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경미의 영화로 보는 세상] 구원자인가 파괴자인가, 천재과학자의 딜레마
8.15 광복절은 일본으로부터 나라를 되찾고,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것을 경축하기 위해 제정된 국가기념일이다. 30여년 동안 이어진 일본의 한반도 강점과 제2차 세계대전은 1945년 일본의 패전 선언과 항복으로 종결되었다. 그리고 이는 미국이 발사한 원자폭탄 때문이었다.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와 8월 9일 나가사키에 투하된 2발의 원자폭탄으로 히로시마 인구 34만명 중 14만명이 목숨을 잃었고, 나가사키에서도 4만명이 죽었다. 최근 광복절에 맞춰 개봉한 영화 ‘오펜하이머’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핵무기 개발을 주도한 J. 로버트 오펜하이머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독일 나치의 맹위가 한창이던 1942년, 미 육군 대령 레슬리 그로브스(맷 데이먼 분)는 천재 물리학자인 오펜하이머(킬리언 머피 분)를 핵무기 개발을 위한 ‘맨해튼 프로젝트’의 연구책임자로 임명한다. 오펜하이머는 사막 한가운데에 로스앨러모스 연구소를 설립해 연구를 이어간다. 한편, 거물 사업가이면서 미국 에너지국 위원인 루이스 스트로스(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분)는 오펜하이머에게 수소폭탄 개발을 제안하지만 거절당하자 오펜하이머에게 앙심을 품는다. 스트로스는 원자폭탄으로 전쟁을 승리로 이끈 오펜하이머를 소련의 스파이로 몰아간다.
영화는 J. 로버트 오펜하이머의 딜레마를 다룬다. 오펜하이머는 UC버클리 교수 재직 시절 세계 최초로 핵실험 ‘트리니트’를 이끌었다. 그는 일본에 원폭을 투하해 한순간에 미국의 스타로 떠올랐지만 자기가 만든 무기가 많은 사람을 살상했다는 점에서 격심한 정신적 고통에 시달린다. 영화는 오펜하이머의 과학적 성과와 인간적 고뇌, 개인적 수난에 집중한다. 2006년 퓰리처상 수상작인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 로버트 오펜하이머 평전’을 원작으로 한 영화에서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인간에게 불을 가져다주고 독수리에게 심장을 쪼아 먹히는 형벌을 받은 프로메테우스에 오펜하이머를 비유한다. 영화는 세상을 구하려다 오히려 세상을 파괴시킬 수밖에 없었던 오펜하이머의 도덕적 딜레마에 초점을 맞춘다.
당시 정치적 상황도 조명된다. 뉴욕의 부유한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난 오펜하이머는 하버드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독일에서 양자물리학 박사를 취득했다. 그는 1930년대 유럽에서 부상하는 파시즘을 막기 위한 최선책이 공산주의라고 믿었던 적이 한때 있었기 때문에 그의 동생, 여자친구, 부인까지 공산주의자였다. 유대인이었던 그가 수소폭탄 개발에 거부한 이유는 엄청난 폭발력을 가진 수소탄의 사용을 정당화할 수 있는 합법적인 군사표적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당시 미국 내 공산주의 색출을 위한 매카시즘의 광풍이 불던 시절, 그의 사랑과 애국심은 의심받기 시작하며 그의 사생활 또한 청문회를 통해 난도질당한다. 영화는 당시 정치적 상황에 휩쓸린 그의 고통을 잘 보여주고 있다.
킬리언 머피의 연기도 관객들의 몰입감을 높인다. 오펜하이머를 연기한 킬리언 머피는 고뇌와 환희, 불안과 욕망, 전쟁과 사랑 등 도덕적 딜레마에 빠진 천재 물리학자의 복잡다단한 처지를 잘 표현했다. 파랗고 투명한 눈동자, 삐쩍 마른 야윈 체구의 킬리언 머피는 오롯이 오펜하이머 그 자체다. 아일랜드 출신인 그는 이번 작품에서 첫 주연을 맡으면서 필모그래피에 인생작을 올렸다. 뿐만 아니라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맷 데이먼, 에밀리 블런트, 플로렌스 퓨, 라미 말렉 등 명배우들이 총집합해 이들의 다양한 연기를 감상하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다.
국가의 이익과 개인의 이익이 상충될 때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할까. J. 로버트 오펜하이머는 국가의 이익을 위해 원자폭탄을 개발했지만, 개인적으로는 대량 살상 무기를 만들었다는 죄책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현대사회에서는 국가나 국민 전체의 이익보다는 개인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경우가 많다. 영화 ‘오펜하이머’는 두 이익 사이에서 선택의 기로에 섰던 한 천재과학자의 고뇌를 우리에게 심도 깊게 보여주고 있다.
양경미 / 전) 연세대 겸임교수, 영화평론가film102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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