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승섭의 금융라이트]'기준금리 118%'…아르헨티나는 어디서부터 잘못됐나
IMF 구제만 30번…만신창이 된 아르헨티나
달콤한 포퓰리즘에 물들자 반복되는 악순환
미국 기준금리 인상에 외환위기 악화일로
엉망이 된 고정환율제, 문제 풀 지도자가 없다
'중앙은행 너마저'…캄캄한 아르헨티나의 앞날
‘기준금리 118%’
이 숫자가 믿어지시나요? 1억원을 맡기면 한해 이자만 1억1800만원이 나온다는 뜻입니다. 금리 10% 적금에도 줄을 서는 한국인 입장에서 도저히 상상하기 어려운 숫자죠. 이 말도 안 되는 기준금리가 적용된 나라는 바로 아르헨티나입니다. 아르헨티나는 대체 어쩌다 이런 무지막지한 기준금리를 갖게 된 걸까요?
기준금리는 각 나라의 중앙은행이 결정합니다. 기준금리를 올리고 내릴 때는 여러 요인을 고려하지만, 최우선 목표는 딱 하나입니다. 바로 ‘물가안정’이죠. 물가가 높으면 기준금리를 올리고, 물가가 낮으면 기준금리를 내립니다. 이를 통해서 적절한 인플레이션을 유지하고 건전한 경제환경을 조성하는 게 중앙은행의 목표입니다.
113% 살인물가에 페소화는 '휴지조각'
아르헨티나의 엄청난 기준금리도 물가 문제 때문입니다. 지난 2월 아르헨티나의 물가상승률은 전년 동월대비 102.5%로 집계됐습니다. 1년 전보다 물가가 2배 이상 올랐다는 뜻입니다. 거꾸로 말하면 돈의 가치가 절반으로 줄어들었다는 뜻이죠. 세자릿수 물가상승률은 1991년 이후 32년 만에 있는 일이었습니다. 지난달 물가상승률도 113.4%로 사태는 점점 악화하고 있습니다. 1~7월 누적 물가상승률은 무려 60.2%에 달하죠.
살인적인 물가상승률을 잠재우기 위해 꺼내든 카드가 과격한 기준금리 인상입니다. 아르헨티나가 기준금리를 118%로 올린 건 지난 14일인데, 한번에 21%포인트를 올려버렸습니다. 이렇게 많은 기준금리를 올렸던 건 22%포인트 인상을 단행했던 2002년 6월30일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고요. 자다 일어나면 오르는 물가를 어떻게든 잡기 위해 꺼내든 고육책인 셈이죠.
하지만 100%를 넘는 기준금리에도 물가는 잡힐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아르헨티나 화폐인 페소화는 종이쪼가리에 불과할 정도로 가치가 폭락하고 있고요. 달러 당 환율은 빠르게 올랐죠. 사람들은 월급을 받으면 한 달치 물건을 미리 삽니다. 며칠이 지나면 더 비싼 값을 치러야 하니까요. 자국 화폐보다는 달러를 더 선호하고, 달러는 은행이 아닌 침대 매트리스 아래에 깔아둡니다.
아르헨티나의 물가는 대체 왜 이렇게 높은지, 기준금리를 그렇게 올리는데도 물가가 왜 안 잡히는지 이해하려면 수십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결정적인 하나의 원인이 있는 게 아니라, 복잡하게 얽힌 구조적인 문제가 자리하고 있거든요.
IMF 구제금융만 30차례…만신창이 된 아르헨티나
아르헨티나의 태생적 환경에 문제가 있었던 건 아닙니다. 사실 아르헨티나는 세계 6위에 달하는 자원부국입니다. 1910년 1인당 경제성장률(GDP)는 세계 7위 수준이었고요. 한국이 식민 지배를 받고 있던 1913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는 이미 지하철이 다니고 있었습니다. 일본 만화 ‘엄마 찾아 삼만리’에서는 이탈리아 소년 마르코가 아르헨티나로 돈을 벌러 간 엄마를 찾아가잖아요? 실제로 많은 유럽인들이 일자리를 찾으러 부유한 아르헨티나로 떠났다고 합니다.
아르헨티나 상황이 본격적으로 악화하기 시작한 건 1946년입니다. 이해 후안 도밍고 페론 대통령이 집권합니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딴 소위 ‘페론주의’ 이념을 추진했습니다. 과감한 무상복지 확대와 임금인상 같은 포퓰리즘 정책이었죠. 당시 “국민에게 줄 수 있는 건 모두 주라”는 말까지 나돌았습니다. 정부가 현금을 뿌려대니 정부지출은 2년 만에 GDP 대비 40%를 넘기게 됐습니다. 재정은 파탄이 나고 경제가 침체되기 시작했죠.
독재자였던 페론이 9년 만에 쫓겨났지만 아르헨티나는 이미 포퓰리즘에 물들었습니다. 사람들은 페론이 나쁜 정치인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만, 자신들이 받는 복지 혜택은 유지하고 싶어 했습니다. 정치인들은 선거에 뽑히기 위해 국민들이 좋아할 법한 포퓰리즘 정책을 계속해서 발표했죠. 한 예로 카를로스 메넴이란 인물은 엄청난 경제난과 물가인상에도 불구하고 노동자와 공무원의 임금인상, 대대적인 세금감면을 약속했습니다. 덕분에 1989년~1999년 대통령을 지냈죠.
달콤한 포퓰리즘에 물들자 반복되는 악순환
위기를 넘길 기회가 있었지만 포퓰리즘 정부는 이마저도 걷어찼습니다. 2003년 네스토르 키르치네르 대통령이 재임하던 시절 아르헨티나에 ‘원자재 붐’이 일어났습니다. 폭발적인 성장을 시작하던 중국에서 많은 양의 원자재 수요가 발생한 덕분이었습니다. 아르헨티나는 뜻밖의 횡재를 한 거죠. 만약 이때라도 인프라 건설과 국가경쟁력 제고에 돈을 썼다면 상황이 달라졌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는 포퓰리즘적인 정책으로 일관했죠.
부인이었던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도 똑같습니다. 그는 남편에 이어 2007년 대통령에 당선됩니다. 사회적 약자들을 돌보며 ‘빈민의 성녀’로 추앙받았지만, 정치인으로서는 포퓰리스트에 가까웠죠. 공공지출을 엄청나게 늘리고 경쟁력 있는 기업을 국유화시켜버렸습니다. 국민들에게는 생필품 지원부터 축구방송 중개료까지 지원해줬습니다. 공무원 수는 2배로 늘렸고, 연금지급 조건을 완화해 수급자가 800만명에 이르렀습니다.
아르헨티나 경제는 만신창이가 됐습니다. 한국이 한차례 겪었던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을 아르헨티나는 30차례나 받았습니다. 파산을 의미하는 채무불이행(디폴트) 선언은 9번이나 있었고요. 아르헨티나 국민들은 경제학자들로부터 포퓰리즘 복지정책에 중독됐다는 오명을 뒤집어써야 했습니다. 먹고 살기 어려워질수록 달콤한 포퓰리스트에 흔들리는 악순환이 형성된 거죠.
美 기준금리 인상 직격탄…속절없이 폭락한 페소화
수십퍼센트 수준에서 오르내리던 물가와 기준금리가 100%를 향해 치솟기 시작한건 2022년입니다. 바로 미국이 기준금리를 올리기 시작한 때죠. 미국은 코로나19 위기를 넘기기 위해 기준금리를 0%대까지 내렸습니다. 하지만 코로나19가 끝나가고 물가상승 조짐이 보이자 기준금리 인상을 단행했죠. 1년 반 만에 0.25%였던 미국의 기준금리는 지금 5.50%까지 올라와있습니다.
미국의 기준금리 인상은 개발도상국인 아르헨티나에 결정타가 됐습니다. 투자자들은 40~50% 금리를 준다고 해도 위험천만한 아르헨티나에서 투자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페소화를 팔고 달러를 사서 안정적인 미국에 투자하는 게 훨씬 이득이었죠. 수요가 없는 페소화의 가치는 떨어지고, 너도나도 희망하는 달러의 가치는 높아졌습니다. 자금이탈이 가속화하고 환율까지 요동쳤습니다. 불안정한 외환시장 때문에 수입물가가 오르면서 다시 물가를 자극했고요.
지금 아르헨티나 사람들이 페소화보다 달러화를 선호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페소는 가지고 있으면 가치가 계속 폭락하지만, 달러는 거꾸로 오르니까요. 국민들마저 달러를 원하니 가뜩이나 심각한 외환위기가 더 악화했고요. 이를 막기 위해 정부는 개인이 가능한 환전 수량을 200달러로 제한했습니다. 그러자 웃돈을 주고 암시장에서 달러를 환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서 주고받는 달러를 소위 ‘블루달러’라고 부릅니다. 블루달러는 공식 환율보다 몇 배는 비싸게 환전해야 하지만 사람들은 아랑곳하지 않죠.
엉망이 된 고정환율제…문제 풀 지도자가 없다
그런데 미국 기준금리 인상으로 타격을 받는 나라는 아르헨티나뿐만이 아니겠죠. 다른 개발도상국들도 어느 정도 피해를 입었을 겁니다. 그런데 유독 아르헨티나에서 두드러진 초인플레이션이 등장했습니다. 단순히 ‘과거 포퓰리즘 정부 탓이야’하고 넘어가기엔 설명이 되지 않는 부분들이 있다는 뜻입니다.
경제학자들은 그 원인 중 하나로 비상식적인 환율정책을 꼽습니다. 한국은 외환시장에서 자연스럽게 환율이 결정되죠? 다른 나라들도 대부분 그렇습니다. 하지만 아르헨티나는 국가가 환율을 통제합니다. 환율을 통제하면 갖가지 부작용이 생겨납니다. 시장에서 결정된 합리적인 환율이 아니다보니 외국의 큰 손들이 선뜻 투자하기 어렵습니다. 환율 방어를 위해 막대한 돈이 소요되고요. 시세차익을 노리는 투기꾼들의 공격도 늘어납니다.
정부의 부족한 역량도 근본적인 원인 중 하나입니다. 좌파 포퓰리스트 정치인들도 문제지만 이를 비판한 우파 정치인들도 황당한 정책을 내놓으며 아르헨티나 경제를 망쳤습니다. 2015년 취임한 마우리시오 마크리 대통령이 대표적인데요. 전기와 가스, 공과금 인상 등을 급격하게 추진하다보니 인플레이션이 더 올라버렸습니다. 미국이 기준금리를 올리면 자금이탈 방지를 위해 따라 올렸어야 하는데, 오히려 내려버렸죠. 지지율을 끌어올리기 위해 본인의 소신을 접고 재정완화 정책을 다시 시작했고요.
'중앙은행 너마저'…캄캄한 아르헨티나의 앞날
최후의 보루인 중앙은행이 제 역할을 못하고 있는 것도 뼈아픈 대목입니다. 원래 중앙은행은 정부와 동떨어진 독립적인 기구입니다. 정치권력의 압박에서 벗어나 경제만을 생각해 기준금리를 결정해야 하죠. 하지만 높은 물가에도 아르헨티나 중앙은행은 정부 기조에 맞춰 돈을 찍어내기 일쑤였습니다. 정부는 이렇게 찍은 돈으로 당장 급한 부채를 갚았고요. 2000년대 후반에 중앙은행이 정부재정을 위한 화폐발행에 반대한 적도 있었지만, 총재를 해고하면서 독립성을 완전히 꺾어버렸습니다.
앞으로의 전망도 어둡기만 합니다. 문제를 해결할만한 지도자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죠. 현재 아르헨티나는 대선을 치르는 중입니다. 지난 13일 예비선거가 이뤄졌는데 1위는 하비에르 밀레이가 차지했습니다. 그는 아르헨티나의 트럼프로 불리는 인물인데요. 대표적인 공약에는 중앙은행 폐쇄, 달러화 사용, 재정적자 해결을 위한 강력한 긴축정책, 공기업 민영화 등이 있습니다.
세종=송승섭 기자 tmdtjq8506@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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