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윰노트] 한 장의 종이가 책이 되려면
그들의 세계와 숨결 느끼길
책을 물성의 영역으로 놓고 이야기하자면 빠트릴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인쇄소와 제본소, 후가공업체 등 제작처에서 일하는 이들이다. 출판사의 편집자와 디자이너가 작업한 것들의 마지막 시각 구현은 제작처에서 가능하다. 독자가 눈치채기 힘들 정도로 사소한 책의 요소들을 미세 조정해 편집한 작업물을 제작처에서 무심히 만든다면 독자에게 책이 가닿기도 전에 당혹스러운 상황에 처한다. 컬러의 조정과 정확한 접지, 깔끔한 재단, 책의 미감을 높일 에폭시나 박 등 후가공까지 제대로 이뤄져야 한 권의 책으로서 가치가 제대로 성립된다. 전자책이니 오디오북이니 다양한 책의 버전이 나와 있는 지금도 출판계는 여전히 종이책의 비중이 높기에 제작처에서 일하는 사람들에 대한 특별한 감흥이 있다.
“종이 성분의 약 8퍼센트는 수분이다. 습도나 온도에 따라 미세하게 신축하고 변질된다. 봄부터 여름까지는 습도가 높아서 종이와 종이가 들러붙기 쉽다. 공기를 충분히 넣어주지 않은 채 급지부에 세팅하면 종이가 막히거나 여러 장이 한꺼번에 들어가는 겹침이 발생하기 쉽다.” 일본 번역서 ‘책의 엔딩 크레딧’에 나오는 문장이다. 인쇄소에서 종이를 얼마나 세심히 다루는지 묘사하는 대목에 이르면, 인쇄기를 다루는 사람의 표정이 저절로 떠오른다. 인쇄 자동화 기계로 뭐든 수월하게 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사람의 판단이 먼저고 손을 거치지 않는 일은 없다.
영화의 엔딩 크레딧에는 한 편의 영상 제작에 관여한 모든 사람의 이름이 기록된다. 책에는 모든 이름이 기록되지 않는다. 책의 제작 관련 기록이라고 할 수 있는 판권 페이지에는 발행인과 편집자, 마케터 등 출판사 스태프 이름이 기록되지만 출판사에서 하청하는 제작처의 스태프 이름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기록되지 않는다고 존재감이 약한 것은 물론 아니다.
인쇄 등 제작처의 일을 책과 관련해 인상 깊게 보여주는 전시회가 열렸다. 우리나라 최초로 책을 주제로 만들어진 공영 박물관 ‘송파책박물관’의 ‘책이 된 인쇄’ 전시다. 구성이 신선한 이 전시회에는 하루 1500여명의 방문객이 찾아온다고 한다. 인쇄용지를 접는 등 직접 체험하는 코너에서는 자료들이 곧잘 동이 날 정도다. 왜 책의 제작 전시에 사람들이 몰리는가. 책의 이면을 볼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일상적으로 만났던 물성의 책에서 새로운 세계와 일하는 사람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전시회다. 전시장 한쪽 벽면에 흘러가는 영상물에는 제작처 사람들의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어떤 생각으로 책을 만들고 있는지를 보고 있자면 가슴 한쪽이 뭉근하게 데워진다. 고된 노동의 토로도 있지만 자부심은 다른 차원으로 강조된다.
책을 읽을거리로만 생각한다면 저자의 메시지나 이야기가 다다. 하지만 책의 세계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책의 표지와 레이아웃, 종이 질감과 색감 등을 맛보고 즐기는 적극적인 독서는 행간을 읽는다는 의미 그대로 자기만의 책과 교감하는 방식이 된다.
어떤 책에서든 ‘파본은 교환해 드립니다’라고 인쇄된 문구를 발견할 수 있다. 이는 제작처의 고심과 연결돼 있다. 접지 과정에서 일정 페이지가 누락되거나 순서가 바뀌는 것은 제작처의 장인이 아무리 노력해도 적은 비율로 발생하곤 한다. 이 인간적인 파본은 책 교환으로 해결되지만 책 전체가 잘못된 경우는 ‘제작 사고’다. 출판사에서 싫어하는 말 중에 거의 첫손에 꼽히는 건 ‘제작 사고’가 아닐까 싶다.
제작 담당자가 따로 있는 큰 출판사이든, 모든 걸 혼자서 해결하는 1인 출판사든 책의 완성도가 제작처에서 결정된다는 걸 모르는 출판인은 없다. 책 뒤에 숨은 사람, 기계와 함께 호흡하는 노동의 면모가 무엇인지 보여주는 이들이 제작처에 있는 것이다.
‘책이 된 인쇄’의 전시 카피는 ‘한 장의 종이가 책이 되기까지’다. 출판사에서 책 파일을 만들어 넘기고, 그 파일을 종이로 옮기는 순간부터 제작처의 역량은 빛을 발한다. 책에서 온기를 느낀다면, 사람의 손길에서 탄생한 것이기 때문이리라.
정은숙 마음산책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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