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검찰에 기소된 전 대통령, 이게 더 치명적인 이유 [임상훈의 글로벌리포트]
[임상훈 기자]
▲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을 기소한 패니 윌리스 조지아주 풀턴카운티 검사장이 지난 8월 14일 조지아주 애틀란타 풀턴 카운티 정부 청사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
ⓒ 연합뉴스/AFP |
퇴임 후 네 번째에 해당하는 이번 기소에 대해 트럼프 전 대통령은 앞선 세 차례와 다른 차원의 사법적 대응을 해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조지아주 검찰이 트럼프 전 대통령을 리코법(RICO Act)에 근거해 기소했기 때문이다.
리코법은 1970년 공화당의 리처드 닉슨 대통령 재임 당시 조직범죄에 대한 대대적 단속을 목적으로 제정됐다. 본래 마약 조직, 마피아 등의 활개를 저지하기 위한 사정 활동의 일환이었으나 1980년대 이후 일반 개인과 기업에까지 점차 이 법의 적용 범위가 넓어졌다.
'협박 및 부패 조직에 관한 연방법 (Racketeer Influenced and Corrupt Organizations Act)'의 약자인 리코법은 '고무줄 기소' 논란도 없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 주장을 압도할 만큼 1970~80년대 미국 사회를 범죄 조직으로부터 보호하고 안정화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한 게 사실이다.
문제는 리코법의 적용이 트럼프 전 대통령의 혐의 내용에 일치하는가 하는 점이다. 이와 관련한 법적 다툼의 여지에도 불구하고 조지아 검찰이 이 법을 적용한 이유가 이번 기소의 핵심이 될 전망이다.
▲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지난 4월 4일 뉴욕 맨해튼 형사법원으로 향하고 있는 모습. |
ⓒ AFP=연합뉴스 |
얼핏 연방검찰의 기소가 더 치명적으로 보이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 트럼프 전 대통령에게는 여러 가지 의미로 이번 조지아 검찰의 기소가 가장 신경 쓰일 수 있다. 트럼프 전 대통령 앞에 놓인 재판 과정은 그에게 사법적 차원뿐 아니라 정치적 차원의 고차방정식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두 건의 연방검찰 기소 내용은 기밀문서 반출 및 불법 보관 혐의, 그리고 2021년 1월 6일 의사당 점거 관련 혐의다. 사안의 특성상 기밀문서 유출 혐의보다 의사당 점거 관련 모의, 선거 사기 유포 혐의의 비중이 커 보인다. 국기문란의 심각성과 국민적 관심이 더 큰 이유다.
미국 유권자의 절반 이상이 만약 의사당 점거 사태 관련 트럼프 전 대통령에 대한 유죄가 인정된다면 후보직을 사퇴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 말은 뒤집어 볼 필요가 있다. 트럼프 전 대통령에 대한 유죄가 인정된다 하더라도 대선 레이스를 접어야 할 법적 의무는 없다는 것이다.
법적으로 현재 미국 대선에 출마할 자격은 미국에서 태어나서 후보 등록 직전 최소 14년을 미국에서 거주한 35세 이상의 시민에게 주어진다. 사법적 문제의 유무는 대통령 입후보 자격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의미다.
과거 1920년 노동 운동가 출신 유진 데브스 후보가 옥중 출마를 해 90만 표를 얻은 전례도 있다. 트럼프 전 대통령 역시 여러 건의 재판결과에 따라 최악의 경우 수감된다 해도 옥중 출마를 할 가능성은 열려 있다. 그에 대한 지지자들의 성향상 수감될 경우 더 결집될 가능성도 있다.
만약 옥중 출마를 해서 당선까지 된다면 대통령의 권한으로 사면도 생각할 수 있다. 이 모든 시나리오가 대통령으로서의 자질 문제로, 비난의 여지는 있다. 하지만 지구촌 많은 곳에서의 현대 정치가 그렇듯 미국 역시 도덕적 비난이 정치인의 비도덕적 모략을 접도록 강제하지는 못한다.
지구촌 곳곳에서 이런 이유로 정치 혐오 현상이 심화되고 있는 현실이지만, 그런 현상을 만들고 있는 게 유권자들이기도 하다. 도덕 불감증 시대의 정치인은 그렇게 만들어지고, 그런 시대를 만든 유권자들은 지지하는 정치인 주변으로 좀비처럼 몰려드는 정치 양극화가 심화되고 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현재 공화당 지지자들로부터 압도적 지지를 얻고 있다. 최근 여론조사(16일 AP통신/시카고대 여론연구센터)에 따르면 본선 진출 시 지지율이 36%에 불과하지만 거의 대부분의 여론조사에서 공화당 예선에서는 50% 이상의 지지율을 확보하고 있다.
사법 리스크를 뒤덮고도 남을 그의 경쟁력은 이러한 두터운 '묻지마 지지층'에서 나오고 있다. 하지만 이 모든 시나리오는 연방 검찰의 기소에 대한 법정 싸움의 경우에 한한다. 만약 그가 대통령이 되면 연방검찰은 그의 지휘를 받는 공무원이기 때문이다.
권력자의 의지에 순응하는 대부분의 임명직 공무원처럼 미국 연방 검찰의 행동반경도 트럼프 전 대통령이 재야에서 대통령으로 신분이 변하는 순간 많이 달라질 수 있다. 하지만 지방 검찰의 경우는 전혀 다르다.
미국 대부분의 주에서 주 검찰총장(State Attorney General , 주 법무장관이 겸임)과 지방 검사장(District Attorney)은 임명직 공무원이 아니라 선출직 공무원이다. 그들은 주민의 직접선거에서 선출된 공무원으로, 주지사는 물론 대통령의 지휘도 받지 않는다.
트럼프 전 대통령에게 행사된 한 건의 뉴욕 검찰 기소와 또 한 건의 조지아 검찰 기소가 두 건의 연방검찰 기소와 본질적으로 다른 것은 그런 이유다. 법적으로는 같은 절차와 법리 원칙을 따라야 하지만 정치적으로, 그리고 현실적으로는 전혀 다른 무게를 가지게 된다.
만약 트럼프 전 대통령이 공화당 후보로 지명되고 대선에서도 승리해 대통령이 된다면 연방검찰에 의한 두 건의 기소는 무력화시킬 수 있어도 지방 검찰에 의한 두 건의 기소는 그럴 수 없게 돼 있는 것이 미국 민주주의의 힘이다.
▲ 트럼프 전 대통령의 측근 루디 줄리아니는 조지아 검찰의 수사를 받고 있다. |
ⓒ 필라델피아 AP=연합뉴스 |
게다가 최근 조지아 검찰이 들고나온 리코법은 앞선 다른 세 건의 기소보다 트럼프 전 대통령을 더 옥죄는 무기가 되고 있다. 리코법의 취지는 본인이 직접 행한 일이 아니더라도 위법한 행위의 가해자를 지휘하는 위치에 있어 암묵적으로 그 행위를 가능하게 할 경우 처벌을 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기 위한 것이다.
범죄의 구체적 행위보다 행동 패턴에 초점을 맞춰 위법 사실을 증명하기 때문에 광범위한 '윗선' 수사가 가능하다. 과거 마약 조직이나 마피아의 수장을 처벌하기 위해 만들어진 법이지만 현재는 금융기관 수장을 포함 경제사범을 처벌할 수 있는 근거도 되고 있다.
마찬가지 논리로 정치인 본인이 직접 지시를 하지 않았어도 위법 사안의 지휘적 책임을 물어 처벌이 가능하게 하는 법이 리코법이다. 자신의 손에는 더러운 것을 묻히지 않고 악행의 배후에 서있는 정치·경제 권력자들이 이 법을 두려워하는 이유다.
흥미로운 사실은 과거 리코법의 칼날을 휘두르며 수많은 범죄를 소탕해 스타가 됐던 검사 루디 줄리아니가 현재는 트럼프 전 대통령의 측근으로 조지아 검찰의 리코법 칼날을 받고 있다는 점이다.
연방검찰의 뉴욕남부지구 검사장 시절 마피아 조직을 소탕해 그 인기를 몰아 뉴욕시장이 된 줄리아니. 리코법 최대 수혜자인 그가 이제는 반대로 같은 법을 들고나온 조지아 주 검찰에 의해 트럼프 전 대통령과 함께 기소된 사실이 아이러니하다.
사정 칼날에 취한 검찰이나 통쾌했다는 이유로 검찰을 정치로 불러들인 유권자는 권력이 바뀐 후 정반대의 입장에 놓일 수 있다는 사실. 미국 공화당 정치인과 지지자들은 요즈음 새삼 절감하고 있다.
그러고 보니 줄리아니 전 검사장·뉴욕시장이 한때는 민주당원이었다. 정치인들의 변신 기술은 가히 신기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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