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컬처]뜨거운 여름밤이 가도 남은 건 볼품없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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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의 청춘을 노래하는 밴드 잔나비의 음악은 기성세대가 듣기에도 부담이 없다.
뜨거운 여름밤은 가고 남은 건 볼품없지만, 창문 너머 어렴풋이 옛 생각이 나겠지요.
수색작업에서 최소한의 안전 수칙이 지켜졌더라면, 괴로움을 호소하는 선생님을 살피고 도와주는 제도적 장치가 있었더라면 스물, 스물셋 청춘은 인생의 찬란한 여름을 맞이할 수 있었을 텐데.
슬픈 여름밤이 가도 남은 것이 볼품없지는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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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수근 상병·서이초 교사
안전한 환경으로 제대로 바뀌길
이 시대의 청춘을 노래하는 밴드 잔나비의 음악은 기성세대가 듣기에도 부담이 없다. 내가 연출하는 프로그램에 잔나비 노래를 신청하는 청취자들 나이를 봐도 20대부터 50대까지 매우 다양하다. 작사 작곡을 전담하는 리더 최정훈이 이문세나 산울림 같은 부모 세대 음악의 정서를 거부감없이 녹여 쓰기 때문이다. 이런 태도는 요즘 젊은 세대가 1990년대 패션을 천연덕스럽게 재현하는 모습과 매우 닮았다. 포대 자루 같은 바지와 짧은 상의를 함께 입는 이른바 힙합 패션이 1990년대 우리 엑스세대의 일상복이었는데, 요즘 아이들이 딱 그렇게 입고 다닌다. 물론 패션 코드는 엄연히 다르겠지만, 내 눈에는 꽤 닮았다.
지금의 잔나비를 있게 해준 노래도 제목부터 예스럽다. 뜨거운 여름밤은 가고 남은 건 볼품없지만, 창문 너머 어렴풋이 옛 생각이 나겠지요. 산울림의 노래 제목을 슬쩍 붙여보니 원래부터 한 문장인 양 자연스럽다. 원래 노랫말은 이렇다. 뜨거운 여름밤은 가고 남은 건 볼품없지만, 또다시 찾아오는 누군가를 위해서 남겨두겠소.
올여름도 서서히 물러가고 있다. 한낮의 태양은 아무렇지 않은 척해도 아침저녁으로 부는 바람은 태양의 계절이 저물었다고 일러바친다. 올여름, 어떤 청춘은 인생의 여름을 채 맞이하지도 못하고 스러졌다. 해병대 복무 중 실종자 수색작업에 동원되었다가 순직한 20살 채수근 상병, 업무 스트레스를 토로하다가 스스로 생을 마감한 23살 초등학교 선생님 이야기다.
두 죽음 모두 엄청난 사회적 파장을 몰고 왔다. 고 채수근 상병 사건을 계기로 재난 재해 상황에서 군인들을 무리하게 동원하는 행태를 근절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현재 수사 과정에서 외압이 행사되었다는 고발도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서이초 선생님의 죽음이 알려진 뒤, 전국의 선생님들이 눈물과 분노의 추모를 이어가고 있다. 선생님들의 근무 환경도 문제투성이임이 드러났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런 문제는 이미 우리가 다 알고 있는 것들이었다. 군대에서 터진 안전불감증 사고가 어디 한두 건이었나? 학교에서도 교권 추락을 알리는 크고 작은 징후들이 있었다. 그때마다 군과 교육 당국에서 뭔가를 하는 척했지만, 결과는 이러하다. 수색작업에서 최소한의 안전 수칙이 지켜졌더라면, 괴로움을 호소하는 선생님을 살피고 도와주는 제도적 장치가 있었더라면 스물, 스물셋 청춘은 인생의 찬란한 여름을 맞이할 수 있었을 텐데. 그들이 자신의 임무를 회피하지 않고 어떻게든 해내려다가 스러졌기에, 종종 적당히 요령을 피우며 살아온 어른으로서 더 슬프고 미안해진다.
계절이 어김없이 바뀌듯 우리의 관심사도 바뀐다. 늘 새로운 사건이 지난 사건을 밀어낸다. 조폭들의 싸움판이 아니라 보통 사람들의 일상 공간에서 연이어 벌어진 칼부림 난동은 충격과 공포 그 자체였다. 마약에 취해 롤스로이스로 사람을 치어 뇌사 상태에 빠뜨린 남자가 공분을 자아냈고, 파행으로 시작했다가 케이팝으로 수습된 잼버리는 한 편의 블랙코미디였다. 정치권 소식과 경제 뉴스도 매일 쏟아진다. 가을에도 세상이 돌아가는 속도는 느려지지 않을 테지만, 두 청춘의 슬픈 여름이 조금만 더 오래 기억되었으면 좋겠다.
일단 관련 수사부터 제대로 마무리되어야 한다. 누군가를 처벌함으로써 슬픔과 안타까움을 달래기 위해서가 아니라 군인과 선생님들이 좀 더 안전하고 상식적인 환경에서 일할 수 있게 만들어주기 위해서다. 이번엔 제대로 바꿔보자. 제발. 슬픈 여름밤이 가도 남은 것이 볼품없지는 않기를.
이재익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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