소시민이 권력과 집착으로 어떻게 변해가는 지 효과적으로 보여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었다. 엄태화 감독 역시 동의했다.
"특이한 인물이 아니었으면 했어요. 내 집 마련의 꿈이 무너지자 분노와 상실감을 가진 불쌍한 소시민의 느낌이 영탁의 시작이었어요. 흔히 볼 수 있는 인물이어야 관객의 감정이입이 쉬울 것 같았거든요. 그래야 극단적인 상황 속에 변해가는 영탁의 모습들도 더 재미있을 것 같았고요. 절대 선과 악 이분법적으로 접근하지 않았어요. '콘크리트 유토피아'에 나오는 모든 인물들이 그렇잖아요. 그런 인물들에서 보이는 감정과 갈등이 잘 보여야 했어요."
배우에게 한 번도 겪어보지 않은 상황 속 인물을 연기한다는 건 자신을 믿고 고민과 불안함을 극복해나가야 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나한테 이런 얼굴이 잇었나 싶더라고요. 보통 배우들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연기할 때 자신 있게 할 수 있어요. 경험이 확신을 주니까요. 그런데 겪어보지 않은 상황과 감정을 연기할 땐 상상에 기대야 하니 이런 점이 관객들에게 보이기 전까지 조금 힘들긴 해요. 내 감정이 설득력이 없어서 감정이입이 되지 않으면 어쩌나 늘 불안하죠. 그런데 영화를 보신 분들의 반응이 좋아서 다행이었죠."
많은 관객이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하이라이트로 영탁이 주민들 앞에서 윤수일의 '아파트'를 부르는 장면을 꼽는다. 슬픔과 분노가 공존하는 표정이 클로즈업과 플래시백으로 이어지는데, 잘 보면 그의 다리는 리듬을 타고 있다. 사실 이 장면은 리허설이었다.
"이 영화의 가장 매력이 긴장감이 해소되진 않지만 중간중간에 피식거리게 만드는 그런 요소들이에요. 전 그게 이 영화의 정서라고 생각했어요. 그런 모습들이 이 신에도 잘 드러나죠. 특히 영탁이 노래를 하는데 플래시백으로 빠지는 신을 너무 좋아해요. 아주 묘한 감정을 불러일으키잖아요. 엄 감독님은 리허설을 카메라 돌리면서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이 컷이 쓰였을 때 감독님의 센스가 효과를 발휘했다고 생각했어요."
재난이라는 특수한 상황을 제거하면 영탁은 어디에나 있을 법한 평범한 사람이다. 이병헌은 일반적인 캐릭터를 연기할 때 가장 자신감이 붙는다.
"일반적인 사람의 감정을 관찰하는 게 몸에 베여있어요. 예를 들면 저 사람이 왜 저런 성격이 됐는지, 왜 그런 버릇을 갖고 있는지 등을 연구하죠. 배우 뿐만 아니라 화가, 작곡가 등 예술 영역의 직업을 가진 사람들은 일반적인 감정과 정서를 잘 볼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저는 인간의 보편적인 감정들을 표현하는 게 가장 쉽고 재미있어요."
'연기의 신'이라 불리는 이병헌. 배우 생활을 하며 연기에 대한 극찬을 매번 듣는 그지만, 아직도 다음이 궁금한 배우가 되고 싶다.
"계속 보고 싶은 배우이고 싶어요. 연기를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서 '이병헌이 나오는 영화 다음에 또 봐야지'란 기대를 관객들에게 오래오래 주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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