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에게 들어본 ‘콘크리트 유토피아’ 이모저모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감독 엄태화)는 재난을 가정해 사람을 들여다보는 이야기다. 절대 선, 절대 악 없이 평범한 사람들이 극한 상황에서 어떻게 변할 수 있는지 보여준다. 아파트라는 상징적인 공간을 두고 주민들은 집단 광기에 가까운 모습을 드러낸다. 그러나 무엇이 옳고 그른지 쉽사리 판단할 수 없다. 나라면 어땠을지 생각하다 보면 묘한 불편함이 조용히 고개를 든다. 그들과 완전무결하게 다른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보통 사람들이 할 만한 생각과 행동이 어떻게 광기로 치닫는지를 그리며 관객을 자연스럽게 황궁아파트라는 공간으로 초대한다. 각본을 쓰고 연출을 도맡은 엄태화 감독의 치밀한 설계 덕이다.
김숭늉 작가가 그린 웹툰 ‘유쾌한 왕따’를 원작으로 두고 각색하던 엄 감독은 몰입감을 더하기 위해 방향을 비틀었다. 원작이 해원 시점에서 집으로 찾아가는 이야기를 그린 반면 영화는 신혼부부 민성(박서준)과 명화(박보영)를 주인공으로 내세운다. 이야기는 민성·명화 부부의 아파트에서 시작해 영탁(이병헌) 등 인물과 접점이 생기며 확장한다. “원작이 이미 변해버린 아파트를 외부에서 보고 느끼는 기괴한 공포를 그렸다면, 영화는 아파트를 주 무대로 주민들이 변해가는 과정을 보여주려 했다”는 설명이다. 최근 서울 삼청동 한 카페에서 만난 엄태화 감독은 시나리오를 구축하며 세운 목표에 관해 밝혔다. 관객 입장에서 이입할 만한 인물이 여러 사건을 겪으며 예측 불가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이야기. 엄 감독은 이를 목표로 ‘콘크리트 유토피아’를 만들어갔다.
아파트는 영화의 주 무대이자 중심 소재다. 감독은 아파트라는 공간에 깃든 한국적인 정서에 주목했다. “보편적으로 공감하기 쉬운 장소이자 애증이고 애환”인 이 공간에서 감독은 모든 이야기를 풀어간다. 관객을 단번에 세계관으로 이끌기 위해 택한 건 KBS1 다큐멘터리 ‘모던 코리아’ 영상이다. 1960년대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한국 아파트의 변천사를 다룬 이 영상은 한국인에게 아파트가 어떤 의미인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음악과 색감에도 신경 썼다. 윤수일의 ‘아파트’, 동요 ‘즐거운 나의 집’을 다양한 버전으로 편곡해 장면에 어울리도록 배치했다. ‘즐거운 나의 집’은 성가처럼 울려 퍼지다가도 음울함을 더하고, 일상을 대변하면서도 아이러니함을 배가한다. “영화의 모순과 부조화를 잘 보여주기 위해” 작업한 결과물이다. 이야기의 흐름은 색감을 통해서도 보여진다. 영화에는 차가운 푸른색과 건조한 회색, 불이 들끓는 듯한 붉은색 등 세 가지 색이 쓰였다. 극 말미에는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들어오는 영롱한 빛을 비추며 비극성을 끌어올린다. 과감한 카메라 구도 역시 백미다. 결말부에서 새 터전에 도달한 명화를 담는 구도 변화가 대표적이다. 엄 감독은 “바닥과 천장의 개념이 달라져도 충분히 살 만하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며 “단순한 시각 변화를 넘어 가치관의 변화까지 의도했다”고 귀띔했다.
주민잔치에서 ‘아파트’를 열창하는 영탁의 모습은 배우들과 관객이 꼽은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명장면이다. 감독 역시 각고의 고민을 거쳐 해당 장면을 콘티(촬영용 연출 대본)로 만들었다. 영화에는 시험 삼아 촬영한 리허설 영상을 사용했다. “어설프게 춤추는 배우들의 모습과 불안정하게 흔들리는 카메라가 이 장면과 어울려서” 내린 결정이다. 이외에도 해원(박지후)의 집에 들어간 영탁이 머리를 긁적이며 위압적인 면을 보여주는 장면 역시 리허설 영상이 영화에 그대로 들어간 예다.
배우들의 연기 역시 관전 포인트다. 이병헌은 이름값에 걸맞은 연기를 해낸다. 감독 역시 감탄한 순간이 여럿이었다. 감독은 “촬영 중 급히 추가한 장면에서도 에너지를 응축시킨 듯한 연기를 보여줬다”며 “대사 한 마디 없이 얼굴로만 감정을 설득시키는 저력에 놀랐다”며 엄지를 치켜들었다. 박서준은 동공까지 제어하는 듯한 연기를 펼쳤다고 한다. 그가 연기한 민성은 평범한 소시민이다. 관객이 가장 이입하기 쉬운 인물이기도 하다. 감독은 “연기하기 어려운 캐릭터임에도 중심을 잘 잡아줬다”고 했다. 박보영이 연기한 명화는 선한 신념을 고수한다. 감독은 옳은 말을 하는 명화가 답답하게 보이지만은 않도록 입체감을 부여하려 했다. 그는 “박보영이 변화하는 명화를 자연스럽게 표현했다”며 “관객이 명화를 두고 많은 이야기를 나누길 바랐다”고 힘줘 말했다.
결말에는 감독의 많은 고민이 함축돼 있다. 세계관과 상충하는 가치관을 갖고 있던 명화는 비극 이후 새로운 터전에 당도한다. 그곳이 희망인지 절망인지를 두고 관객 사이에서 토론이 벌어지기도 했다. 감독은 “가장 현실적인 희망을 그리면서도 완전한 희망처럼 보이진 않길 바랐다”고 설명했다. 공들인 만큼 관객 반응은 좋다.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개봉과 동시에 박스오피스에서 한국영화 1위를 놓치지 않고 있다. 감독은 “가짜처럼 보이지 않으면서도 현실적인 분위기 속 과장된 뭔가를 보여주려 한 작품”이라면서 “보면서 기시감을 느끼길 기대한다. 많은 질문을 나눠주면 좋겠다”고 염원했다.
김예슬 기자 yeye@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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