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보면]오펜하이머가 핵무기 책임자로 발탁된 배경은(上)

이종길 2023. 8. 19.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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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토퍼 놀런 감독 '오펜하이머' 필연적 비극 다뤄
집에 반 고흐 작품 걸려 있을 정도로 어린 시절 유복
버클리에서 집단적 연구 조사로 학생들과 인간적 교류
그로브스가 오펜하이머 지휘 뜨겁게 지지한 까닭은…

"반항적인 그리스의 신 프로메테우스가 제우스로부터 불을 훔쳐 인류에게 주었듯이, 로버트 오펜하이머는 우리에게 핵이라는 불을 선사해주었다. 하지만 그가 그것을 통제하려고 했을 때, 그가 그것의 끔찍한 위험성에 대해 경고하려고 했을 때, 권력자들은 제우스처럼 분노에 차서 그에게 벌을 내렸다."

카이 버드와 마틴 셔윈이 저서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 서문에 적은 글귀다. 프로메테우스는 무사하지 못했다. 코카서스 바위산에 쇠사슬로 묶여 매일 독수리에게 간을 쪼였다. 오펜하이머는 매카시 반공 히스테리가 극에 달했던 시기에 가장 눈에 띄는 희생자가 됐다. 핵무기 의존도를 줄이자는 조언에 미국 정부가 충성심을 의심했다. 재판정에 세우고는 온갖 수모를 줬다. 그의 손에 묻은 피가 마르기도 전에….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은 '버림받음'이라는 감정에 주목하는 연출자다. 대표작 '인터스텔라', '메멘토', '인셉션' 등에서 꺼져가는 빛에 분노했다. 시간으로 대변돼온 적은 '오펜하이머'에서 사상과 이념으로 옮겨간다. 명성에 걸맞은 용기 있는 양심을 꺾어버린다.

어쩌면 필연적 비극이다. 지식은 맹렬히 성장하고, 매스 미디어의 영향은 계속 커진다. 공동체는 자기 보호를 위해 폐쇄적으로 변한다. 오펜하이머는 로스앨러모스에서 핵무기를 관장할 때부터 지나친 전문화와 분절화를 경계했다. 그에게 공동체는 요새이면서 소속과 상호 의존을 가능하게 하는 성역이었다. 공공의 지성이 피어나는….

"만약 어떤 사람이 우리와 다르게 세상을 본다고 말한다면, 우리가 추하게 여기는 것을 아름답다고 말한다면, 아마도 우리는 불편해하며 그 방을 떠날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우리의 약점이며 단점입니다. 만약 그 세상과 그 속에 사는 사람들이 우리보다 옳고, 그들이 우리를 위한다면, 그들의 기준을 우리 것으로 삼고 더는 위안을 찾지 맙시다."

'알고 보면' 좋을 정보를 두서없이 전달한다. 영화를 흥미롭게 관람하는 팁이다.

*오펜하이머는 1904년 4월 22일 뉴욕의 부유하고 자유로운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율리우스는 열일곱 살이던 1888년에 독일에서 미국으로 건너와 친척들과 옷감 수입 사업을 벌여 크게 성공했다. 어머니 엘라 프레드먼은 실력 있는 화가였다. 가족은 1840년대에 독일에서 볼티모어로 이민을 왔다.

*오펜하이머의 부모는 모두 예술, 특히 음악에 일가견을 가지고 있었다.

*오펜하이머에게는 남동생이 두 명 있었다. 한 명은 태어나자 죽었고, 다른 한 명은 프랭크다.

*오펜하이머의 가족은 창밖으로 허드슨강이 내려다보이는 넓고 아늑한 아파트 11층에 살았다. 롱 아일랜드 베이 쇼어에 여름 별장도 있었다. 성장한 오펜하이머는 "어린 시절을 돌아보면 어떤 식으로든지 고통이나 어려움을 경험하지 못했다"고 회상했다.

*오펜하이머의 집안 벽에는 반 고흐의 작품들이 걸려 있었다. 장식은 어머니의 몫이었다. 오른팔에 장애가 있어 항상 회색 실크 장갑을 끼고 있었다. 지인들은 그가 신경질적이고 정서적으로 쇠약해 항상 슬픈 낯빛이었다고 기억한다.

*오펜하이머의 가족은 펠릭스 애들러가 1876년 시작한 윤리문화 운동에 활발히 참여했다. 오펜하이머는 자연스레 윤리문화학교에 입학했다. 높은 학문적 수준과 자유주의 교육 이념을 추구하던 교육기관이었다. 성적이 우수하고 똑똑하지만 무언가 불안해 보였던 그를 아웃사이더로 만들지 않고 교육하기에 이상적이었다. 1921년 2월 윤리문화학교를 졸업한 오펜하이머는 이듬해인 1922년 하버드에 입학한다. 1년 공백은 이질을 심하게 앓아 생겼다. 그는 유럽을 여행하며 충분히 쉬었다. 1922년 여름에는 미국 남서부도 여행했다. 그는 당시 방문한 뉴멕시코 풍경에 반해버렸다.

*대학 시절 오펜하이머는 채광 기술자가 되려고 했다. 화학을 전공했지만 다른 전공과목도 청강했다. 그는 매년 여덟 과목이 아닌 열두 과목을 수강했다. 그 덕에 3년 만에 졸업했다.

*오펜하이머는 졸업반이 되었을 때 브리지먼의 실험실에서 금속 전도체의 압력 문제점 해결에 관한 연구에 집중했다. 그는 실험을 반복해 얻는 이해와 연구 경험을 값지게 여기면서도 실험과학이 적성과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하버드를 졸업하고 케임브리지 대학에 진학했다. 오펜하이머는 케임브리지의 전반적인 문화, 연구 실패로 인한 당황스러움, 하버드 시절 친했던 친구들이 결혼하면서 소원해진 관계 등으로 힘들어했다. 3년 선배였던 패트릭 블랙켓이 젊은 실험물리학자로서 성공하면서 자신을 가르치고, 몇몇 동료들이 실험에 성공하는 모습을 보며 우울증에 빠지기도 했다. 블랙켓의 책상에 청산가리로 추정되는 '독약 넣은 사과'를 놓을 정도였다. 다행히 적발돼 블랙켓은 무사했다. 오펜하이머는 학교 당국에 고발돼 퇴학당할 뻔했다. 부모의 개입과 상담 치료를 받겠다는 약속으로 겨우 제적을 면했다.

*오펜하이머는 항상 정서적으로 불안한 상태였다. 절친한 친구인 이사도르 라비는 "천성적으로 약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미국의 이론물리학자 실번 S. 슈위버는 저서 '아인슈타인과 오펜하이머'에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오펜하이머는 끊임없이 위험한 상황으로 자신을 몰아넣었다. 마치 폭풍우 속을 항해하듯이, 무모한 운전자처럼, 준비 없는 상행을 하듯이 자신을 둘러싼 사회와 끊임없이 좌충우돌했다. 그는 한 번도 건강해지는 방법을 배운 적이 없다. 지혜나 거만한 태도, 메말라 보이는 감성 아래에는 깊은 불안감이, 특히 자신의 창의성에 대한 의심이 항상 숨겨져 있었다."

*위기를 극복한 오펜하이머는 이론가가 되기로 결심한다. 연구에 투신한 1925년은 이론물리학이 급격한 변화를 겪은 원년이다. 베르너 하이젠베르크의 행렬역학이 발표됐고, 곧이어 막스 보른과 파스쿠알 요르단의 연구 결과가 공개되면서 비조화진동에 관한 커뮤니케이션 법칙 등이 소개됐다. 이듬해에는 에르빈 슈뢰딩거의 연구를 통해 파동 역학이 등장했다. 그 결과 원자 현상을 둘러싼 연구가 활성화돼 새로운 역학에 대한 분석적 토대가 마련됐다. 오펜하이머는 이렇게 급박하게 돌아가던 연구 진행 상황을 놀라울 만큼 빨리 소화했다. 특히 1926년 5월에는 분자 띠 스펙트럼 주기와 간극에 대한 양자물리학적 설명이 담긴 첫 논문을 발표했다. 그해 7월 수소 원자의 지속적 스펙트럼 및 파동 정상화에 관한 논문을 내놓기도 했다.

*오펜하이머는 1926년 독일 괴팅겐으로 이동해 막스 보른과 함께 연구했다. 새로운 파동 역학의 틀을 사용해 원자의 움직임을 설명하려고 했다. 그는 엑스레이 광선 방출에 대한 새로운 양자물리학적 설명을 통해 이전의 양자이론이 틀렸다는 것을 증명한 최초의 과학자다.

*오펜하이머는 괴팅겐에서 자신감이 넘쳤다. 보른이 주관한 세미나에서 다른 참가자들과의 마찰을 아무렇지 않게 여길 정도였다. 누구든지 자신과 의견이 맞지 않으면 언제든 단상에 나가 자기 생각을 흑판에 써 내려갔다. 참가자들은 이를 불쾌하게 생각했다. 세미나가 끝난 뒤 보른에게 오펜하이머의 행동을 제지하지 않으면 앞으로는 참석하지 않겠다는 쪽지를 보냈다. 오펜하이머에게 직접 말할 용기가 나지 않았던 보른은 그 쪽지들을 오펜하이머의 책상에 두었고, 이를 본 오펜하이머는 자제하기 시작했다.

*미국의 이론물리학은 뒤늦게 시작됐다. 1920년대 실험물리학자들이 양자물리학을 들여오고 나서야 비로소 체계적인 연구기관이 들어섰다. 오펜하이머는 버클리에서 자신만의 연구기관을 꾸리게 됐고, 1930년대에 자신의 이론적 관심사를 연구할 수 있었다.

*오펜하이머가 버클리에서 처음 대학원 수업을 진행했을 때 학생들은 그 수준에 질려 버렸다. 그러나 몇 년이 지난 뒤 그의 수업은 큰 인기를 끌었다. 특히 양자물리학 수업을 들은 학생들은 새로운 세계의 아름다움에 매료됐다. 한스 베테가 오펜하이머에게 바친 1966년의 찬사에는 "오펜하이머의 수업을 빛내는 가장 핵심적인 요소는 세련미일 것이다. 그는 무엇이 중요한 문제인지를 항상 알고 있었다. 그는 진실로 그 문제들과 살았고 해답을 위해 투쟁했으며, 학생들과 소통했다"라는 구절이 있다.

*오펜하이머는 강단에서 일방적으로 지식을 주입하지 않았다. 집단적인 연구 조사를 통해 학생들과 인간적으로 교류했다. 창의성이 집단적인 노력을 거쳐 발현된다는 신념이 있었다. 오펜하이머는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서로를 통해서 우리는 설명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오펜하이머는 우주선 실험을 통해 생기는 복잡한 실험 데이터를 분석하려고 양자물리학과 특수상대성을 통합했다. 그 덕에 새로운 타입의 이론물리학을 대표하는 주자로 부상했다. 그러나 실험 가능성이 제한적이라는 한계에 부딪혀 양자물리학 선구자들로부터 폭 디랙이나 하이젠베르크, 슈뢰딩거만큼 인정받지 못했다.

*1930년대는 소란의 시대였다. 경제적으로 대공황 시기였고, 독일에선 나치가 득세했다. 히틀러의 병적인 유대인 증오로 인해 독일 학자들은 영국, 미국 등으로 이민을 떠나기 시작했다. 에스파냐에선 시민전쟁, 소련에선 스탈린의 숙청 작업이 한창이었다. 오펜하이머의 신변도 위험해졌다. 연인 진 태틀록과 관계가 깊어지면서 에스파냐 공화제를 지지했기 때문이다.

*오펜하이머는 1940년 키티 푸에닝 해리슨과 결혼했다. 그의 전남편 조 달렛은 공산주의자였다. 에스파냐 전쟁에서 사망했다.

*1932년 9월에 2차 대전이 발발하고 이듬해 6월에 프랑스가 무너지자 오펜하이머는 서구 문명이 심각한 위험에 처했다고 믿었다. 영국이나 미국도 언제 무너질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는 공공연히 말했다. "우리는 나치의 위협으로부터 서구 문명을 지켜 내야만 합니다."

*오펜하이머는 1939년 1월 오토 한과 프리츠 슈트라스만이 핵분열에 성공했다는 소식에 큰 관심을 기울였다. 단번에 믿진 않았다. 버클리 연구진에게 핵융합 반응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다음 날 동료 루이스 앨버레즈와 켄 그린의 융합반응 시연을 확인하고 생각을 바꿨다. 앨버레즈는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나는 오펜하이머를 초대해 오실로스코프 속에서 발생하는 자연적인 알파입자 펄스와 핵분열로 인해 발생한 스무 배가량 큰 스파이크 펄스를 보여줬다. 15분이 채 안 되는 시간 동안 그는 연신 내 말에 동의만 하다가 곧 중성자의 양을 증가시키면 우라늄의 핵분열을 증가시킬 수 있고, 이를 통해 폭발적인 에너지를 얻을 수 있겠다고 예측했다. 나는 그의 빠른 판단력에 놀랐고, 실제로 그것은 정확했다. 과학자로서 그의 태도는 훌륭했다. 자신의 주장이라고 할지라도 일단 틀린 것이 확인되면 감사하는 마음으로 결과를 수용하고 곧바로 새로운 목표를 세워 달려갔다."

*핵분열 폭탄에 대한 개념은 오토 프리시와 루돌프 파이얼스를 위시한 영국 연구진에서 처음 제기됐다. 1942년 여름, 오펜하이머를 비롯한 수많은 이론가는 이 주제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오펜하이머는 학회를 열어 원자폭탄의 이론적 설계와 그 효용에 관한 연구를 이끌었다. 연구팀은 프리시와 파이얼스의 연구 결과를 뒷받침하는 동시에 더 효율적인 폭탄을 만들기 위한 U235의 양에 관한 결과를 얻어 냈다. 천연 우라늄에서 U235와 U238을 연구할 기회가 생기자 오펜하이머는 이를 기꺼이 수락했다. 더 빠른 핵분열 및 핵폭탄을 디자인하기 위한 계획을 맡았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으로부터 권한을 부여받은 레슬리 그로브스가 핵폭탄 프로젝트를 책임지면서 전체 프로젝트를 책임지게 됐을 뿐 아니라 그의 제안대로 뉴멕시코 로스앨러모스연구소에서만 핵 관련 연구를 총괄하게 됐다.

*그로브스는 1942년 10월 로렌스 방사선연구소의 사이클로트론을 통해 이뤄지는 U235와 U238 동위원소 분리 실험을 직접 확인하기 위해 버클리로 향했다. 오펜하이머는 그의 탁월한 이해 능력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당시 그로브스는 어니스트 로렌스에게 핵폭탄 개발 총책임을 맡길 수 있을지를 고민하고 있었다.

*그로브스는 1930년대 좌익 성향의 인사들과 연루된 전력이 있는데도 오펜하이머를 로스앨러모스연구소의 총책임자로 발탁했다. 독특한 과학·기술적 업적과 동료들로부터의 신망을 눈여겨봤다. 물론 이 결정의 저변에는 오펜하이머가 로렌스보다 통제하기 쉬우리라는 판단도 있었다. 로렌스는 오펜하이머와 달리 자기 확신이 강한 사람이었다. 노벨상까지 받아 관리가 어려우리라 생각했다.

*그로브스는 오펜하이머의 물리학 통찰력에 주목하면서 그가 아래 사람들을 통솔하는 카리스마와 권위에 절대적으로 복종하는 성향을 모두 가지고 있음을 간파했다. 또한 조국을 사랑하는 충성스러운 국민임을 알았기에, 과거를 무시하는 결단력을 발휘했다. 오펜하이머를 필두로 하는 로스앨러모스연구소는 1943년 봄 문을 열었다.

*전쟁 당시 로스앨러모스연구소에서 근무했던 물리학자들은 그 시기를 유토피아로 회상하곤 한다. 그들은 하나같이 나치 독일의 공격으로부터 서구 민주 문명을 지켜야 한다는 결의에 불탔다. 이를 위해서는 2년이나 먼저 핵무기 개발을 시작한 독일에 뒤지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자신들이 가담하고 있는 프로젝트가 성공하면 인류사에 새로운 획을 긋게 된단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인류 역사상 최초의 원자폭탄 테스트인 트리니티가 성공적으로 치러졌을 때, 평화 구축에 도움이 되리라 믿었다.

*폭발 실험은 1945년 7월 16일 뉴멕시코 중부 사막 조르나다 델 무에르토 지역에서 진행됐다. 트리니티라는 이름은 오펜하이머가 직접 지었다. "내 마음을 때리는 삼위일체의 하나님"이라는 구절로 시작하는 존 던의 시에서 영감을 얻었다. 힌두교의 세 신인 브라마(창조자), 비슈누(유지자), 시바(파괴자)로부터도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로스앨러모스연구소의 대다수 과학자는 오펜하이머의 지휘가 아니었다면 일본에 사용된 폭탄은 결코 제시간에 완성될 수 없었을 거라고 입을 모은다. 그 정도로 오펜하이머의 어깨에 지운 책임감은 누구보다 컸고, 따라서 그에게 돌아간 명예는 정당한 것이었다. 원자폭탄을 창조하는 데 가장 일조했다는 죄책감 역시 누구보다 클 수밖에 없었다.

*로스앨러모스는 다른 지역과 격리돼 있었다. 연구원들은 개인적 삶보다 공동체 일원으로서 삶을 공유했다. 마치 마술에 걸린 듯 하나의 큰 공동체라는 분위기에 젖어 들었다. 이를 형성하는데 누구보다 큰 역할을 한 장본인은 오펜하이머였다. 연구와 실험, 현실과 이상, 개인과 공동체 그리고 국가를 모두 자신과 동일시하고자 했다.

*오펜하이머의 사회적 전기를 다룬 작가 토르프는 로스앨러모스의 조직이 역동적이고 복잡해지면서 오펜하이머의 카리스마적 지휘력과 권위도 함께 형성돼갔다고 봤다. 원자폭탄 제작이라는 군사적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로스앨러모스에는 과학자는 물론 기술자, 군인 등 다양한 분야의 인사가 투입됐다. 오펜하이머의 권위와 카리스마 있는 리더십은 이들을 하나로 묶어 내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토르프는 로스앨러모스에서 오펜하이머와 그로브스의 상보적 역할과 관계에 관해서도 관심을 기울였다. 그로브스는 이 프로젝트의 실제 책임자였다. 권위적이고 강압적이며 군사적인 경영 스타일을 가지고 있었지만, 합의를 중시하고 학문적 태도로 과학자·엔지니어·전문가 등이 서로 협력하고 어울리게 하는 오펜하이머의 지휘법을 뜨겁게 지지해줬다. 오펜하이머가 만들어내는 작업 환경과 연구진의 협력이 결국은 자신의 권위 아래에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펜하이머는 모든 이를 아울러 집중력을 잃지 않고 원자폭탄 개발 프로젝트를 추진함으로써 많은 존경을 받게 됐다. 그로브스도 이런 리더십을 인정했다. 토르프는 다음과 같이 총평했다. "오펜하이머의 도덕적 자질과 통합적 지식은 파트 간 갈등을 탁월하게 봉합시켰다. 그는 아직 이뤄지지 않은 합의를 끌어내는 천부적인 연설가였다."

참고 자료 : 실번 S. 위버 지음·김영배 옮김·발행처 시대의창 '아인슈타인과 오펜하이머(2013)', 카이 버드 & 마틴 셔윈 지음·최형섭 옮김·발행처 사이언스 북스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2010)', 존 루이스 개디스 지음·정철 & 강규형 옮김·발행처 에코리브르 '냉전의 역사(2010)', 리처드 로즈 지음·문신행 옮김·발행처 사이언스북스 '원자폭탄 만들기 1·2(2003)' 등.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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