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추도식서 30분 간 열변 토한 85세 일본 노교수

[현장] 도쿄에서 열린 김대중 대통령 서거 14주기 추도식

[박철현 기자]

▲ 김대중 대통령 서거 14주기 동경 추도식이 도쿄 신주쿠 KDX 빌딩 3층 대회의실에서 열렸다. ⓒ 박철현

 
"아빠, 벌써 다 찼어요. 저번보다 훨씬 많아!"

김대중 대통령 서거 14주기 추도식이 도쿄 신주쿠에서 열렸다. 참가자는 100명을 조금 넘었다. 같이 갔던 중2 아들은 3개월전 같은 장소에서 열린 5.18 광주민주화운동 기념식과 비교해 그 때보다 사람이 더 훨씬 더 많다며 놀라워 했다. 이번엔 둘째 딸이 누군가를 가리키며 말한다.

"어? 저 아줌마 4년 전에도 오지 않았어? 맞지?"

그가 가리킨 '아줌마'는 후쿠시마 미즈호 일본사회민주당 당수였다. 후쿠시마 당수는 2년전 줌(ZOOM) 미팅으로 개최됐던 온라인 추도식에서 특별강연을 했고, 딸아이가 말한 것처럼 2019년 도쿄 YMCA 회관에서 열린 추도식에선 추도사를 낭독했었다. 둘째 딸 유나는 초등학교 6학년 때 기억을 용케 떠올려 낸 것이다.

"너 기억력 되게 좋다. 맞아. 근데 그냥 아줌마는 아니고 정당의 대표니까 저 분 앞에서 대놓고 아줌마라 부르진 마라."
"당연하지. 그건 상식이야. 아빠."

추도식이 시작되기 1시간 전부터 당연하다는 듯 제일 앞자리를 차지한 두 아이를 바라보며 왠지 흐뭇해진다.
 

▲ 추도사를 하는 후쿠시마 미즈호 사민당 당수 ⓒ 박철현

 
8월 18일, 어느덧 열네 번째 추도식

8월 18일. 매년 이 날엔 김대중 대통령 추도식을 연다. 처음엔 우에노의 조그마한 식당에서 열서너명이 모여 조촐하게 고인을 기렸던 행사가, 해가 지나면서 상당한 규모로 발전했다. 이번 14주기 추도식엔 와다 하루키 도쿄대 명예교수가 김대중 선생과의 인연을 주제로 특별강연을 했다.

그 외에도 윤기 '고향의 집' 이사장, 임철 쓰다주쿠 대학 명예교수, 재작년 고인이 된 정경모 선생의 아들 정강헌씨를 비롯한 재일동포들, 김상열 평통일본동부지역 회장, 김운천 사랑의 나눔 이사장 등 뉴커머, 그리고 김대중 대통령을 가장 존경하는 정치인이라고 스스럼없이 말하는 수많은 일본인 참가자들이 회장을 가득 메웠다.

매년 이 행사에 참여하고 있는 스가누마씨는 "올해는 오프라인 추도식이 열리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실현되니 감사할 따름"이라며 국화꽃 한 송이를 김대중, 이희호 두분의 영정사진 앞에 공손히 놓았다. 4년만에 존경하는 분을 다시 뵙는다는 고마움이 고스란히 전달돼 온다.
  

▲ 헌화하는 참석자들 ⓒ 박철현

 
후쿠시마 당수는 추도사를 통해 김대중 선생과 그의 정치적 스승인 도이 다카코 전 사회당 당수의 인연을 소개했다.

"지난번에도 말씀 드렸지만 김대중 선생님과 우리 당은 1973년 8월 8일 (김대중 납치사건) 이후 떼어낼 수 없는 관계이다. 우리는 김대중 정신을 이어받아 일본사회에 만연되고 있는 배외주의, 헤이트스피치 등 차별적 행위에 맞서 싸워나갈 것이다. 동북아시아의 평화를 위해 언제나 노력할 것이며, 한일관계에 있어서도 선생님이 제창했던 한일 파트너십 정신을 다시 떠올려야 할 시기라고 생각한다."

임철 쓰다주쿠 명예교수 역시 "제 인생을 되돌아보면 김대중 선생님만큼 저를 포함해 우리 재일동포들의 사상과 행동에 영향을 미친 분은 없었던 것 같다"면서 "김대중 구출운동은 물론 한국 민주화 운동에 깊은 관심을 가질 수 있는 계기가 되신 분"이라 말했다. 임 교수는 의미심장한 말을 덧붙이기도 했다.

"1973년 8월 김대중 선생이 납치됐을 때, 당시 한국대사관 김재권 공사가 일본 미디어에 나와 '(납치는) 김대중의 자작극'이라는 말도 안되는 소릴 지껄였던 기억이 선명하다. 그런데 50년이 지난 지금 김재권의 아들 '성 김'이 미 국무부 대북정책 특별대표를 맡고 있다. 김재권은 마지막까지 그 망언에 대해 사과 한마디 안 했고, 성김도 모른 척 하고 있다. 이게 참 아이러니하게만 느껴진다."

30분간 열변 토한 85세 노교수

특별강연을 맡은 와다 하루키 교수는 85세라는 고령의 연세에도 불구하고 30분동안 물 한 모금 마시지 않으며 열변을 토했다.
 

▲ 특별강연을 하고 있는 와다 하루키 도쿄대 명예교수 ⓒ 박철현

 
"김대중 선생이 1973년 일본을 찾았을 때 사실 나는 그가 어떤 사람이고 누구인지 잘 몰랐다. 그런데 납치되던 그 날 월간지 <세카이>의 최신호가 마침 발매돼 그걸 읽다보니 야스에 료스케 편집장과 김대중의 대담이 실려 있었다. 그 대담에 소개된 김대중의 발언이 통찰력 가득했고, 특히 상당히 방어적이라는 부분에서 인상 깊었다."

"예컨대 그는 조선의 독립에 대해 '조선 민중도 물론 3.1 만세운동, 광주학생운동 등 지속적인 반발을 해 왔지만 독립 자체는 연합군의 힘으로 이뤄졌고, 그렇기에 한국의 민주주의는 자생적이라 볼 수 없는, 즉 주어진 민주주의'라고 말했다. 나는 그 부분을 읽으며 자연스레 일본을 떠올렸다. 일본 역시 그러했기 때문이다. 신선한 충격이었다."

와다 교수는 납치사건 발생 이후, 곧장 지식인 연대를 꾸려 성명을 발표하고 그 이후 지속적으로 발생한 한국 현대사의 고비고비마다 김대중 선생을 지지하고 또 연대하는 활동을 해 왔다고 말했다. 김대중 내란 음모 누명으로 그가 사형선고를 받았을 땐 사회당(도이 다카코 당수)과 연대해 '김대중을 죽이지 마!'라는 국제적 구명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했다. 결국 전두환 신군부는 국내외적 압력에 굴복해 김대중을 석방시키는 대신 해외에 머물도록 했다. 그리고 십여년의 세월이 흐른 1983년 와다 교수는 미국 워싱턴에서 김대중을 처음으로 만났다며 그 날의 감격을 잊을 수 없다고 말했다.

"워싱턴에서 브루스 커밍스 교수 등과 함께 김대중 선생을 만나러 갔다. 그는 나를 보자마나 내 손을 꼭 잡고 '와다 선생 반갑습니다, 선생이 나를 위해 애써주신 모든 것들 진심으로 고마워 하고 있습니다'라며 극진히 반겨 주었다. 실제로 본 김대중 선생은 내 상상보다 훨씬 더 거인이었다."

그 이후로도 와다 교수는 김대중 대통령이 돌아가실 때까지 인연을 이어 갔으며, 특히 김대중이 87년, 92년 두번의 대통령 선거에서 떨어지고 98년 집권을 하게 된 것을 오히려 다행이라 생각한다는 견해를 제시하기도 했다.

"돌이켜 본다면 한국은 비록 민주화는 되었지만 아직도 혼란스러운 시기였다. 노태우, 김영삼의 10년 집권을 통해 어느 정도 민주주의의 개념이 정착된 1998년에 집권한 것이 그의 생각과 이상을 펼치기에 더 좋았던 것이 아니었나라고 지금은 생각하고 있다."

추도식은 김달범 동경민주연합 대표의 "내년은 추도식은 물론이거니와 김대중 대통령 탄생 100주년이기도 하다"면서 "한국에서도 많은 분들이 오기로 예정돼 있으니 많은 참여를 부탁드린다"를 끝으로 끝났다.

추도식 후 두 아이의 반응

돌아오는 전철 안에서 아들이 이어폰을 끼고 뭔가를 듣고 있다. 뭐냐고 물어보니 방금전 와다 하루키 교수의 강연을 녹음한 음성파일이라고 한다. 대견한 마음에 그냥 쳐다보고 있는데, 갑자기 이어폰을 빼고 스톱 버튼을 누른 후 나에게 물어온다.
 

▲ 추도식에 참가한 두 아이. ⓒ 박철현

 
"아빠, 3개월 전에 아까 거기서 했던 행사가, 지금 이 할아버지가 말한 1980년 5월 광주 그 사건 맞지?"

깜짝 놀라 고개를 끄덕거리니 아들은 "아, 이게 다 연결되는 거였어"라며 득의양양한 미소를 띤 후 다시 이어폰을 낀다. 한편 둘째 딸은 추도식장에서 받은 '관동대지진 100주년 관련 행사' 팸플릿을 읽고 있다.

"왜 거기도 가게?"
"아니 여긴 못 갈 것 같은데… 그냥 신기해서."

"뭐가 신기한데?"
"몇십 년 전 길게는 이것처럼 100년 전 일을 기념하는 거? 난 아무리 생각해도 못할 것 같은데 아빠나 아빠 지인들은 매년 하잖아? 대단하고 존경스러워."

아들도 아들이지만 딸에게서 이런 말을 듣는 건 처음이라 새삼 울컥해진다. 4년 전 아직 그가 초등학교 6학년일 땐 아무 생각없이 어른들 용돈 받는 재미로 참가했던 애가 고등학교 1학년이 되어 처음으로 주체적 감상을 말하고 있으니 당연할지도 모른다.

문득 잘 살아왔다는 생각이 든다. 전철역에 내려 자전거에 올라타는 둘의 뒷모습이 한없이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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