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로 먹고살기] 그때가 아니면 쓸 수 없는 글들

2023. 8. 19. 0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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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성준 작가


대학교 다닐 때 ‘뚜라미’라는 교내 음악동아리 회원이었다. 귀뚜라미를 뜻하는 동아리 이름은 귀여웠으나 그 밑에 붙어 있는 ‘창작곡 연구회’라는 부제는 자못 진지했고, 실제로 많은 선후배가 보름에 한 곡씩 되든 안 되든 창작곡들을 만들어 발표하는 무서운 곳이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노래들은 나중에 대학가요제에 입상해 음반에 실리기도 했고 몇몇은 전공과목과 상관없이 프로 뮤지션이 되기도 했다.

입학할 때 기타는 기본 코드밖에 모르고 음악적 재능도 별로 없이 노래만 불렀던 나는 작곡은 엄두도 낼 수 없지만 가사는 좀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책을 좋아하고 글쓰기에도 관심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오디션 볼 때 내가 써냈던 신청서의 ‘심오한 글’을 읽고 ‘드디어 물건이 하나 들어 왔구나’ 생각했다는 선배도 있었다. 그런데 가사는 좀처럼 써지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자신감·자존감 부족 때문이었다. ‘나 같은 게 어떻게 가사를 써? 그런 건 예술적 재능을 타고나거나 배경지식이 많아야 할 수 있는 거야’라는 부정적인 마음이 번번이 창작 의욕을 꺾었다.

광고회사에 들어가 카피라이터로 일하면 카피는 물론 다른 글들도 저절로 잘 써질 것 같았다. 실제로 동료나 선배 카피라이터 중엔 카피도 잘 쓰고 다른 글도 잘 쓰는 괴물들이 많았다. 반면 나는 아이디어 내고 카피 쓰기에도 시간이 모자랐고 그렇게 하루종일 일에 시달리다 밤에 집으로 오면 힘이 쪽 빠져서 다른 글을 쓸 여력이 없었다. 이래저래 쓸 이유보다는 못 쓸 핑계가 더 많은 삶이었다.

예전에 정치·사회 분야에서 아주 날카로운 글을 쓰는 논객이 하나 있었다. 그는 사회적 이슈뿐 아니라 SF에도 관심이 많았다고 하는데 결국 SF 소설가의 꿈은 이루지 못했다. 그렇게 똑똑하고 글도 잘 쓰는 사람이 왜 그랬을까. 그의 문제 역시 망설임이었다. 함께 SF를 공부하던 동료나 친구들이 하나둘 작가로 데뷔할 때도 ‘나는 아직 이 분야 지식이 모자라니까 공부를 좀 더 하고 써야지’라는 생각 때문에 단 한 편의 소설도 쓸 수가 없었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십 년 세월을 보낸 그는 결국 SF를 포기하고 말았다.

반대의 예도 있다. ‘그래서 그들은 바다로 갔다’나 ‘펠리컨 브리프’처럼 쓰기만 하면 할리우드 영화 제작자들이 앞다퉈 판권을 샀던 존 그리샴은 어떻게 해서 그런 베스트셀러들을 쓸 수 있었을까. 법률회사에 다니던 그는 매일 새벽 5시에 일어나 출근 전까지 변호사들이 사용하는 리갈패드 위에 한쪽씩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미루지 않고 의욕이 생길 때 바로 쓰기 시작한 게 작가로서의 성공 비결이었던 것이다.

머릿속에만 있는 글은 글이 아니다. 언젠가는 써야지 하는 글은 ‘언젠가’까지 기다려 주지 않고 연기처럼 사라진다. 그래서 조금 부족하고 뒤죽박죽이라도 일단 글로 풀어놓는 게 중요하다. OTT 드라마 ‘인간수업’과 ‘글리치’ 등으로 유명한 진한새 작가 인터뷰를 읽어보니 그는 깊이 생각하지 않고 일단 쓰기 시작하는 데 의미를 둔다고 한다. ‘작가들의 뇌는 생각하는 시간과 쓰는 시간의 차이가 별로 없다’라고 심리학자들이 얘기했다는 것이다. 나는 여기에 한마디를 더 보태고 싶다. 작가들의 뇌만 그런 게 아니다. 누구나 생각하는 시간과 쓰는 시간의 차이는 별로 없다. 사람은 쓰면서 생각하고 다 쓴 뒤에도 자신이 쓴 걸 다시 읽어보면서 생각을 확장시키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나는 회사를 그만두고 제주도로 내려가 첫 책의 원고를 쓰면서 오랜 콤플렉스를 떨쳐버릴 수 있었다. 많이 알아서 쓰는 게 아니라 쓰기 시작하면 어떻게든 써진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자신감을 회복하고 나니 책을 쓸 수 있었고 글쓰기 강연도 할 수 있었다. 막상 해보니 나는 글쓰기에 대해 얘기하는 걸 좋아하고 강의를 듣는 사람들에게 글을 쓰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그리고 언제든 쓰고 싶은 게 생기면 다른 할 게 있어도 글부터 쓰는 즐거움을 알게 됐다.

장기하가 ‘싸구려 커피’라는 노래의 ‘랩 비슷한 부분’을 쓸 때는 주변에 아무런 전자기기가 없는 버스 안이었다고 한다. 멍하니 있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고 그때 갑자기 그 가사 내용이 떠오른 것이었다. 만약 그때 그가 ‘어, 스마트폰도 없고 버스도 흔들리네. 나중에 써야지’라고 생각했다면 우리는 장기하라는 희대의 뮤지션을 만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때가 아니면 쓸 수 없는 글이 분명 있다. 때를 놓치지 않고 일단 조금이라도 써놓으면 그건 좋은 글로 변한다. 나를 믿으시라. 진짜다.

편성준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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