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오펜하이머'가 빠뜨린 여성 과학자 이야기
[윤현 기자]
▲ 미국 원자폭탄 개발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한 여성 과학자를 소개하는 <워싱턴포스트> |
ⓒ 워싱턴포스트 |
영화 <오펜하이머>에서 '원자폭탄의 아버지'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는 로스앨러모스의 비밀 연구소를 이끌며 과학자들의 부인에게 일자리를 주자고 한다.
이렇듯 로스앨러모스에서는 전 직원의 11% 정도인 640명의 여성이 일했다. 이들 절반은 행정 업무를 맡았고, 절반은 원자폭탄 개발에 참여한 과학자들이었다. 원자 폭탄이 탄생하기까지 수많은 '어머니'들이 있었으나, 영화에는 좀처럼 등장하지 않았다.
<워싱턴포스트>는 "이 영화는 과학적 근거를 통해 원자폭탄 개발의 이야기를 설득력 있게 전하고 있다"라며 "그 중대한 노력에 여성도 큰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영화에는 남성 과학자들만 나오지만...
'아주 일부만' 소개하자면 수학자 나오미 리브세이는 대학 시절 교수에게 "고등 수학 분야에는 여성이 설 자리가 없다"라는 말까지 들었으나, 로스앨러머스에서 계산 전문가로 활약했다. 리브세이는 당시 남성 과학자들도 낯설어 했던 기계식 계산기로 원자 폭탄의 내파 시뮬레이션이 성공하는 데 기여했다.
생물학자인 플로이 아그네스 리는 원자폭탄 실험을 하며 방사선량에 노출된 과학자들의 혈액 샘플을 채취하고 검사했다. 그녀는 전쟁이 끝난 후에도 로스앨러모스로 돌아와 인체에 대한 방사선의 영향을 계속 연구했다.
▲ 미국 원자폭탄 개발에 참여한 폭발물 전문가 프랜시스 던 |
ⓒ 뉴클리어 뮤지엄 홈페이지 |
로스앨러모스의 폭발물 조립팀에서 유일한 여성으로 활약했던 던은 전쟁 후 미국 연방수사국(FBI)으로 옮겨 경력을 이어갔다.
레오나 우즈는 오펜하이머를 도운 저명한 물리학자였다. 맨해튼 프로젝트 현장에서 수많은 남자들 가운데 서서 현장을 찍는 카메라를 바라보고 있는 그녀를 <워싱턴포스트>는 "마치 '나도 여기 있었다는 걸 잊지 말라'고 말하는 것 같다"라고 묘사했다.
역시 물리학자인 마리아 괴페르트 마이어는 그래도 운이 좋은 편에 속한다. 노벨상을 받으며 이름을 떨쳤기 때문이다. 원자폭탄이 아닌 수소폭탄 연구에 참여했던 마이어는 오펜하이머도 존경하는 학자였다. 원자핵의 껍질 모형을 제안한 그녀는 1963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다. 1903년 마리 퀴리에 이어 여성으로는 두 번째 쾌거였다.
▲ 영화 <오펜하이머>에 등장하는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와 키티 오펜하이머 부부 |
ⓒ 유니버셜 픽처스 |
이렇듯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의 <오펜하이머>는 배우들의 열연과 훌륭한 작품성으로 관객과 평단의 박수를 함께 받고 있으나, 원자폭탄 개발에 참여했던 여성 과학자들을 상대적으로 '홀대'했다는 지적도 나온다.
영화 평론가 라디카 세스는 <보그> 칼럼에서 "<인터스텔라>처럼 예외도 있지만, 놀란 감독의 작품은 여성 캐릭터가 잘 눈에 띄지 않는 경향이 있다"라고 짚었다.
이어 "<오펜하이머>에서도 원자폭탄 개발에 참여하고, 또 원자폭탄 사용에 항의하고, 노벨상 수상자까지 여성 과학자들의 노력은 놀란 감독이 말하고픈 이야기에 필수적이었지만, 영화에는 거의 나오지 않았다"라고 평가했다.
특히 오펜하이머의 아내 키티에 대해 "결혼하고 아이를 낳은 뒤 그녀가 산후 우울증과 알코올 중독에 빠지게 된 서사를 생략한 탓에 개연성을 떨어뜨렸다"라고 꼬집었다.
그러면서 "수많은 할리우드의 스타 여배우들이 놀란 감독의 작품에 출연하고 싶다는 이유로 덜 중요한 배역을 감수했지만, 이들을 위해 더 좋은 캐릭터를 만드는 것은 감독의 몫"이라며 "놀란 감독은 이를 감당할 능력이 있고, 다음 작품에서는 더 잘하기를 바란다"라고 당부했다.
원자폭탄 개발에 참여한 여성 과학자들을 소개하는 다큐 제작자 케이시 하프너와 에이미 샤프도 <워싱턴포스트>에 "우리의 일은 위대한 업적을 이뤘으나 평생 주목받지 못했던 여성들에게 빛을 비추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오펜하이머>도 오펜하이머라는 한 남자, 그 주변에 있는 수많은 남성 과학자들의 일과 삶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라며 "하지만 원자폭탄 개발의 모든 분야에 기여한 여성들을 기억하는 것도 중요하다"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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