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정애의 시시각각] 혁신안, 혁신적이지 않다
예상대로였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어제 서울중앙지검에 출석할 때 지지자 200여 명이 “정치검찰 조작 수사 중단” “이재명은 죄가 없다”를 외쳤다. 뭐든 감싸는 ‘팬덤’이다.
이걸 보며 한때 우리 진보 진영에도 영감을 줬던 영국 노동당과 당수였던 제러미 코빈이 떠올랐다. 코빈은 30여 년 변방의 정치인이었다. 갑자기 참신한 인물로 여겨졌고 열광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노동당 기준으로도 심한 좌파여서 결코 총리로 선출될 수 없을 것이란 전망이 이들에겐 중요하지 않았다. 팬덤은 그를 밀어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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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당 이어 야당도 당원투표 늘려
팬덤 영향력 키워 민주주의 역행
영국 노동당 참패 경험서 배워야
」
노동당이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이들이 활동할 공간도 마침 열렸다. 1980년대 이전엔 원내노동당-노조-지역당원의 투표 비중이 각각 같았다. 이 중 노조·지역당원은 특정 후보에게 몰아서 투표(블록투표)할 수 있었다. 상대적으로 좌파의 발언권이 컸다. 마거릿 대처에게 연패한 후에야 ‘1인 1표’로 바꿨다. 노조 등의 기득권을 허물었다. 이후 13년 노동당 집권이 가능했던 배경이다.
여기까지면 좋았을 것이다. 2014년엔 3파운드(약 5120원)만 내면 투표할 수 있게 했다. 중도·합리적 사람들에게 투표 기회를 주겠다는 명분이었다. 정작 수혜자는 코빈이었다. 2015년 당수 경선 때 10만여 명이 추가등록했는데 이들 중 84%가 그를 지지했다. 59.5%, 압승이었다.
코빈은 당 본류와 불화했다. 그러자 일부 지지자들이 ‘모멘텀’(개딸 격)을 만들어 압박했다. 급기야 의원들이 들고 일어났고 불신임 투표에 부쳐졌다. 코빈이 40대 172로 참패했다. 의사당 밖에선 1만여 명의 지지자가 항의시위를 했다. 다시 당수 경선이 열렸고, 코빈은 더 이겼다(61.8%). 코빈 지지자들은 ‘겁쟁이들의 쿠데타(chicken coup)’라고 비아냥댔다.
영국 노동당의 사례를 길게 인용한 건, ‘당원 민주주의’ ‘정당 민주화’가 아름다운 말이나, 현실에서도 그런 건 아니란 얘기를 하기 위해서다. 당원, 더 나아가 지지자로의 개방이 나쁜 결과를 낳곤 했다.
미 대선 예비선거에서 프라이머리(개방형 국민경선) 확대를 두고 80년대 초 정치학자 넬슨 폴스비는 이런 관찰을 했다. ①시민·여성·인종 등의 새로운 그룹의 발언권이 세졌는데, 주로 미디어에 의존해서였고 ②미디어가 정치의 중개자가 되다 보니 단기적으로 특정 의견이 강해지는 현상이 나타났으며(광풍이나 광기) ③정치엘리트들이 대중의 관심을 유도하기 위해 이데올로기를 동원하는 모습을 보였고 ④소수의 지지만으로도 이길 수 있어서 정작 본선 경쟁력은 보장받지 못했고 ⑤잘못된 후보로 조기에 컨센서스가 이뤄지는 걸 막을 중요한 정보가 공유되지도 않았다. “조악한 포퓰리스트 용어로 ‘더 민주적’으로 만들었는데, 그러는 사이 경쟁 후보들의 장단점을 알고 아마추어와 선동가를 걸러내는 데 도움을 주었던 정치 전문가들의 영향력을 약화시켰다”(『현실주의자를 위한 민주주의』)는 것이다.
그로부터 40년이 흘렀다. 민주주의가 나빠지면 나빠졌지, 좋아지지 않았다. 정치적 양극화는 극심하고 당파성은 더욱 강화됐다. 우리도 크게 다르지 않다. 아니, 우리에겐 사나운 팬덤도 있다. 근래 정당의 선거와 결과를 보라. 우리의 대리인이란 사실을 부인하고픈 사람들이 뽑히고 있다.
이런 가운데 민주당이 당 대표·최고위원 선출 시 대의원과 권리당원 간 ‘1인 1표’로 등가성을 맞춰 사실상 대의원제를 폐지하고 권리당원의 역할을 늘리는 안을 내놓았다. ‘혁신안’이라지만 실상 ‘퇴행안’이다. 국민의힘이 당원투표만 100% 반영하고 과반수 득표자가 없을 때 결선투표를 하기로 한 것만큼이나 잘못이다.
참고로, 코빈은 총선에서 연거푸 진 후에 자진사퇴했다. 후임 당수인 키어 스타머는 코빈이 무력화한 원내노동당의 발언권을 되살렸다. 당원들 권한도 줄였다. 보수당이 엉망진창인 탓도 있다지만, 노동당은 비로소 집권 가능성을 꿈꿀 수 있게 됐다.
고정애 chief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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