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네스코 지하다방 인질과 인질범, 알고보니 친구의 친구

이준목 2023. 8. 18. 1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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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리뷰]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이준목 기자]

대한민국 군대를 소재로 한 화제의 드라마 < D.P. >, 각각 시즌 1, 2의 주요 캐릭터인 조석봉과 김루리는, 부대에서 자신을 괴롭혔던 이들에게 피의 복수를 단행한다. 극중에서 그들은 납치, 테러, 총기난사, 살인 등의 엄연한 범죄를 저질렀고 그 과정에서 무고한 피해자들까지 발생한다.

하지만 그 이전에 두 사람 역시 부대 내 극단적인 가혹행위와 부조리의 최대 피해자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들을 평범한 인간에서 괴물이 될 때까지 극한 상황으로 몰아갔던 그 조직과 시스템은, 모든 책임을 두 사람에게만 전가하고 진실을 은폐하려고 한다.

그런데 이것이 과연 단지 드라마 속의 상상력일 뿐일까? 때로는 현실이 픽션보다 더 잔혹하다. 지금으로부터 무려 약 50년 전에도 이미 또다른 조석봉과 김루리가 무수히 존재했을지 모른다. 8월 17일 방송된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인연과 악연 사이, 어느 인질의 고백' 편에서는 1974년 한국 사회를 충격에 빠뜨렸던 유네스코 지하다방 인질사건을 재조명했다.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의 한 장면.
ⓒ SBS
 
1974년 5월 20일 월요일 오전 7시. 서울 구의동에서 거주하던 재벌집 삼남매는 여느 때처럼 포드 자가용을 타고 등교하던 중 도로에서 의문의 남성들과 마주친다. 세 명의 남성 중 두 명은 사복 차림이었고 한 명은 군복을 입고 총까지 들고 있었다.

이들은 길을 막고 돌연 총으로 위협하면서 차량을 탈취했다. 세 아이와 운전기사는 돈을 노리고 부유층을 겨냥한 납치극인 줄 알고 공포에 떨었다. 하지만 정작 세 범인은 아이들을 모두 내리게 하더니, 운전기사만 남기고 차량을 포항으로 이동하도록 지시했다.

세 범인 중 총을 든 군인의 정체는 23세의 이원모 이병이었다. 그는 방위병, 즉 출퇴근 하는 군인이었고 부대는 천호동에 있었다. 이원모는 범행 당일 새벽 부대에서 경계 근무를 서다가 무기고에서 카빈총 2자루, 실탄 500여 발을 탈취한 후 무장 탈영했다. 사복차람의 민간인 두 명은 20세 동갑내기인 윤찬재와 최성환이었고, 이원모 이병와는 구의동에서 함께 자란 동네친구였다.

백주대낮에 무장 탈영병이 재벌집 차를 습격하여 탈취한 초유의 상황이 알려지면서 전국에는 비상이 걸렸다. 다행히 당시로서는 국내에 드문 고급 차량이어서 쉽게 눈에 띄다보니 범인들의 위치를 빨리 파악할 수 있었다. 수배차량은 경부고속도로를 따라 이동하다가 수원 톨게이트에서 대기중이던 35세의 베테랑 교통경찰인 김장식 순경이 탄 순찰 차량과 마주쳤다. 도로에서 한바탕 추격전이 벌어졌고 경찰차가 수배차량의 앞을 가로막는 데 성공했다.

차문이 열리고 인질로 잡혀있었던 운전기사가 급하게 도주한다. 인질이 빠져나간 것을 확인한 김 순경은 그대로 조수석을 덮쳐 이원모와 몸싸움을 벌였다. 두 사람이 총기를 놓고 엎치락뒤치락 몸싸움을 하던 중에 갑자기 총성이 울렸다. 뒷자리에 있던 최성환이 김 순경을 향하여 총을 발사한 것이다. 김 순경은 그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다. 당황한 범인들은 바로 그 자리에서 도주했다.

잠시 후 다시 머리를 맞댄 범인들은 계획을 변경한다. 원래 포항을 통하여 일본으로 밀항하려고 했던 세 사람은, 돌연 서울로 다시 올라가기로 결정했다. 김 순경을 쏜 지 약 30분 정도가 지난 오전 8시 50분. 범인들은 이번엔 강원도 원주에서 서울로 향하던 고속버스를 탈취했다. 범인들은 위협이 될 수 있는 남자들은 모두 내리게 하고 운전기사와 여자승객만 인질로 남겼다.

그리고 그들이 지목한 다음 장소는 바로 명동이었다. 50년 전 당시 명동은 서울의 유일한 번화가였고, 일부러 사람이 가장 많이 몰려있는 곳을 찾은 것이었다. 그들에게는 무언가 세상에 '폭로'하고 싶었던 것이 있었다.

범인들은 길목을 가로막던 군경과 총격전을 벌였다. 군경은 공포탄과 바리케이드로 저지하려고 했지만 다수의 인질 때문에 적극적인 대처에 한계가 있었다. 버스는 결국 군경의 저지를 뚫고 목적지인 명동까지 도착했다. 버스에서 내린 세 범인은 총 3명의 인질만 남겨두고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풀어줬다.

그들이 들어간 건물은 명동에 있는 '유네스코 회관'이었다. 1967년에 준공한 유네스코는 명동의 랜드마크이자 1974년 당시에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다. 범인들이 향한 최종 목적지는, 유네스코 회관 지하에 위치한 다방이었다.

유네스코 지하다방은 당시 서울 최고의 핫플레이스로 꼽히던 곳이었다. 그 시절엔 다방마다 신청곡과 사연을 틀어주는 DJ가 있었고, 턴테이블에 LP판을 올려 음악을 틀곤 했다. 당시 유네스코 지하다방의 DJ는 당시 21살 남도영씨였다. 당일은 월요일 오전이었지만, 다방에는 꽤 많은 손님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어렵게 인터뷰에 응한 도영씨는 50년 전 그날의 생생한 기억을 이렇게 증언했다.

"음악실에서 문을 보는데, 맨 앞에 어떤 사람이 총을 들고 들어오더라. 처음엔 '다방에 무슨 총까지 들고 오는 사람이 있어?' 속으로 우습다고 생각했는데, 조금 있다가 사람들이 꾸역꾸역 안으로 막 들어왔다. 이상한 기운을 느끼고 예사로운 사건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오전 10시. 범인들은 다방에 있던 31명과 버스에서 끌고 온 3명을 더하여 총 34명의 시민을 인질로 잡았다. 서울 도시 한복판, 가장 화려한 명동에서 벌어진 초유의 인질극에 세상은 난리가 났다. 군경 300여 명이 건물을 포위하고 거리를 통제했으며, 현장에는 언론사 기자들이 급파되어 그야말로 전시상황을 연상시켰다.

범인들은 들어오자 마자 출입문을 의자와 테이블로 봉쇄했고. 인질들은 남녀로 구분하여 벽 쪽에 몰아놨다. 이원모는 나이대가 비슷한 도영씨를 지목하여 자질구레한 심부름을 시키거나 문 밖을 오가며 군경의 동태를 살피게 했다.

인질극이 벌어진 지 1시간가량이 지난 오전 11시 무렵. 다방 전화기가 울리면서 범인들과 군경의 첫 번째 통화 협상이 시작됐다. 이원모의 요구조건은 "국방부 장관과 이야기 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군경 측이 먼저 자수를 권유하자 이원모는 흥분하여 천장에 총을 난사하며 분노를 드러냈다.

군경 측은 이번엔 이원모의 어머니와 여자친구를 차례로 데려와 선처를 약속하고 자수를 설득하려고 했다. 하지만 단호한 이원모는 그때마다 냉랭한 반응을 보이며 거부했다.

그런데 범인들은 총기로 위협을 가하기는 했으나 인질들에게 직접적인 위해를 가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몇 차례에 걸쳐 인질들을 풀어주기도 했다. 가장 먼저 풀려난 40대 여성 최씨는 심장병이 있다며 총소리 때문에 죽을 거 같다고 호소하니, 범인들이 그냥 풀어줬다고 밝혔다. 두 번째는 식사를 제공한 데 대한 보답이라며 고령이거나 몸이 약한 8명의 인질을 추가로 풀어주기도 했다. 위험한 듯 하다가도 너그러운 범인들의 예측불가능한 반응에 군경은 종잡을 수 없었다. 풀려난 인질들은 범인들 사이에서도 자수를 놓고 의견 충돌이 벌어지고 있다고 진술했다.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의 한 장면.
ⓒ SBS
 
잠시 후 범인들은 이번엔 DJ인 도영씨에게 음악을 틀어달라고 요구했다. 범인들은 도영씨가 틀어준 팝송을 흥얼거리거나 노래에 관한 정보를 도영씨에게 묻기도 했다. 분위기가 약간 누그러지자 도영씨는 범인들에게 "국방부 장관은 왜 만나려 하는 거냐"고 질문했다.

이원모는 부대 내에서 벌어진 부조리를 폭로하기 위해서라고 속내를 고백했다. 당시 부대에서 출퇴근을 하는 방위병들에게 매일 1500원(현재 약 10만 원)씩 뜯어가곤했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당연히 군인 신분에 그만한 돈을 구하기가 어려워서 못 주는 날이 많아졌고, 그럴 때마다 심한 구타에 시달렸다고 한다. 심지어 이원모는 인질극을 벌이기 전날에도 고참들한테 구타를 당했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여기서 도영씨는 뜻밖의 사실 하나를 더 알게 됐다. 도영씨는 범인들의 이야기가, 어디서 많이 듣던 내용이라는 기시감을 느꼈다. 도영씨의 절친한 친구도 방위병이었고 범인들과 똑같은 피해를 당했던 일을 호소하여 도영씨가 돈을 보태준 일도 있었다.

도영씨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친구의 이름을 거론했고, 이원모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알고보니 도영씨의 절친은 이원모와 같은 부대 동료로 가까운 사이였던 것. 한마디로 두 사람은 '서로의 가장 친한 친구의 친구'였는데, 운명의 장난처럼 '인질범과 인질'로 대면하게 되었던 것이다.

분위기는 달라졌고 도영씨는 친구의 친구인 이원모에게 친밀감을 느끼게 됐다. 경계심이 풀어진 범인들은 도영씨에게 애초에 이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었다는 속내까지 밝혔다. 끝없는 폭행과 갈취에 지친 범인들은 급기야 한국을 떠나 일본으로 밀항을 구상했다. 그러나 허술한 범행계획으로 상황은 꼬였고, 오히려 우발적으로 경찰을 쏘는 대형사고까지 벌이게 되면서 일이 커졌다. 결국 범인들은 최후의 수단으로 국방부 장관을 만나 군 부조리를 알리기 위하여, 명동까지 와서 인질극을 벌이게 된 것이었다.

이원모와 친구가 된 도영씨는 상대적으로 특혜를 받아 자유롭게 다방 안을 돌아다닐 수 있게 됐다. 다른 인질들도 긴장이 조금씩 풀리면서 조심스럽게 범인들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에 자극받은 이원모가 다시 총을 천장에 난사하면서 분위기는 다시 얼어붙었다. 여전히 범인들의 감정은 한 치 앞도 종잡을 수 없는 롤러코스터를 타고 있었다.

범인들이 이토록 자수를 강경하게 거부한 가장 큰 이유는 "경찰관까지 죽였기 때문에 어차피 자수해도 무사하지 못할 것"이라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실제 김장식 순경은 안타깝게도 총을 맞고 이미 순직한 상태였다. 그런데 다방에는 뉴스를 접할 수 있는 TV나 라디오가 없었기에 범인들은 아직 김 순경의 명확한 생사는 알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군경은 도영씨를 통하여 받은 정보로 범인들의 속내를 파악한 뒤, 언론사의 긴급 협조를 받아 김 순경이 부상을 당했지만 무사하다는 내용을 담은 '가짜 신문'을 제작하여 범인들에게 전달했다.

범인들은 처음엔 신문 기사를 읽고 좀 안심하는 반응을 보였지만, 최성환만이 가짜임을 먼저 눈치채면서 회유 작전은 실패로 돌아간다. 최성환은 바로 김 순경을 저격한 장본인이었기에 근거리에서 총을 네 발이나 맞고 살았을 리가 없다는 것을 직감한 것이다. 그리고 이는 범인들을 더욱 자극하는 역효과를 불러왔다.

흥분한 범인들은 다시 총기를 난사하고 전화를 부수는가 하면 다방안에 있는 LPG통을 끌어모았다. 범인들이 홧김에 가스통에 총을 쏘기라도 하면 다방안의 모든 사람들이 몰살 당할 수 있는 상황. 인질들은 모두 공포에 질렸다. 막다른 골목에 몰린 것을 직감한 듯, 범인들은 다방 한쪽 구석에 의자와 테이블을 쌓아 작은 공간을 만들고 인질들과 공간을 분리시켰다.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의 한 장면.
ⓒ SBS
 
새벽이 되어 범인들은 술을 마시면서 도영씨에게 다시 노래를 틀게 했다. 취기가 올랐는지 노래를 듣던 범인들은 눈물을 흘리며 흐느끼기도 했다. 도영씨는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들의 착잡하고 후회막심한 심경이 느껴지며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끝을 알 수 없는 인질극은 어느덧 새벽 4시에 이르렀다. 그런데 도영씨는 총을 들고 있던 범인들의 눈이 어느새 하나둘씩 감기더니 졸기 시작한 것을 포착했다. 범인들은 초긴장으로 꼬박 하루를 보내고 독한 술까지 마신 뒤였다. 도영씨는 이 기회를 절대로 놓치면 안된다고 직감하고, 몇몇 인질들에게 조용히 눈짓으로 사인을 보냈다. 기회는 단 한 번 뿐이었고, 실패하면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었다.

용기를 내어 조심스럽게 접근한 도영씨는 가장 먼저 이원모의 총을 빼앗아 멀리 던져버렸고, 그와 동시에 다른 인질들도 소리를 지르며 남은 두 명한테 달려 들었다. 바깥에 있던 기동대도 상황을 눈치채고 유리문을 부수고 안으로 진입했다. 운명의 새벽 6시 5분, 인질극이 터진 지 20시간 만에 범인 3명은 비로소 제압되었고 인질들은 무사히 가족들의 품에 돌아올 수 있었다.

도영씨는 당시 인질범을 잡은 영웅으로 '용감한 시민상'을 수상했지만 정작 언론의 관심을 일절 사양했다. 도영씨는 수상식에서도 덤덤한 표정으로 "범인들의 범죄 동기가 어떠하든 어른들이나 상급자들은 청소년이나 부하들을 따뜻한 마음으로 감싸줘 다시는 이런 일이 없어야 하겠습니다"라는 의미심장한 소감을 밝혔다. 이는 범인들이 일탈을 할 수밖에 없었던 속사정을 대신해서 말해주고, 정확한 조사를 촉구한 것이었다.

도영씨는 사건 이후, 다시 한 번 범인들을 마주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도영씨는 온몸이 묶여서 구타로 만신창이가 되어있는 범인들의 참혹한 모습을 보고 오히려 안타까움에 눈물이 왈칵 났다고 한다.

사건이 종료되고 얼마 뒤 군에서 사건조사 결과를 발표한다. '범인들은 평소 소행이 불량한 전과자들로 여자관계가 복잡했으며 총을 훔쳐 강도짓을 하다가 일본으로 달아나기로 모의, 범행을 저질렀다. 범인들이 군대 부조리 운운한 것은 구실에 불과하다'는 게 군의 공식 입장이었다.

그런데 유네스코 지하다방 사건이 벌어지기 전에도 군대에서는 비슷한 사건이 여러 차례 발생했다. 동대구역 조 하사 인질극 사건, 금산 최 일병 다방 인질극 사건, 포천 정 하사 다과점 수류탄 인질극 사건 등 같은해 비슷한 시기에 무장 탈영병이 벌인 인질극만 무려 5번이나 벌어졌다. 그리고 범행 동기는 공교롭게도 모두 다 '부대 내 폭행과 금품 갈취'였다.

하지만 탈영병들의 진술은 매번 묵살됐다. 물론 그들이 저지른 테러, 인질극, 경찰관 살해 등의 범죄는 결코 옹호될 수 없다. 그러나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재발 방지를 위해 꼭 필요했던 '구조적인 원인'에 대한 조사는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서슬퍼런 그 시절에는, 범죄를 예방하는 것보다 처벌이 더 우선됐다. 군대 부조리에 대한 방관과 외면이, 무고한 경찰관 순직과 유네스코 지하다방이라는 더 비극을 불러온 것이다.

사건 20일 후인 6월 10일. 인질범 세 사람은 모두 군복을 입고 군 법정에 세워졌다. 최성환과 윤찬재는 민간인이었지만 이원모와 같이 군사재판을 받게 됐다. 온국민의 관심이 쏠린 사건인 만큼, 재판은 전국에 방송되었고 세 범인은 살인, 살인미수, 근무이탈, 초소침범 등 총 9가지 죄목이 인정되어 사형을 선고받았다. 선고가 내려진 순간 범인들은 한참을 고개 숙여 눈물을 흘렸다.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의 한 장면.
ⓒ SBS
 
당시에도 이 판결은 논란이 많았다. 군인이었던 이원모는 그렇다고 해도, 나머지 민간인 두 명까지 군법을 적용하는 것은 무리한 재판이라는 의견도 있었지만 당시 법원은 재정 신청을 기각했다. 사형선고에 묻혀 군대 내 부조리 문제는 아예 밖으로 거론되지도 못했다.

이원모 이병은 사형을 선고 받고 어머니께 회한과 속죄의 심경을 담은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또한 윤찬재는 사형 전에 본인의 안구 기증을 당부하며 '죽더라도 사회에 좋은 일 하나는 남기고 싶다'는 말을 유언으로 남겼다고 한다.1975년 8월, 세 사람은 군법에 따라 한날한시에 총살을 당하며 세상에서 사라졌다.

이 사건의 유일한 사망자이자 최대의 피해자인 김장식 순경의 아내는, 오히려 남편을 죽인 범인들의 부모에게 찬송가를 보내 위로했다고 한다. 김순경의 아내는 남편을 잃고 어린 세 아이를 홀로 키워야 하는 상황이었음에도 오히려 가해자의 유족을 용서하는 길을 선택했다.

지금은 미국에 거주하는 김 순경의 둘째 딸인 학화씨는 "원망보단 이겨내시고, 용서를 하신 거 같다. 저희 삼형제도 아버지의 희생과, 어머니의 용서를 마음에 새기고 바르게 살려고 노력했던 것 같다"면서 한편으로는 "당시 범인들은 지금 제 자식보다 어린 나이더라. 좋은 영향력을 줄 수 있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었거나, 사회적으로 도와줄 수 있는 시스템이 있었더라면, 그들이 무모한 짓을 하지 않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고 밝혔다.

도영씨는 지난 50년 동안, 인질범을 잡았다는 걸 한 번도 자랑삼아 이야기하지 않았고, 오히려 세 사람을 떠올리면 가슴이 아프다고 고백했다. 도영씨는 "그 친구들하고 친하게 지내다가 결국 이제 그렇게 해서 총을 뺏었으니까 묘한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라고 안타까워하며 "그들은 환경만 조금 달랐다면, 우리와 다른 삶을 살지 않았을 사람들이다. 그래서 우정 아닌 우정이랄까, 그런 것들이 나름대로 생겼던 것 같다"고 전했다.

남도영씨가 전한 마지막 이야기는 깊은 울림을 남긴다. 도영씨가 세 범인들이 인질과 인질범이 아니라, 그냥 동일한 시대를 살아가던 평범한 친구로 만났더라면, 그저 술 한 잔에 좋은 음악을 함께 나누면서 우정을 나누는 사이가 될 수도 있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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