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관의 세계인문여행]자칫 만나지 못했을 해리포터·카프카·윤동주
영국은 철도의 나라다. 실핏줄처럼 퍼져있는 철도망의 허브가 런던이다. 워털루역, 패딩턴 역, 킹스크로스역, 리버풀스트리트역…. 이 중에서 젊은 방문객이 가장 많은 역은 킹스크로스역이다. 킹스크로스역을 찾는 방문객 상당수가 2030세대다. 이들은 약속이나 한 듯 플랫폼 9와 4분의 3을 찾아간다. ‘해리 포터’에서 호그와트 마법학교로 가는 직통열차를 타는 학생들의 전용 출입구가 플랫폼 9의 4분의 3이다.
MZ세대는, 다른 말로 하면 해리포터 세대다. MZ세대는 해리 포터를 책으로 읽고, 또 해리 포터를 영화로 보며 소년기와 청년기를 지났다. 그들에게 런던 여행의 첫 번째 핫플은 킹스크로스역이다.
조앤 롤링은 ‘해리 포터 시리즈’의 인세와 영화 판권으로 천문학적인 돈을 벌었다. 롤링이 이혼 후 싱글맘으로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에서 복지수당을 받으며 ‘해리 포터 시리즈’를 완성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진 이야기다. 최근 롤링이 팟캐스트 ‘JK 롤링의 마녀재판’에 출연해 털어놓은 첫 번째 결혼생활 이야기는 섬찟하다.
롤링은 1992년 포르투갈 사람 호르케 아란테스와 결혼했다. 롤링은 직장생활을 하며 틈틈이 ‘해리 포터 원고’를 쓰고 있었다.
“결혼생활은 매우 폭력적이고 통제적이었다. 내가 집에 돌아올 때마다 남편은 가방을 뒤졌고 내게는 현관 열쇠도 없었다. 나는 떠나지 않을 것처럼 연기해야 했다. 남편이 원고를 숨겨버렸다. 원고는 내가 떠나지 못하도록 남편이 잡은 인질이었다. 숨겨둔 원고를 찾아 남편이 눈치채지 못하게 매일 몇 쪽씩 빼내 직장에 가져가 복사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남편이 원고를 모두 불태우거나 볼모로 쓸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롤링은 폭행당한 날에 대해서도 있는 그대로 털어놓았다.
“떠나겠다고 말하자 그는 매우 폭력적으로 굴며 내가 딸을 데려가지 못하게 막겠다고 했다. 이 문제로 내가 싸움을 걸었고 그 대가를 치렀다. 내가 거리에 뻗어있는 폭력적인 장면으로 끝이 났다.”
소름이 끼친다. 그의 첫 남편이 이런 남자였다니! 만일 남편이 홧김에 원고 뭉치를 태워 버렸다면 어쩔 뻔했나. 롤링이 간신히 구해낸 원고를 바탕으로 ‘해리 포터와 마법사의 돌’을 출간한 게 1997년이다. 가정폭력범인 첫 남편. 아내를 도로 한가운데 끌고 가 때렸지만 그래도 원고를 불태우지 않았다는 사실에 그저 고마워해야 하는 걸까.
막스 브로트가 아니었으면…
올해는 체코 작가 프란츠 카프카(1883~1924) 탄생 140주년이다. 140주년을 맞아 여러 종류의 번역서들이 나온다. 카프카를 생각할 때마다 친구 막스 브로트가 자동적으로 떠오른다. 브로트가 없었다면 카프카라는 보헤미안 소설가가 존재할 수 있을까. 고개를 젓게 된다.
카프카는 살아생전에 소설가로 돈을 벌어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문학을 생계 수단으로 삼지 않았다. 프라하에서 그를 소설가로 기억하는 사람은 이삼십 명에 불과했다. 카프카야말로 죽고 나서 유명해진 경우다.
카프카는 내성적 성격을 타고났다. 여기에 강압적인 아버지 밑에서 자라다 보니 소심함까지 더해졌다. 1902년 카프카는 인생에서 결정적인 인물을 만난다. 막스 브로트다. 그는 이미 프라하에서 시, 소설, 희곡, 음악 등 여러 분야에서 주목받던 인물이었다. 브로트는 모든 면에서 카프카와 대조적이었다. 외향적이고 사교적이었다. 카프카는 자신이 갖지 못한 장점을 타고난 브로트를 좋아했다. 카프카는 브로트의 창(窓)을 통해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갔다. 연인 펠리체 바우어를 만난 것도 브로트 집에서였다.
카프카는 보험공단 직원으로 일하며 밤마다 글을 썼지만 자신의 능력을 믿지 못했다. 그의 습작 원고를 보고 작가적 재능을 알아본 사람이 브로트였다. 브로트는 카프카에게 계속 글을 쓰라고 용기를 불어넣고 격려했다.
카프카는 폐결핵을 앓고 있었다. 폐결핵이 악화되어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병실을 찾아온 브로트에게 카프카는 원고 뭉치를 건네며 유언했다.
“이 원고를 모두 불태워달라.”
브로트는 그렇게 하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브로트는 친구의 유언을 듣지 않고 전집을 출간했다. ‘성’ ‘심판’ ‘아메리카’ 등 카프카의 대표작들이 모두 브로트의 손으로 나왔다.
브로트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카프카 전기를 집필했다. 브로트의 카프카 전기는 카프카 연구의 1차 자료다. 모든 카프카 연구자들은 먼저 브로트 전기를 읽으며 카프카의 심오한 세계로 들어갈 마음의 준비를 한다. 브로트가 있었기에 카프카는 오랜 무명의 기간을 딛고 20세기의 작가로 설 수 있었다. 두 사람의 관계를 실체적으로 증명하는 공간이 카프카의 묘다. 카프카의 묘 맞은편 벽에는 막스 브로트의 이름이 붙어있다.
정병욱이 없었더라면…
윤동주(1917~1945)는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이다. 그의 ‘서시(序詩)’는 한국인이 애송하는 시(詩)다. ‘서시’는 유고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 맨 앞에 들어간다.
‘서시’는 1941년 11월 완성했다. 연희전문 문과 4학년 때다. 윤동주의 27년 생애 중 빛나던 기간은 연희전문 4년이었다. 연희전문 시절 윤동주는 우리가 기억하는 대부분의 시들을 써냈다. 문과 학생회지인 ‘문우(文友)’가 발간된 게 6월. 이 학생회지에 ‘새로운 길’과 ‘우물 속의 자화상’ 두 편이 실린다.
졸업을 앞둔 윤동주는 한가지 계획을 세운다. 그동안 써온 시들을 모아 자선(自選) 시집을 내자. ‘서시’를 포함해 19편의 시를 골랐다. 그리고 77부 한정판으로 출간하기로 하고 움직였다. 그러나 이 계획은 실현되지 못한다. 출간 비용 300원을 마련하지 못해서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윤동주는 궁리 끝에 필사본 시집을 만들기로 한다. 필사본 3부를 만들어 이양하 교수와 문과 후배 정병욱에게 각각 한 권씩 선물했다.
연희전문을 졸업한 윤동주는 일본 유학을 위해 창씨개명을 한다. 그 직후 쓴 시가 ‘참회록’이다. 5일 후 히라누마 도오쥬우(平沼東柱)가 되어 현해탄을 건넜다. 교토 도시샤대학 영문과에 재학중이던 윤동주는 1943년 7월14일 ‘조선인학생 민족주의 그룹사건’에 연루되어 이종사촌인 송몽규와 함께 체포되었고, 1945년 2월16일 후쿠오카 감옥에서 사망한다.
장례식은 1945년 3월 만주 용정의 윤동주 집에서 치러졌다. 1946년 2월16일 아버지 윤영석은 아들의 1주기 추도식을 열었다. 추도식이 끝나자 아버지는 차남 윤일주를 해방된 조국으로 내려보낸다. 서울로 가서 형의 연희전문 친구들을 찾아 형의 유품을 수집하라. 윤일주 나이 열아홉 살.
윤일주가 제일 먼저 만난 사람은 기숙사 룸메이트 강처중. 경향신문 기자로 있던 강처중은 윤동주가 일본 유학을 떠나며 맡겨두었던 책과 노트, 졸업앨범, 앉은뱅이책상 등을 4년 넘게 보관하고 있었다. 강처중을 통해 윤일주는 문과 2년 후배 정병욱을 만난다.
여기서 기적이 일어난다. 정병욱 역시 일제 말기 학병으로 끌려가면서 윤동주에게 선물로 받은 필사본 시집을 고향(전남 광양)의 어머니에게 소중히 간수해달라고 맡겨두었다. 정병욱은 일본의 패망과 함께 1945년 가을 기적적으로 살아 돌아왔다. ‘다행히 목숨을 보전하여 무사히 집으로 돌아가자 어머님은 명주 보자기로 겹겹이 싸서 간직해두었던 동주의 시고(詩稿)를 자랑스레 내주면서 기뻐하셨다.’
윤일주는 필사본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를 강처중에게 가져간다. 그리하여 1947년 2월13일자 경향신문에 윤동주의 시가 실렸다. 윤동주는 세상을 뜬 지 2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시인으로 탄생한 것이다.
1년 뒤인 1948년 1월30일 정음사에서 유고 시집이 나온다. 이 시집에는 일본 유학 시절 쓴 시 12편을 합쳐 31편의 시가 실렸다.
윤동주는 연희전문 후배 정병욱이 없었으면 시인이면서 시인이 되지 못했다.
조성관 작가·천재 연구가
'지니어스 테이블' 운영자, 전 주간조선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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