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허에서 피어난 맥주의 비밀... 돌 색깔이 심상치 않다 [윤한샘의 맥주실록]

윤한샘 2023. 8. 18. 19:27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윤한샘의 맥주실록] 수도원을 살린 오르발 트라피스트 맥주 1부

[윤한샘 기자]

▲ 오르발 수도원 전경 웅장함과 날 것이 주는 아우라에 압도된다.
ⓒ 윤한샘
 
문득 구글 지도를 들여다보니 어느덧 프랑스 국경이 가까웠다. 오늘 (7월 3일) 방문하는 수도원은 벨기에 남쪽 지역 왈로니아에 있다. 벨기에는 크게 두 개의 언어권으로 구분된다. 네덜란드어권 플랑드르(Flanders)와 프랑스어권 왈로니아(Wallonia)다. 수도 브뤼셀에서는 중간에 있는 위치가 의미하듯 두 언어가 통용된다.

여러 언어가 공용어인 나라는 종종 있지만, 지역이 완전히 나뉜 채, 서로 다른 언어를 쓰는 나라는 흔치 않다. 나는 벨기에에 도착하기 전부터 이 점이 흥미로웠다. 언어의 다름이 심각한 내부 문제를 만들지는 않을지 궁금했다. 아니나 다를까, 이야기를 들어보니 최근까지 두 지역이 미묘한 갈등을 빚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고 한다. 소수지만 독립을 주장하는 극단주의자들도 있다고 했다. 그러나 생각보다 큰 충돌은 없으며 반목이 생길 때마다 토론과 합의를 통해 극복하고 있다고 했다.

언어가 다르면 생각이 나뉘고, 결국 정체성이 달라지기 마련인데, 이 나라는 어떻게 이를 극복하는지 이해하기 쉽지 않았다. 하긴, 같은 언어를 쓰는데도 서로 70년 넘게 으르렁거리는 남북을 보면 언어가 꼭 정체성과 동질감을 위한 필요충분 요건이 아닐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네덜란드 언어권인 안트베르펜에서 순식간에 프랑스 언어권인 오르발로 넘어가는 이 여정은 단일 민족 역사로 점철된 나에게 생소한 경험인 건 분명했다. 

황금의 계곡, 오르발
 
 폐허를 내려다보는 오르발 수도원 첨탑
ⓒ 윤한샘
 
오르발은 벨기에 왈로니아 지방에서도 프랑스와 맞닿아 있는 플로렌빌 남쪽 지역에 있다. 정식 명칭은 빌레-드방-오르발(Villers-devant-Orval)이다. 지금 향하고 있는 오르발 수도원도 프랑스어로 오르발의 성모 수도원을 의미하는 '애비 노르트 담 도르발'(Abbaye Notre-Dame d'Orval)이 진짜 이름이다.  

오르발 수도원은 이름과 터와 관련된 재미있는 전설을 갖고 있다. 11세기 초 한 귀족 여인이 이곳을 지나가다 청혼 반지를 샘물에 빠트렸다. 슬픔에 빠진 여인은 반지를 되찾으면 이곳에 훌륭한 수도원을 짓겠다고 신에게 기도했다. 놀랍게도 그때 송어가 반지를 물고 올라왔고 그녀는 기뻐하며 이곳은 'Val d'Or', 즉 황금의 계곡이라 말했다. 그리고 수도원 설립을 후원했다.

반지를 빠트린 여인은 토스카나의 마틸다였다. 그녀는 중세 유럽을 뒤흔든 '카노사의 굴욕'의 중심에 있었던 최고의 여장부였다. 두 번의 결혼식을 올렸던 마틸다가 누구의 반지를 잃어버렸던 건지 쓸데없는 호기심이 발동했다. 오르발 수도원이 자신들의 초기 흔적을 1070년으로 소개하는 것으로 보아 반지의 주인공은 첫 결혼 상대였던 고드프리트가 아니었을까?

마틸다는 1069년 어머니와 재혼한 고드프리트 3세의 아들 고드프리트와 결혼했다. 그리고 이 작은 역사가 1077년 하인리히 4세가 이탈리아 토스카나 카노사 성 앞에서 그레고리 7세에게 눈 위에서 맨발로 용서를 구한 '카노사의 굴욕'으로 이어졌다. 나는 지금 황제와 교황의 패권 투쟁의 역사가 시작된 오르발로 가는 중이다. 

1000년 세월의 흔적을 품고 있는 수도원  
 
▲ 수도사들의 공간 봉쇄 수도원은 허가없이 내부로 들어갈 수 없다.
ⓒ 윤한샘
 
버스가 산 중턱으로 들어서자 드문드문 보이던 집들은 사라지고 초록색 나무와 들판만 가득했다. 프랑스 국경으로 다가갈수록 풍경은 확실히 플랑드르와 다르게 지나갔다. 벽돌보다 돌로 지어진 집들이 눈에 더 많이 들어왔다. 돌들은 옅은 황색을 띠고 있었다. 오르발 수도원에 도착했을 때, 황색으로 물든 수도원을 보고 나는 이 돌들이 심상치 않은 녀석들인 것을 알았다. 

흰 구름이 실타래처럼 풀어져 있는 파란 하늘은 수도원의 노란빛과 묘한 대비를 이뤘다. 오르발 수도원은 생각보다 더 크고 웅장했다. 원시 수도원 공동체의 아우라도 발산했다. 거대함과 날 것이 내뿜는 거친 감성이 오감을 압도하고 있었다.

마틸다의 전설이 사실인지 확실치 않지만, 오르발 수도원의 역사는 107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탈리아 칼리브리아에서 온 베네딕도회 수도사들이 이곳에 정착하며 수도원을 건립했다. 1124년 각고 끝에 수도원을 완성했지만 재정 문제로 지속적인 운영이 힘들었다. 

이들이 내놓은 해결책은 시토회였다. 1098년 베네딕도회에서 분리된 시토회는 12세기 급격하게 성장하고 있었다. 시토회를 이끌던 성 베르나르는 오르발 수도원의 요청을 받고 곧바로 시토 수도사들을 파견했다. 1132년 7명의 수도사가 오르발에 도착했고 시토회 규칙에 맞춰 수도원을 재정비했다. 오르발 수도원이 1132년을 공식적인 원년으로 삼고 있는 이유다. 

오르발 수도원은 세 번의 큰 위기를 맞이한다. 첫 번째 시련은 1252년 발생한 대화재였다. 수도원을 전소시킨 이 불은 큰 상흔을 남겼다. 100년간 복구가 진행됐고 다행히 그 뒤 5세기 동안 오르발 수도원은 큰 탈 없이 존속했다. 17세기 초에는 경제적으로 안정되며 수십 명의 수도사를 품기도 했다. 

그러나 유럽 대륙을 초토화시킨 30년 전쟁을 비껴갈 수 없었다. 1637년 프랑스 용병들의 약탈은 수도원을 존폐의 기로에 놓이게 했다. 간신히 위기를 넘긴 후, 1668년 수도원장으로 새로 부임한 샤를 드 벤제라드는 오르발 수도원을 시토회에서 트라피스트회로 바꾸며 개혁을 이끌었다. 이때 오르발 수도원이 생존할 수 있었던 건 대장간 때문이었다. 수도원 내 허가된 대장간이 지역 철강 산업을 견인하며 수도원 공동체를 경제적으로 안정시켰다. 

오르발 수도원에게 가장 큰 시련을 준 사건은 프랑스혁명이었다. 1789년 프랑스혁명이 발발하자 다른 수도원과 마찬가지로 오르발의 재산도 몰수당했다. 재기에 대한 희망의 불씨가 꺼진 건, 1793년이었다. 프랑스 혁명군은 수도사들이 오스트리아군에게 환대를 제공했다는 이유로 수도원의 시설을 모두 불태워 버렸다. 잿더미만 남긴 채, 1000년의 역사는 폐허 속으로 사라졌다. 

폐허 속 디지털이 공존하는 수도원 박물관
 
▲ 오르발 유적지 전경 약국, 양조장 등 옛 시설을 복원해 놓았다.
ⓒ 윤한샘
 
수도원의 아우라에 눌려 잠시 멍해 있던 나는 입구로 발길을 재촉했다. 오르발 수도원도 다른 트라피스트처럼 봉쇄 수도원이다. 특별한 허가가 없으면 입장이 불가능하다. 그러나 수도사들 공간 밖에 있는 유적지는 유료로 방문할 수 있었다. 화재와 전쟁으로 폐허가 된 곳을 박물관으로 공개하고 있었다. 입장료는 6유로였다. 적지 않은 금액이었지만 둘러보지 않는 것이 더 이상한 일이었다. 
수도원 내부로 들어서자 세상과 단절된, 지난 1000년의 역사가 온몸을 엄습했다. 안쪽으로 가기 위해서는 넝쿨식물로 뒤덮인 담장을 따라 걸어야 했다. 담장 너머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된 웅장한 수도원의 모습이 보였다. 나처럼 속세에 찌든 몸은 감히 들어갈 염두도 나지 않는 거룩함이 가득했다.   
 
▲ 트라피스트를 소개하는 방 외관과 달리 내부는 매우 현대적이다.
ⓒ 윤한샘
 
유적지로 들어가기 전, 오르발과 트라피스트회를 소개하는 작은 방에 들렀다. 수도원 외관과 달리 완벽하게 디지털로 무장한 디스플레이가 사뭇 생경했다. 벽에는 수도원 역사를 말해주는 여러 자료가 걸려있었다. 모두 프랑스어로 되어 있었지만, 내 손에는 모든 언어를 해독할 수 있는 스마트폰이 있었다. 중세와 21세기를 들락날락하는 뇌를 부여잡느라 고생하던 찰나, 갑자기 눈이 번쩍 뜨였다. 수도원 역사를 안내하는 문구를 보던 중 황색 돌의 비밀이 풀린 것이다. 

'피에르 드 프랑스'라고 불리는 이 돌은 1억 6천만 년 전, 이곳이 바다였을 때 생성된 석회암이었다. 견고하고 고른 성질로 오래전부터 성과 교회를 짓는 데 사용되었다고 한다. 문득 '피에르 드 프랑스'의 존재가 수도원 부활을 가능하게 한 주인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이 지역에 돌이 없었다면 수도원 재건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1000년 전 황금 계곡을 외친 마틸다는 이 황색 돌이 진정한 금이었다는 것을 진작에 알고 있었던 건 아니었을까. 

2층으로 올라가니 흥미로운 건물 모형이 눈길을 끌었다. 오르발 수도원의 변천사를 시대순으로 보여주는 모형이었다. 1132년 초창기부터 1782년 프랑스혁명 직전, 그리고 1948년 완공된 지금의 모습까지 수도원은 형태와 배치, 규모가 모두 달랐다. 유일하게 비슷한 건, 외관의 누리끼리한 색이었다. 
 
 약을 조제하던 도구들
ⓒ 윤한샘
 
유적지에서 발굴한 유물을 둘러본 후, 밖으로 향하는 문을 나서니 옛 수도원 터가 한눈에 들어왔다. 공원처럼 꾸며 놓은 곳곳에 과거 시설을 복원한 공간이 있었다. 특히 약을 조제하던 도구를 모아놓은 곳이 흥미로웠다. 약초를 담았던 병과 무게를 재던 저울을 보니 수도원이 지역 공동체에 어떤 존재였는지 가늠할 수 있었다. 
 
▲ 마틸다와 연못 마틸다의 전설을 구현한 연못. 동전이 수북하다.
ⓒ 윤한샘
 
약국에서 나와 정원 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정면으로 폐허가 된 옛 수도원 터가 보였고 옆에는 옛 양조 장비를 전시한 작은 건물이 있었다. 놀랍게도, 그 사이에 마틸다의 전설을 재현한 작은 연못이 있었다. 솔직히 연못을 보는 순간, 두 눈을 의심했다. 설마 이런 신성한 곳에 관광지에나 볼 수 있는 시설을 만들 줄이야. 연못 안에는 사람들이 던져 놓은 동전이 수북했다. 그걸 보는 순간 꽁했던 마음이 풀어졌다. 동전 하나로 소원을 빌게 만든 것이 뭐가 그리 잘못이랴. 이왕이면 마틸다의 기적이 이뤄진 곳이라면 더할 나위 없지 않은가. 어느덧 나의 소원을 담은 1유로 동전도 연못을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 오르발 로고 반지를 물고 있는 송어가 오르발의 상징이다.
ⓒ 윤한샘
 
서둘러 양조 장비가 있는 건물로 들어갔다. 맥주를 좋아하는 나 같은 사람을 위해 마련한 공간 같았다. 외관과 달리 인테리어는 모던했다. 입구에는 초창기 양조장에서 사용했던 당화조가 있었다. 오른쪽에는 구리케틀이 입을 벌린 채 앉아 있었다. 옆에 있는 계단을 따라 올라가니 아니나 다를까, 최첨단 디지털이 장착된 디스플레이가 오르발 맥주 양조 과정을 설명하고 있었다.    정작 흥미로운 건, 그다음 방이었다. 이곳에서는 오르발 트라피스트 맥주의 역사를 한 번에 볼 수 있었다. 오르발의 심볼인 반지를 물고 있는 송어의 변천사부터 시대별 오르발 맥주잔의 모습, 맥주를 담던 오래된 나무 상자와 양조에 사용했던 비중계까지 다채로운 맥주 유물들이 눈을 즐겁게 했다. 

오르발 수도원에게 맥주는 어떤 의미일까? 분명 폐허 입구에 오르발 맥주 역사를 담은 공간을 준비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 답은 우거진 잡초 속 검게 그을린 기둥과 벽들이 기다리는 곳으로 들어가면 알 수 있을 테다. 마치 앨리스가 흰 토끼를 따라 구멍으로 내려가듯, 나는 간신히 형태만 남은 작은 문으로 들어섰다. 폐허가 된 담장 뒤로 반듯한 수도원 첨탑이 보였다. 때마침 첨탑 속 종소리가 흐릿해진 하늘 위로 낭랑하게 퍼지고 있었다. 

*다음주 2부에서 이어집니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덧붙이는 글 | 브런치에 중복게재됩니다.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