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 한복판 ‘녹색 오아시스의 축복’ [우성규 기자의 걷기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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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염과 폭풍우에도 주말 아침 걷기 묵상을 멈출 순 없다.
일상에 쫓겨 도심 속 콘크리트 더미를 벗어나지 못한다 해도 서울엔 녹색 오아시스 같은 도심 숲이 있다.
서울 지하철 3·7·9호선이 만나는 고속터미널역 3번 출구.
육교 아래 숨이 꽉 막힐 정도로 줄지어 오도가도 못 하는 차들에 경쾌한 인사를 던지며 곧바로 서울성모병원과 반포미도아파트 사이 숲길로 들어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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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염과 폭풍우에도 주말 아침 걷기 묵상을 멈출 순 없다. 일상에 쫓겨 도심 속 콘크리트 더미를 벗어나지 못한다 해도 서울엔 녹색 오아시스 같은 도심 숲이 있다. 교통체증이 지속하는 도로보다 평균 3~4도가량 기온이 낮고 피톤치드와 음이온이 반겨 주는 곳. 강남 한복판에서 시작하는 도심형 산지 걷기 묵상이다.
서울 지하철 3·7·9호선이 만나는 고속터미널역 3번 출구. 기나긴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오면 구름다리가 나온다. 육교 아래 숨이 꽉 막힐 정도로 줄지어 오도가도 못 하는 차들에 경쾌한 인사를 던지며 곧바로 서울성모병원과 반포미도아파트 사이 숲길로 들어선다. 차를 버리면 자유를 얻는다. 1000만명이 몰려 사는 서울에선 더더욱 두 다리에 의존하는 것이 지혜롭다.
가파른 숲길을 천천히 음미하듯 걷는다. 검찰과 법원이 몰려 있는 법조 단지의 뒷길이다. 검사 출신 대통령이 당선되면 곧바로 정의가 실현될 것처럼 말하던 호사가들의 호언장담은 몇 달 만에 역시 공수표로 판명됐다. 무능과 남 탓으로 정치의 질을 한 단계 더 낮춘 정치 검사들이 서초동 재직 시절 이토록 호젓한 산길을 걸은 적이 있는지, 걸었다면 과연 무슨 생각을 했을지 궁금하다.
헛된 상념에 잠시 흔들릴 즈음 맨발로 이 산길을 걷는 사람들이 줄지어 나타난다. 동네 사람들은 이곳을 미도산으로 부르며 기꺼이 신발을 벗고 산에 오른다. 맨발로 흙의 촉감을 느끼며 산을 깨끗하게 가꾸는 사람들의 애정의 반만이라도 본받아 정치인들이 공동체를 아낀다면 얼마나 좋을까.
곧장 누에다리로 향한다. 미도산과 몽마르뜨공원을 연결하는 다리이다. 왼쪽엔 예술의전당과 우면산, 오른쪽엔 한강과 남산이 펼쳐진다. 잠깐 숲길을 걸었을 뿐인데 이렇게 멋진 조망을 얻게 되다니, 역시 은혜는 누구에게나 조건 없이 주어지나 보다.
몽마르뜨공원 화장실에서 가파른 계단을 통해 국립중앙도서관으로 내려간다. 걷기 묵상은 산책(散策) 즉 안식을 누리며 천천히 걷는 행위를 통해 기도하는 일을 말하는데, 개인적으로는 산책(山冊) 즉 산에서 책 읽는 일로 이어졌으면 하는 바람도 있다. 1163만권 넘는 장서를 보유한 국립중앙도서관은 취향을 발견하기에 딱 좋은 공간이다. 책뿐만 아니라 영화 감상, 기록매체 전시, 작가 강연 등을 수시로 만날 수 있다.
잔디 깔린 지붕 아래 디지털도서관에서 두 시간 정도 영화 ‘나의 산티아고’(I’m Off Then)를 관람했다. 독일 예능인 하페 케르켈링의 800㎞ 산티아고 순례길 여정을 다룬 내용인데 책으로는 ‘산티아고 길에서 나를 만나다’(은행나무) 제목으로 번역 출간돼 있다. 유쾌함 속에서도 진지함을 놓지 않는 독일식 코미디가 낯설긴 하지만, 걸으면서 신의 존재를 끊임없이 자문하는 순례길 여정이 잘 그려져 있다.
몽마르뜨공원으로 복귀해 서리풀다리를 건넌다. 가파른 경사 대신 굽이굽이 이어진 2.3㎞가량의 무장애숲길을 걸어 두 번째 서리풀근린공원 조망 지점에 서면 역시 한강과 우면산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2015년 이전한 국군 정보사령부 건물이 아직 버려진 채 남아있지만, 그래도 철조망과 초소가 사라지고 산지 대부분 주민 품으로 돌아온 게 어디인가.
길은 방배역 인근 청권사로 이어진다. 조선 3대 임금 태종의 둘째 아들이자 세종대왕의 형인 효령대군 이보의 묘소가 있는 곳이다. 청권(淸權)은 ‘깨끗한(淸) 권력 이양의 법도(權)’를 말한다. 중국 주나라의 시조 고공단보가 3남 계력을 후계자로 삼을 때 차남 우중이 아버지의 뜻을 알게 된 후 삭발하고 숨어 살았던 일화에서 비롯한다. 공자는 우중을 평가하며 “왕위에 대한 욕심을 버렸으니 깨끗하며(淸) 사리에 맞는 처신(權)을 했다”고 칭송했다. 공동체를 위해 자기 욕심을 줄이고 권력을 나눌 수 있을 때 정치가 살아난다.
우성규 기자 mainport@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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