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춘추] 尹, ‘조문 답례’ 여야 회동 제안할 기회
귀국해 여야에 조문 인사 겸한
방미 성과 설명 자리 마련하길
文정부 때 답례 만찬 마련돼
정국 현안 논의한 선례 있어
입법 협조 요청할 기회도 될 것
윤석열 대통령이 부친상을 치르고 방미길에 올랐다. 현직 대통령이 부모상을 치른 건 이례적인 일이다. 2019년 10월 문재인 전 대통령이 모친상을 치른 이후 두 번째다. 윤 대통령이 ‘멘토 1호’라고 늘 존경해온 아버지로 알려져 많은 이들이 위로의 조문을 했다. 한국 대통령이 다자회의 기회가 아닌 한·미·일 3자 정상회의 한 가지 이벤트를 위해 방미하는 것 또한 처음 있는 일이다. 만남의 형식도 눈길을 끌지만 동북아 역내 질서에 큰 변화가 생길 수 있는, 내용상으로도 중차대한 외교 행보다.
이런 사정을 감안하면 윤 대통령이 미국을 다녀와서 딱 하기 좋은 게 조문 답례를 겸한 여야 정치권 회동이다. 대통령이 상을 치르는 동안 국민의힘은 물론 더불어민주당과 정의당 등 야권 지도부도 일제히 빈소를 찾았다. 대통령의 사적인 일이고, 개별 조문을 사양했음에도 이심전심 찾아가 상주를 위로했다. 민주당에선 이재명 대표를 비롯한 당 4역의 조문과 별도로 당 수석대변인이 공식 애도문을 내기도 했다. 이튿날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선 친명계 최고위원이 또다시 대통령을 위로하는 공개 발언을 했다. 현 정부가 들어선 이래 대통령과 제1야당이 이번처럼 다정다감한 모습을 보인 때가 있었던가.
이런 분위기를 살려 윤 대통령이 조문 답례 자리를 마련해 봄 직하다. 윤 대통령은 취임 이후 야당 지도부와 현안을 논의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민주당 이 대표와의 만남 자체를 꺼리는 것도 같다. 과거 문 전 대통령도 야당과는 관계가 좋지 않았다. 특히 자유한국당 황교안 대표와는 상극이나 다름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친상을 치르고 보름 뒤 조문 답례를 하겠다며 황 대표를 비롯한 여야 대표들을 청와대로 초청했다. 대통령과의 영수 회담만 요구하던 황 대표도 조문 답례 자리에는 흔쾌히 응했다.
문 전 대통령은 바쁜데도 문상을 와준 야당 대표들을 각별히 대접하겠다면서 청와대 본관이나 상춘재가 아닌 관저로 초청해 만찬을 함께했다. 한 달 반 전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사퇴를 요구하며 삭발을 했던 황 대표는 까까머리로 모임에 나왔다. 회동에선 형식이나 의제도 없이 허심탄회하게 다양한 얘기가 오갔고, 모처럼 얼굴 본 김에 언쟁도 했다고 한다. 회동이 끝나고 청와대는 협치가 복원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당시 모임의 성격이 조문 답례였기에 제안하는 쪽이나 초청받은 쪽 모두 편하게 회동에 응할 수 있었다. 만남에 따른 정치적 계산에 급급하지 않았고 극성 지지층의 눈치도 덜 봤다. 윤 대통령도 1년 넘게 야당과 일절 교류가 없다가 불쑥 회동을 제안하기 민망할 수 있을 텐데, 조문 답례 형식이라면 그런 부담은 털어내도 괜찮을 것 같다. 야당이야 줄기차게 대통령과의 회동을 요구해왔던 만큼 제안이 온다면 반길 것이다.
비단 답례 목적이 아니어도 대통령이 해외에 나가 중요한 외교 농사를 짓고 오면 귀국해 여야에 설명하는 자리를 마련하는 게 관례다. 게다가 이번 한·미·일 정상회의에서는 도출할 결과에 따라 한반도를 둘러싼 외교적 지형이 격변할 개연성도 있다. 야당이 이에 찬성하든 반대하든 회담 결과가 나오게 된 배경을 설명하고 이해를 구하는 과정을 밟아야 한다. 그건 야당에만 이해를 구하는 게 아니라 현 정부를 지지하지 않는 절반의 국민에게 설명하는 자리이기도 하다. 그런 과정 없이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는 외교는 힘을 받기 어렵다.
2주 뒤 정기국회가 개회한다는 점을 고려해서도 회동이 필요하다. 윤 대통령은 야당의 입법 협조 없이 국정과제를 추진하기 얼마나 어려운지 실감하고 있다고 한다. 지난달 청년정책 점검회의에서는 “(야당 때문에) 국정과제 입법이 국회서 제대로 논의된 게 하나도 없다”고 어려움을 토로했었다. 그렇게 잔뜩 밀린 국정과제를 조금이라도 진척시키려면 이제라도 야당 지도부를 만나 협조를 끌어내야 한다. 민주당 이 대표는 민생 입법만큼은 적극 협조하겠다는 입장을 여러 번 밝혀 왔다. 그런 이 대표한테 대통령이 몇 가지 콕 집어 국정과제 입법을 부탁하면 거절하기 어려울 것이다.
조문 답례는 때를 놓치면 기회가 사라진다. 너무 늦지 않게 회동이 성사될 수 있도록 윤 대통령부터 야당에 마음을 열고, 주변에서 보좌하는 사람들도 국회를 오가며 분주히 움직여주기 바란다. 회동이 이뤄진다면 용산 대통령실로선 손해 볼 게 별로 없는 무조건 남기는 장사다.
손병호 편집국 부국장 bhso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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