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세돌도 우승 못한 대회…'現 최강' 23세 신진서 목숨 걸었다
‘바둑 올림픽’ 응씨배 결승 3번기 21일 개막
짧지만 강한 한 마디. 신진서 9단이 중앙일보에 보낸 출사표다. 신진서는 좀처럼 인터뷰를 피하지 않는 기사다. 응씨배 결승을 앞두고서는 달랐다. 언론 인터뷰를 정중히 거절하고 있다고 했다. 한국기원을 통해 각오라도 밝혀달라 했더니 ‘사활(死活)’ 두 글자를 보내왔다. 죽기와 살기. “목숨을 걸고 둔다”는 출사표는 원래 조치훈 9단의 것이다. 휠체어 대국도 불사했던 전설의 승부사처럼 신진서도 천하의 승부를 앞두고 목숨을 말했다.
세계 최고 권위의 바둑 대회 ‘응씨배(응창기배. 중국어 표기를 따르면 ‘잉창치배’. 여기에선 한국기원의 대회 표기를 따름)’ 제9회 결승 3번기 1국이 21일 중국 상하이에서 시작한다. 한국의 신진서 9단이 중국 셰커 9단과 세계 최강자 자리를 놓고 백척간두의 승부를 겨룬다. 응씨배는 여느 국제 기전과 차원이 다른 대회다. 말하자면, 국제 바둑 대회의 원조이자 중심이라 할 수 있다. 한국과의 인연도 각별하다.
바둑 올림픽
응씨배는 특별하고도 특이한 바둑 대회다. 응씨배를 흔히 ‘바둑 올림픽’이라 하는데, 4년마다 열리는 유일한 바둑 대회이기 때문이다. 대신 상금이 어마어마하다. 우승 상금만 40만 달러(약 5억4000만원), 전체 상금 규모는 115만 달러(약 15억4400만원)에 달한다. 해마다 열리는 삼성화재배의 우승 상금이 3억원이니 4년을 다 합하면 응씨배보다 상금이 많다고 할 수 있으나, 응씨배는 1988년부터 우승 상금 40만 달러를 내걸었었다. US오픈 골프대회 우승 상금이 18만 달러(약 2억4000만원)였던 시절이다. 대회 창시자 잉창치 선생이 돌아간 뒤 현재 응씨배는 잉창치바둑기금회에서 주최하고 있다.
■ 세상에서 하나뿐인 바둑 규칙
「 응씨배는 독자적인 바둑 규칙을 적용하는 유일한 국제 기전이다. 이른바 ‘전만법(塡滿法)’이라고 부르는데, 잉창치 선생이 30년 연구 끝에 고안했다 하여 ‘응씨룰’이라고도 한다. 잉창치 선생이 밝힌 응창기배 개최 이유가 전만법 보급이었다. 현재 적용되는 바둑 규칙보다 복잡하고 불편해 애초 기대보다 보급은 지지부진하지만, 논리적으로는 허점이 없는 규칙이라고 한다.
설명하면 이렇다. 바둑은 집을 세는 게임이다. 반면에 응씨룰은 점(點)으로 승부를 낸다. 하여 응씨배엔 승부를 내기 위해 상상해낸 반집이 없다. 흑백 모두 180개씩 돌을 갖고 시작하며, 끝나면 통에 남은 자신의 돌로 자신의 집을 메운다. 낯설고 어렵지만, 현재 통용되는 규칙에 적용하면 덤 7집 반에 해당한다. 응씨룰은 8집으로 표현한다. 보통 중국 바둑은 백에게 덤 7집 반을 주고, 한국과 일본은 덤 6집 반을 준다. 중국 대회처럼 응씨배도 백이 유리하다. 공식적으로 덤이 없어 무승부(바둑에서는 ‘빅’이라고 한다)가 나올 수 있다. ‘판 빅’이 나오면 흑 승이다.
제한시간은 각자 3시간(원래는 3시간 30분이었는데 줄었다). 초읽기가 없다는 게 또 특이하다. 대신 추가시간이 주어진다. 추가시간은 모두 두 번 쓸 수 있는데, 한 번에 20분씩 사용할 수 있다. 대신 벌점 2점을 내야 한다. 두 번의 추가시간마저 다 쓰면 시간패를 당한다. 프로 기사들은 “계산법은 어렵지 않은데, 초읽기가 없는 게 부담이 된다”고 입을 모은다.
」
응씨배와 한국 바둑
역대 응씨배는 모두 8명의 챔피언을 배출했다. 그중에서 5명이 한국 기사다. 특히 한국 바둑은 1회부터 4회까지 16년 내리 우승컵을 독점했다. 우승자 순서도 의미가 있다. 1회 조훈현, 2회 서봉수, 3회 유창혁, 4회 이창호. 한국 바둑 최강자 계보를 그대로 따랐다. 한 시절 ‘사천왕’으로 불렸던 한국 바둑의 고수들이 차례로 응씨배 우승컵을 들어 올렸다. 응씨배 상금이 안 오른 이유 중 하나가 대만 재벌이 만든 바둑 대회 상금을 한국이 싹쓸이하다시피 해서였다는 얘기도 있다.
한국이 처음부터 세계 바둑 중심에 있었던 건 아니다. 제1회 응씨배가 개막했던 1988년. 주최 측이 전 세계 강자 16명을 초청했는데, 한국은 조훈현 한 명만 불렀다. 프로기사 제도가 없는 미국과 호주도 한 명씩 초청했으니, 한국 바둑으로선 이만한 수모도 없었다.
그래서 조훈현의 초대 응씨배 우승은 위대한 승리다. 한국 바둑을 대놓고 무시한 세계 바둑에 보기 좋게 한 방 먹였기 때문이다. 조훈현은 제1회 응씨배 8강에서 일본 일인자 고바야시 고이치 9단을 물리쳤고, 4강에선 대만 최강자로 일본 기원에서 활약 중이었던 린하이펑 9단을 꺾었고, 결승에서 중국의 자존심 녜웨이핑 9단을 상대로 극적인 역전승을 거뒀다. 일본·대만·중국의 최강자를 잇달아 무찌르고 세계 일인자에 오르는 과정은, 무림의 고수를 하나씩 격파하고 절대 고수에 오르는 무협지의 서사처럼 통쾌하고 짜릿했다.
응씨배 결승은 모두 8번 열렸고, 그 8번의 결승에 한국 기사가 모두 진출했다. 중국도 5번밖에 진출하지 못했다. 한국인 챔피언은 사천왕에 이어 2009년 6회 대회에서 우승한 최철한 9단까지 모두 5명이지만, 안타깝게도 그 이후 우승자를 배출하지 못하고 있다. 신진서 9단이 등장하기 전 한국 바둑을 이끌었던 박정환 9단이 7회와 8회 연속 결승에 진출했으나 마지막 고비를 넘기지 못했다. 알파고와의 대국으로 세계에서 제일 유명한 바둑 기사로 불렸던 이세돌 9단은, 응씨배와 인연이 없었는지 결승에도 오른 적이 없다.
코로나가 막은 결승전
응씨배 준결승전 3번기가 끝난 건 2021년 1월이었다. 준결승전이 끝난 뒤 바로 결승전이 열릴 것으로 기대했으나 주최 측이 다시 제동을 걸었다. 준결승전까지는 온라인 대국으로 치렀지만, 결승전만큼은 대면 대국을 해야 한다고 고집했다. 그렇게 하세월을 기다리다 2023년 8월 하순에야 결승전이 열리게 됐다.
예기치 않은 결승전 연기가 돌발 변수를 낳았다. 신진서의 결승 상대 셰커의 최근 성적이 급격히 떨어졌다. 준결승이 열렸던 2021년 초만 해도 셰커는 중국 최강자 커제 9단마저 위협하는 신예 강자였다. 9회 응씨배 성적을 보면 16강에서 LG배 우승자 양딩신 9단을 제쳤고, 8강에서 중국 일인자 커제를 꺾었고, 4강에선 일본 최강자 이치리키 료 9단에 2대 0으로 승리했다. 특히 8강에서 커제를 무너뜨렸을 땐 중국 바둑계가 들썩거렸다. 그러나 응씨배 결승 진출 이후 셰커의 국제 대회 성적은 1승 4패가 전부다. 16강 이상 진출한 적도 없어 대국 자체가 많지 않다. 2021년 1월 중국 랭킹 13위였던 셰커의 7월 현재 순위는 21위다.
반면에 신진서는 지난 2년간 세계 최강자로 군림했다. 국내에선 아예 적수가 없다. 무려 44개월간 1위를 독주하고 있다. 2021년 응씨배 결승에 오른 이후 신진서가 우승한 기록은 국내·국제 대회 통틀어 16회나 된다. 이 기간 모두 8차례 국제대회 결승에 올랐고, 이 중에서 4차례 우승했다. 4차례 국제 대회 우승 중에는 삼성화재배·LG배·춘란배 같은 메이저 대회도 3개나 된다.
준비는 끝났다
신진서와 셰커는 2000년생 동갑이다. 입단은 신진서가 1년 빠르다. 두 기사 모두 공격형 바둑을 선호한다. 수를 빨리 보고 수읽기에 강해 싸움을 마다치 않는다. 바둑TV에서 응씨배 결승전 해설을 맡은 박정상 9단은 셰커 기풍에 대해 “기세를 타는 스타일”이라고 말했다. 한번 수세에 몰리면 빠져나오기 쉽지 않다는 뜻이다. 그러나 형세 판단이나 끝내기는 신진서 9단이 우세하다는 평이다. 국제 대회 경험도 차이가 크다.
“셰커가 신예 시절 한국에서 바둑 유학을 했었습니다. 충암도장에서 바둑 공부를 했는데, 신진서도 충암도장에서 공부할 때였습니다. 그 시절 셰커가 신진서에게 하도 많이 져 신진서와 연습 대국하는 걸 꺼렸었다고 합니다. 심리적으로도 신진서가 유리한 결승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전문가 대부분이 신진서의 우세를 점치지만, 불안한 구석이 없는 건 아니다. 최근 신진서가 국제 대회에서 연이어 패배했기 때문이다. 6월 구쯔하오 9단과의 란커배 결승 3번기에서 1국을 쉽게 이겼으면서도 2, 3국을 내리 내줘 준우승에 그친 적이 있다. 7월에는 국수산맥 국제바둑대회 결승에서 신민준 9단에 패했고, 몽백합배 16강에서는 리쉬안하오 9단에 져 중도 탈락했다. 그러나 목진석 국가대표팀 감독은 “걱정 안 해도 된다”고 잘라 말했다.
“신진서가 최상의 컨디션이라고 할 순 없겠지만, 걱정할 수준도 아닙니다. 신진서도 강하게 마음을 잡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박정환·변상일 등 국가대표팀 선수들과 응씨룰 적응과 상대 선수 연구 등 훈련을 잘 진행해왔습니다. 전략이 노출될 수 있어 밝힐 수는 없습니다만, 셰커의 단점도 파악이 끝났습니다. 최근 국제대회 성적을 놓고 우려하는 분이 계시던데, 절대 비정상적인 게 아닙니다. 상대 선수가 다 초일류 기사들이었으니까요. 신진서가 한두 번 졌다고 이상한 결과가 아닙니다.”
목진석 감독의 장담은 기록이 증명한다. 란커배의 경우 32강부터 5번 이기고 2번 졌고, 국수산맥배도 16강부터 3번 이기고 한 번 졌고, 몽백합배는 64강부터 2번 이기고 한 번 졌다. 10승 4패. 71% 승률이다. 양재호 한국기원 사무총장에게 응씨배 결승 결과를 예측해달라고 부탁했다. 바로 “2연승”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
한국이 14년 만에 응씨배 우승컵을 되찾아올 것인가. 마침내 신진서는 세계 바둑 패왕에 등극할 것인가. 바둑 팬의 관심이 뜨거워지고 있다. 제9회 응씨배 결승 1국은 21일 오전 11시 30분 시작한다.
손민호 기자 ploves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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