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돈줄·일자리 다 챙겼다…IRA 1년, 한국기업 속타는 사연
“이 법은 ‘제조업 르네상스 법’으로 불린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16일(현지시간) 백악관에서 열린 '인플레이션 감축법(IRA)' 시행 1주년 행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IRA가 제조업을 되살려 미국에 일자리를 만들고 있다는 자랑이다. 백악관도 “IRA는 에너지안보를 강화하며 양질의 일자리를 창출하는 혁신적인 법”이라고 자찬했다.
지난해 8월 16일 바이든 대통령의 서명으로 시행된 IRA는 기후변화 대응 등을 위해 7400억 달러(약 910조원)를 투자해 미국 내 신재생에너지 및 전기차 산업을 지원하는 법이다. 북미에서 최종 조립한 전기차에만 대당 최대 7500달러(약 1000만원)의 보조금을 세액공제 형태로 제공하는 게 핵심이다.
‘인플레이션 감축’이란 이름처럼 법 제정의 가장 큰 명분은 물가 잡기였다. 하지만 미국 물가 잡기에 IRA의 기여는 거의 없다는 게 전문가들의 생각이다. 제이슨 퍼먼 하버드대 경제학과 교수는 AP 통신에 “전기료가 줄었을 순 있지만, 물가 내리기에 (IRA의) 기여는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북미 배터리 생산 비중 2035년 31%”
실제 미국 청정에너지협회(ACP)에 따르면 지난 1년 간 미국 내 청정에너지 제조 시설에 2700억 달러(약 362조원)가 넘는 투자 계획이 발표된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미국에서 2015~2022년까지 8년간 관련 분야에 투자한 총액을 초과하는 규모다.
절반 가까이인 1300억 달러(약 174조원)가 전기차 분야에서 나왔다. 보조금 지급이란 ‘당근’으로 한국·일본·유럽 등의 전기차·배터리 기업이 미국에 생산 공장을 짓도록 한 결과다. IRA 보조금을 받으려면 전기차 완성차 업체는 배터리 광물을 미국 또는 미국과 자유무역협정(FTA)을 체결한 나라에서 40% 이상, 부품은 50% 이상을 북미에서 조달해야 한다.
이를 통해 미국은 공급망을 차근차근 구축하고 있다. 시장조사기관 SNE리서치는 전 세계에서 북미 지역의 배터리 생산능력 비중이 2022년 6%에서 2035년 31%로 성장할 것으로 봤다. 미 시사주간지 타임이 “IRA는 향후 도래할 수십 년 국제 경제의 형태를 규정하는 법”이라 평가한 이유다. 생산 기지 확보는 일자리 창출로 이어졌다. 뱅크오브아메리카(BoA)는 “IRA를 통한 민간투자 덕에 전기차 일자리 5만개를 비롯해 8만6000여개 일자리가 만들어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美 러브콜에 몸값 커진 한국
미 싱크탱크 피터슨 국제경제연구소에 따르면 미국의 한국산 전기차 수입은 2022년 6월~2023년 5월 사이 32억달러(약 4조2615억원)로 집계됐다. 2021년 9월~2022년 8월 기록한 18억달러(약 2조3964억원)보다 1.7배 늘었다. 미 정부가 리스 차량은 IRA의 북미 생산 요건과 상관없이 세액공제를 받을 수 있게 한 덕분이다.
이차전지 소재인 양극재 수출도 늘었다. 한국무역협회에 따르면 올해 1∼7월 대미 양극재 수출액은 18억3600만달러로, 지난해(6억6100만달러)보다 177.8% 급증했다.
미국의 ‘러브콜’에 한국 기업도 투자를 늘리고 있다.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한국 기업은 IRA와 반도체법이 시행된 이후 지난 1년간 1억 달러(약 1340억원) 이상의 대미 투자 프로젝트를 20건으로 가장 많이 발표했다. 유럽(19건), 일본(9건)보다 많았다.
투자는 전기차와 배터리 기업이 주도했다. 현대차그룹은 조지아주(州)에 첫 전기차 전용 공장을 짓고 있다. LG에너지솔루션과 SK온도 인근에 현대차와 배터리 합작공장을 각각 건설하기로 했다. 두 회사에 삼성SDI를 더한 K-배터리 3사는 GM·포드·스텔란티스 등 미국 자동차 회사와 합작 배터리 공장을 운영하거나 건설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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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의존은 여전히 부담
문제는 전기차·배터리 산업에서 절대적인 영향력을 가진 중국이다. IRA 조항에선 배터리 핵심 광물을 미국 정부가 지정한 ‘외국 우려기업(FEOC)’에서 조달하는 것을 금지한다. 하지만 시행 1년이 되도록 미 정부가 FEOC 세부 지침을 내놓지 않아 기업들의 애를 태우고 있다. 한국 정부가 지난 6월 미국에 FEOC 정의를 명확히 해 달라고 요청했을 정도다.
FEOC는 배터리 광물 공급에서 중국이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하는 걸 고려하면 사실상 중국을 겨냥한 조치다. 한국무역협회에 따르면 한국은 지난해 이차전지 양극재의 핵심 원료인 수산화리튬 90%를 중국에서 들여왔다. 전구체(98%)와 흑연(91%), 코발트(90%) 역시 중국 의존도가 절대적이다.
미국에선 더 강력한 중국 공급망 배제에 나서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블룸버그 통신은 “바이든 행정부는 공급망에서 중국 의존도를 낮추길 원하지만, 한국·중국 기업이 IRA를 우회하는 방식으로 ‘참호’를 구축하면서 공급망 재편을 어렵게 만들고 있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중국 배터리 기업 CATL(닝더스다이·寧德時代)는 포드와 손잡고 지난 2월 미국에 합작공장을 설립했다. 포드가 지분을 100% 보유하고 CATL의 기술협력을 받는 방식으로 IRA 규제를 피했다. 다른 중국 배터리 기업 궈쉬안(國軒)도 독일 폴크스바겐과 비슷한 방식으로 미시간주에 배터리 부품 공장을 짓고 있다.
한국도 포스코그룹과 LG화학이 각각 중국 전구체 업체 CNGR(중웨이·中偉)·화유코발트와 손잡고 전구체 공장을 건설 중이다. 미 정부가 향후 FEOC 가이드라인에서 이 같은 방식의 합작을 인정하지 않을 경우 사업에 차질을 빚을 수 있다. 박철완 서정대 스마트자동차학과 교수는 “미국도 배터리 공급망에서 중국을 완전히 제외하는 건 불가능해 FEOC의 엄격한 적용은 어려울 것”이라며 “단기적으로 중국과 지혜롭게 협력해 IRA 규제를 넘고, 장기적으론 광물 공급 다양화에 나서야한다”고 말했다.
이승호 기자 wonderm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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